축구팬들에게는 말 그대로 충격이다.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가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에 진출하지 못 했다. 이탈리아는 14일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쥬세페 메아챠에서 열린 스웨덴과의 2018 러시아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플레이오프 2차전 경기에서 0-0으로 비겼다. 1차전에서 0-1로 패했던 이탈리아는 홈에서도 승부를 뒤집지 못하며 결국 최종 전적 1무 1패로 월드컵 본선행이 불발됐다.
이탈리아를 월드컵 무대에서 볼 수 없게 된 것은 햇수로 따지면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이후 무려 60년만이다. 1962년부터 14회 연속 본선진출 기록은 월드컵 역사에서 역대 3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기도 했다. 전세계를 통틀어 50대 이하의 축구팬들에게 '이탈리아 없는 월드컵'이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초유의 상황인 셈이다.
비록 침체기를 겪고 있다고는 하지만 월드컵 우승만 통산 4회(1934,1938, 1982,2006)에 이르는 전통의 강호 이탈리아가 이렇게 허무하게 몰락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스웨덴전 이후 이탈리아 유명 매체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가 헤드라인으로 언급한 '대재앙'(apocalypse)이라는 표현이 현재 이탈리아 축구계와 팬들의 심경을 그대로 요약한다.
냉정히 말하면 이탈리아는 마지막 메이저대회 우승이었던 2006년 독일월드컵 이후 지난 10여년 간 지속적인 하향세였다. 2010 남아공월드컵과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는 2회 연속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나마 유럽선수권대회에서는 2012년 준우승, 2016년 8강으로 체면치레하기는 했지만 강팀과의 대결에서는 한계를 드러냈고 더 이상 유력한 우승후보로 분류되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이탈리아 축구계를 강타한 '칼치오폴리'(승부조작) 스캔들 이후 리그의 부패와 스타급 선수들의 연이은 유출로 자국리그 세리에A의 수준이 급락한 것도 이탈리아 대표팀 경쟁력의 하락에 연달아 영향을 미쳤다. 한때 유럽 최고의 리그를 자부하던 세리에는 현재 프리미어리그(잉글랜드)-프리메라리가(스페인)-분데스리가(독일) 등에 인기와 시장규모 등을 추월당한지 오래다.
대표급 선수들을 다수 배출했던 AC밀란-인터밀란 등의 명문팀들이 몰락하면서 현재 세리에 A는 유벤투스 정도만이 몇 년째 일방적으로 독주하는 리그로 전락했다. 현재 이탈리아 대표급 선수들은 대부분 자국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고 마테오 다르미안(맨유), 마르코 베라티(PSG) 등 몇몇 선수들을 제외하면 해외 빅리그의 명문팀에서도 인정받는 '핫한' 이탈리아 스타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가 됐다.
특히 '공격수 기근'이 역대급으로 심각하여 몇 년째 이탈리아의 최전방에 확실한 붙박이 주전이라고 할만한 선수가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과거 토티, 델 피에로, 칸나바로, 말디니, 피를로 등 이름만으로 축구팬들을 설레게 하던 '판타지 스타'가 즐비하던 아주리 군단의 위상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플레이오프서 무승, 수비적 전술이 이탈리아 발목 잡아이번 러시아월드컵 유럽예선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조별예선에서 또다른 강호인 스페인가 한 조에 묶이게 되면서 본선 직행이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 바 있다. 이탈리아는 G조에서 7승 2무 1패(승점 23점)로 한 번밖에 지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무패행진을 달린 스페인(9승 1무)과의 맞대결에서 패하며 2위로 결국 우려한 대로 플레이오프까지 밀렸다. 또한 플레이오프에서는 끈끈한 조직력을 보인 스웨덴에 발목을 잡히며 비운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말았다.
특히 이탈리아 현지 언론의 분위기는 월드컵 탈락의 책임을 지암피에로 벤투라 감독의 '전술적 무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다. 벤투라 감독은 지난해 7월 첼시로 자리를 옮긴 안토니오 콘테 감독의 후임으로 이탈리아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전임자와 달리 경직된 전술운용과 세대교체 실패로 임기 내내 비판 여론에 시달려왔다.
조별예선에서 스페인에 밀린 것은 어쩔수 없다해도 이탈리아 팬들이 분노하는 이유은 스웨덴과 플레이오프에서의 심각한 졸전이다. 간판스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맨유)가 은퇴한 스웨덴은 북유럽 전통의 강호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가 넘지 못할 정도의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스웨덴을 상대로 2경기에서 승리는커녕 단 한골도 뽑아내지 못하는 심각한 빈공에 시달렸다. 이탈리아 축구 전문가들은 벤투라 감독의 잘못된 선수기용과 전술이 경기를 망쳤다고 평가하고 있다.
벤투리 감독은 지도자 인생 내내 투톱을 구사하는 3-5-2 전술을 선호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가 이탈리아 대표팀을 맡은 이후 스웨덴전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경기에서도 이 전술로 나섰다. 문제는 현재 이탈리아 대표팀의 선수 구성상 이 전술과는 그리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재 이탈리아는 대형 스트라이커가 없는 대신 로렌조 인시네와 슈테판 엘 샤라위, 도메니코 베라르디 등 주로 측면에서 강점을 보이는 2선 공격수들이 풍부하다. 하지만 전문 윙어를 두지 않는 3-5-2에서는 이들의 능력을 극대화하기가 어렵다. 벤투라의 팀은 경기내내 좌우 윙백들의 크로스에 의존하는 단조로운 공격루트를 고집했고, 중원에 미드필더를 세 명이나 배치하고도 이들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경기 내용이 투박해지는 결과를 자초했다.
심지어 반드시 다득점 승리가 필요했던 스웨덴과의 홈 2차전에서도 전문가들의 조언을 끝내 무시하고 종료 휘슬이 울릴때까지 수비적인 3-5-2 전술 한가지만 고집하다가 끝내 무득점 탈락이라는 재앙을 맞이했다. 경기 후반 교체 투입 준비를 지시받은 수비형 미드필더 다니엘레 데 로시가 오히려 황당해하며 "우리는 지금 득점이 필요한데 왜 인시네같은 공격수를 쓰지않냐"고 코칭스태프에게 항의하는 장면은 방송중계에도 잡히며 이탈리아의 '막장' 분위기를 보여주는 전설적인 자료화면이 됐다.
사실 벤투라 감독은 부임 당시부터 현지에서도 '자격 논란'에 휘말렸던 인물이다. 벤투라는 현역 시절 2.3부리그를 전전하던 초라한 선수생활을 보냈고 지도자로서도 30년이 넘는 감독인생 동안 강팀을 맡아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레체와 토리노를 이끌고 잠시 짧은 성공을 맛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팀에서는 2~3년을 넘기지 못하고 경질과 1,2부 강등을 반복한 전형적인 '저니맨' 감독이었다. 축구인생 내내 이탈리아를 떠난 적이 없어서 국제적인 인지도나 명성도 전무했다. 이탈리아 축구협회가 왜 2~3류급의 감독을 선임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이탈리아 축구의 몰락, 한국 축구도 반면교사로 삼아야이탈리아의 몰락은 사실 우리에게도 남 일 같지만은 않다. 한국은 비록 9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지만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하마터면 지금의 이탈리아 같은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감독 선임 논란과 무능한 리더십, 협회의 안이한 행정이 맞물리며 본선탈락이라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할 뻔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쟁국들의 도움과 행운이 맞물리며 간신히 본선행 티켓은 사수했다. 냉정하게 말하여 자력으로 얻어낸 티켓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축구는 몇 달째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후유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충격적인 본선 탈락 직후 잔루이지 부폰, 조르쥬 키엘리니, 안드레아 바르찰리, 데 로시 등 베테랑들이 잇달아 대표팀 은퇴의사를 밝히며 벌써부터 후폭풍이 우려되고 있다. 또한 월드컵 탈락이 이탈리아 축구산업 전반에 가져오게 될 파장은 앞으로도 한국축구에 좋은 반면교사가 될 만하다.
축구에 영원한 강자는 없고, 모든 흥망성쇠에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한다. 비교적 손쉬운 아시아 무대에서 오랫동안 강자의 지위를 누려온 한국은 그간 "월드컵 본선쯤은 당연히 나가겠지"하고 안이한 분위기에 젖어있던 것도 사실이다.
이탈리아의 몰락은 월드컵이 얼마나 나가기 어려운 무대인지, 한국이 그동안 월드컵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기회와 혜택을 누렸는지를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 됐다. 앞으로 한국축구도 그간의 시행착오에 대하여 뼈저린 자성이 없다면 언젠가는 이탈리아나 네덜란드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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