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부산국제영화제


01.

2001년 연출했던 <고양이를 부탁해>(2001)로 신인 감독상을 받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정재은 감독. 이후 장편 영화로 그녀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만한 게 2005년의 <태풍태양>(2005). 이후 그녀는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오가며 활동했다. 6년 전 작품인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와 <말하는 건축 시티: 홀>이 그녀의 작품이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녀이지만, 여성 감독의 명맥을 이어왔던 주자의 한 명으로 그녀의 작품을 기다리던 관객들에게는 다소 아쉬운 행보였을 것이다. 그녀가 오랜만에 연출한 장편 영화 <나비잠>이 더욱 반가운 이유다. 그녀는 이 작품을 제작하기에 앞서 단순히 슬픈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의외다. 과거의 정재은 감독은 청춘들의 꿈과 현실, 그들만이 가진 뜨거운 무언가에 관해 이야기했었으니까. 영화 <나비잠>은 유전성 알츠하이머를 앓게 된 유명 작가 료코(나카야마 미호 역)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벌어지는 일들을 담담하게 눌러 담은 작품이다.

02.

사실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러브레터>(1999)의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가 처음으로 한국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게 되어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최근에는 TV 드라마로만 활동하다 스크린으로 4년 만에 복귀한 그녀는 이번 작품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하기도 했다. 관객들을 향해 '오겐키데쓰카'를 외치며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장면을 재현하기도 해 현장의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었다는 후문. 하지만 알츠하이머를 앓는 작가를 연기해야 했던 만큼 이번 작품의 료코라는 인물이 절대 쉽지 않았다고 한다.

ⓒ 부산국제영화제


03.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한 작품은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최근에는 <스틸 앨리스>(2015)를 통해 줄리안 무어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국내 작품 가운데도 손예진, 정우성 주연의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대표적인데, 같은 소재를 활용하고 있지만 세 작품 사이에는 그 방향성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줄리안 무어가 보여줬던 <스틸 앨리스>의 앨리스라는 인물은 투병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한 개인의 내면과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작품이다. 반면,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손예진이 연기한 수진의 경우에는 그녀 자신의 문제를 조명한다기보다 철수(정우성 역)와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야기, 환자와 보호자 사이의 감정과 특히, 보호자인 철수의 시선에 조금 더 무게를 둔다. 이 작품 <나비잠>에서는 위의 두 작품과 또 다른 모습이 그려진다. 알츠하이머 증세와 투병 과정이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준비하는, 남은 기억을 갈무리하는 지점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04.

영화는 전체적으로 료코와 찬해(김재욱 역)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큰 노력을 쏟는다. 만년필 사건을 계기로 만난 두 사람이, 료코의 강아지 톤보를 산책시키는 일과 서재 책장의 책들을 색상별로 정리하는 일, -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정리가 끝난 서재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다. - 그리고 원고를 대신 써 주는 일까지 관계를 이어가며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고 키워나가는 식이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가운데 앞서 제시했던 암시적 소재들을 이야기 속에서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갈무리하는 것 역시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정재은 감독의 연출. 특히 주인공 료코가 시간이 갈수록 기억을 잃어가는 병을 앓고, 마지막에는 결국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가 기억이 또렷한 시절 말한 대사들을 이후 찬해의 행동과 기억으로 다시 한번 활용하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 부산국제영화제


05.

다만,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차분한 톤으로 균일하게 유지되는 것과 달리 너무 많은 상황이 개입되는 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결을 무너뜨리는 느낌을 준다. 자신의 알츠하이머 증세를 인지한 료코의 결심으로 인해 우연히 이어진 찬해와 료코의 만남과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으로 발전하여 이 작품의 흐름이 된다. 그 과정에서 전 남편이 등장하는가 하면, 강아지 톤보를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장면들이 몰입을 방해하는 것. 물론 그 개별적인 사건이 겉으로 볼 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밑에 숨어 있는 컨텍스트 때문인데, 전남편과 료코가 료코와 찬해의 관계처럼 사제지간이었다는 것과? 사제지간이었던 전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찬해와의 관계에서 발생할 사건의 암시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나는 전남편의 존재, 그리고 만년필을 찾으면서 모든 물건은 주인을 찾아오더라는 대화와 료코의 실종이 그 결을 달리하는 것이 작품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두 가지 상황 모두 료코의 증세가 악화하고 있다는 것, 그 증세를 찬해에게 떠넘기기 싫은 료코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들이지만,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해 주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영화 속 료코의 마지막 소설을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장면들이 이따금 현재의 이야기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국제 영화제에서 또 다른 화제작 가운데 하나였던 토드 헤인즈 감독의 <원더스트럭>(2017)에서도 시기가 다른 두 지점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제시되지만, 그 작품에서 두 이야기는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만약 료코 속 소설의 이야기가 현재의 두 사람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거나, 나비잠이라는 타이틀의 숨겨진 이야기를 대신 할 수 있었다면 이 작품의 깊이가 더 깊어질 수 있었지 않을까 싶다.

06.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의 사랑과 이별이라는 통속적이고 뻔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영화에서 눈을 떼기 힘든 것은 앞서 설명했던 대로 섬세한 디테일 때문일 것이다. 요양소로 떠나는 날, 마지막 순간에 사랑했던 찬해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료코의 모습. 상대가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왠지 과거에 친밀한 대상이었을 것만 같은 기시감과 같은 기분에 차에 올라서도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는 장면이라던가, 언젠가 두 사람이 나누었던 우연과 관련된 이야기. 두 사람의 만남이 우연이었겠지만 그 안에 무엇인가 있었으리라는 말을 우연의 도서관이라는 형식을 빌려 남겨둔 료코의 마음. 출간된 자신의 마지막 소설 속에 찬해도 모르는 우리의 발자국을 새겨두는 일과 같은 모든 행동 속에 그런 세심한 연출이 녹아있다. 그런 부분들을 통해 관객들은 알게 되는 것이다. 료코가 마지막에 찬해에게 했던 그 행동이 정말 그를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발 자신을 붙잡아달라는 뜻이었다는 것을. 료코는 알지 못했던 나비잠이라는 단어를 언젠가 찬해가 떠올려준 것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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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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