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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정치인이자 외교관, 음운학자인 신숙주(1417~1475)의 외교사상 '내수(內修)론'을 오늘날 대한민국 외교가 참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학술대회에서 제기됐다.

27일 오전 서울 서빙고로 국립한글박물관 강당. '신숙주 탄생 6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시작되었다. 150석 수용 규모에 400명 가까이 몰려 큰 혼잡을 빚었다. 빈 공간에 보조의자를 놓기에 바빴고, 선 채로 듣는 청중도 수십 명에 달했다. 300부를 준비한 학술대회 자료집이 순식간에 동났을 정도였다. '좌석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않았다'면서 주최 측에 고함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한글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대성황을 이룬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날 학술대회는 한글학회와 고령신씨 대종회가 공동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후원했다. 학자 8명이 발표자로 나서, 한글의 반포와 보급, 외교와 국방 분야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신숙주를 재조명했다.

한글학회가 주최한 신숙주 탄신 600돌 학술대회에 수많은 청중이 참석하였다.
▲ 성황리에 개최된 신숙주 학술대회 한글학회가 주최한 신숙주 탄신 600돌 학술대회에 수많은 청중이 참석하였다.
ⓒ 신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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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자들은 "조선왕조의 터전이 아직 튼튼히 잡히지 못한 건국 초기에 외교 국방 내정의 어려운 국사를 한 몸에 지니고 5백년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고 신숙주를 평가했다. 또, "고유문자를 갖지 못한 이 겨레가 문자를 가질 수 있도록 세종을 도와 문자 혁명을 대성케 하였다"면서 "문과 무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탁월했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세종조에서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여섯 왕조를 섬기며 명과 일본을 내왕하며 국위를 선양하였다"면서 "북방 야인을 정벌하고 평정하여 변경의 근심을 없앴으며, 내정을 쇄신하여 신흥 국가를 반석 위에 안정시켰다"고 평가했다.

한국 외교는 외양(外樣)은 화려하나 내수(內修)가 극히 빈곤

특히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은 '신숙주의 '내수(內修)외교'에서 배울 점-그의 중국·일본·여진 외교 전략의 관점에서-'를 주제로 신숙주의 외교전략을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및 북한 미사일 발사로 외교 입지가 좁아진 한국 상황을 감안했는지 청중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박 소장의 발표를 경청했다.

박현모 소장은 "오늘날 한국 외교는 한마디로 외양(外樣)은 화려하나 내수(內修)가 극히 빈곤하다"며 최근 한국이 외교인재와 외교전략 부재로 곤경에 처한 상황을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한때 유엔 비상임이사국으로,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로 우쭐하기도 했다. OECD 회원국이자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대중문화의 한류 바람 등도 우리의 외양을 화려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전제했다.

하지만 그는 "몇 년 사이에 사드 배치 및 북한 미사일 발사 등 핵심적인 국가이익과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 한국은 거의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는 일차적으로 '세월호 사건'이나 '대통령 탄핵 사건' 등으로 국격이 급격히 추락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장기적인 외교전략이나 뛰어난 외교인물의 부재에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신숙주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27일 한글박물관에서 열렸다.
▲ 신숙주 학술대회 신숙주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27일 한글박물관에서 열렸다.
ⓒ 신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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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인재 적극적 양성하고 적재적소 배치해야

박 소장은 "신숙주가 말한 내수외교론, 즉 외교 인재의 적극적인 양성과 적재적소 배치를 지금 당장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소장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시로 세종시대의 외교 인물인 박안신을 들었다. 그는'7년 묵은 중병을 치료하려면 지금이라도 당장 3년 묵은 쑥(三年之艾)을 준비해야 한다'는 세종실록 문헌을 들며 '3년 묵은 쑥'으로 비유되는 외교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박 소장은 이를 위해서 중국과 일본과 미국을 갖추 아는(備諳) '외교인재 300 프로젝트'를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금이라도 젊은 인재를 선발해 국비 장학생으로 이들 국가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신숙주가 외교에 힘써 온 다른 인물들과 달리 <해동제국기>를 집필하고 거기에 자신의 외교철학을 개진한 점에 주목한다. 그는 이예(李藝, 1373∼1445)와 더불어 15세기 조선 외교의 중심인물이라고 평가 받는다. 두 사람은 특히 복잡하고 위험한 일본과의 관계를 풀어간 전문 외교관인데, 이예는 15세기 전반부를, 신숙주는 후반부를 이끌어간 대표 인물이다. 이예가 1400년부터 1443년까지 무려 40차례가 넘게, 거의 매년 한 차례씩 현해탄을 건너가 667명의 포로를 송환해 온 것처럼(세종실록 27/2/23), 신숙주는 16차례 가량 일본과 명나라와 여진족 거주 지역을 오가며 외교와 전쟁의 임무를 수행했다.

신숙주는 세종과 세조의 명을 따라 '내수론' 외교정책 기조, 즉 '신뢰에 기반한 교린'이라는 원칙에 따라 일본 및 여진족 외교를 했다. 그는 일본이나 여진족을 대하는 외교의 요체로 '내수'를 들었다. "오랑캐를 대하는 방도는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 있지 않고 안을 잘 정돈하는 데 있고, 변방 방어에 있지 않고 조정(朝廷)을 잘 이끄는 데 있으며, 군대를 튼튼히 하는 데 있지 않고 기강을 잘 세우는 데 있다[待夷狄之道 不在乎外樣 而在乎內修, 不在乎邊禦 而在乎朝廷 不在乎兵革 而在乎紀綱]"는 <해동제국기>의 기록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군사력 기반으로 한 대외정벌은 역효과 초래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대외 정벌이 아니라 국가 기강을 다지고 조정을 잘 통솔하는 것에서 외교 능력이 생긴다는 이 말은 현대의 외교정책 이론과도 잘 부합한다. 즉 뛰어난 외교관은 자국의 국력 요소들 중 활용 가능한 것을 잘 조화시키는 사람인데, 사용 가능한 국력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부의 질(quality of government)'이다.

'정부의 질'은 특정 외교정책에 관한 초당적 협력과 함께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유연한 힘(soft power)'인데, 이는 국방력이나 경제력 혹은 지정학적 위치와 같은 '경직된 힘(hard power)'보다 외교력을 결정하는 데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27일 열린 신숙주 탄신 600돌 기념 학술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 신숙주 학술대회 27일 열린 신숙주 탄신 600돌 기념 학술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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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신숙주가 말하는 '내수론'은 지도자의 철저한 자기 관리와 위임하는 인재 쓰기다. 이는 '자기를 수양해서 남을 다스리고(修己而治人), 안을 가다듬어서 밖을 다스려야 한다(修內而治外)'는 유교 지도력의 원칙에 뿌리를 둔다. 주변에 있는 일본이나 여진과 가까이 지내며, 무력이 아닌 예(禮)와 의(義)로 그들의 마음을 수렴할 때 비로소 다스림의 공효(治化)가 사방의 오랑캐들에게까지 미칠 것(遠達四夷)이라는 게 신숙주 외교론의 핵심이다.

신숙주는 '내수론'에 어긋나게 행동해서 실패한 사례로 한 무제와 수양제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한 무제와 수양제는 가까운 것을 버려두고 멀리 있는 것을 차지하려 애썼고(捨近而圖遠), 군사력만 믿고 함부로 전쟁을 일으켜 무덕(武德)을 더럽혔다(窮兵而黷武). 그 결과 천하를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왕 자신도 보전하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한 억제력을 행사하고,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여기에 맞장구 치는 현실에서 신숙주의 '내수론'이란 외교술을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다.

일본과 명나라, 여진족 상대로 뛰어난 외교술 펼쳐

신숙주의 외교는 지역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는 20대 후반과 30대 전반의 나이에는 일본과 명나라 지역을 다녔고, 40대 중반의 나이에는 두만강 변 여진족 거주 지역에서 주로 활약했다. 그는 27세 때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29세 때는 어학 연구자로 요동지역에 갔는데 즉석에서 수준 높은 시를 짓거나 뛰어난 음운학 실력을 발휘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연보(年譜)'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신숙주의 외국행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1443년(세종 25년) 2월부터 9개월 동안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행, ② 1445년(세종 27년) 1월부터 운서(韻書) 질문을 위해 13차례 중국 요동 지역 왕복, ③ 1452년(문종 2년) 10월부터 4개월 동안 서장검찰관으로 명나라행, ④ 1460년(세조 6년) 7월, 여진족 토벌군 사령관으로 중국 만주행 등을 들 수 있다.

박현모 소장은 "한국 외교는 세종대왕의 '성신(誠信) 실용외교', 즉 '강대국에는 정성(誠)으로 사대하고, 주변국에는 신뢰(信)로 교린한다'는 외교 원칙을 계승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사방이 외적으로 에워싸인 우리나라로서는 국제정세의 세력변화를 민감하게 파악하여 새롭게 부상하는 패권국과의 동맹을 구축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한다"면서 "아울러 주변국과의 신뢰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신숙주가 말한 내수외교의 힘, 즉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내부 소통을 극대화해서 우리의 외교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정부 조직과 여론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신숙주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27일 한글박물관에서 열렸다.
▲ 신숙주 학술대회 신숙주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27일 한글박물관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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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깊숙이 알고 중국 움직임 제어하고 미국 상대로 국익 지켜내야

박 소장은 "일본을 깊숙이 알고(備諳日本) 중국의 자의적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으며(制御中國), 미국을 상대로 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專對美國) 신숙주 같은 외교 인물을 찾고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지도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①'훈민정음, 동국정운과 음운학자 신숙주'(김슬옹, 연세대) ②'조선통신사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허경진, 연세대) ③'신숙주의 대일․대명 외교전략'(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 ④'조선초 격변기 신숙주의 정치적 역할'(신병주, 건국대) ⑤'신숙주의 국방정책'(김경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⑥'조선전기 미술평론가 신숙주'(고연희, 이화여대) ⑦'조선전기 서예가로서의 신숙주'(이기범, 경기대) ⑧'보한재  전집과 신숙주 평전'(박덕규, 단국대) 등을 발표했다. '신숙주 공적비' 외 관련 사진과 '신숙주 평전', '신숙주 유물과 서적'도 전시했다.


태그:#신숙주, #문재인, #트럼프, #외교, #내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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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글쓰기 전문가. 스포츠조선에서 체육부 기자 역임. 월간조선, 주간조선, 경향신문 등에 글을 씀. 경희대, 경인교대, 한성대, 서울시립대, 인덕대 등서 강의. 연세대 석사 졸업 때 우수논문상 받은 '신문 글의 구성과 단락전개 연구'가 서울대 국어교재 ‘대학국어’에 모범예문 게재. ‘미국처럼 쓰고 일본처럼 읽어라’ ‘논술신공’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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