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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멜버른 다운타운을 일컬음)에 있는 Degraves 거리에 갔다. 양쪽으로 식당과 카페들이 빈틈없이 들어섰고, 인도 중앙은 노천카페로 꾸며져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사시사철 분주한 곳이다.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만두를 주문하다 옆자리 커플에 시선이 몇 초간 머물렀다. 게이 커플이 음식을 기다리며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꿀이 뚝 떨어질 듯한 시선과 식사 내내  포개져 있는 두 손을 보자니 미소가 절로 나온다. 상대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열고 표정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흰머리가 오늘은 몇 개씩 올라와 있고, 아이 손 잡을 일은 많아도 남편 손 잡은 기억은 억만 년 전처럼 여겨지고, 아이 기분과 짜증 받아내느라 감정이 메말라가는 40대에게, 몰입도 충만한 연인들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동성애자 감별맹' 한국인들

멜버른에서 살다 보니, 종종 동성커플을 만나게 된다. 내가 만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지인은, '한국에는 동성애자가 별로 없었는데, 호주에는 왜 이렇게 많냐'고 불만인지 우월감인지 모를 하소연을 한다. 사회 분위기가 허용적이니 호기심에 빠져 들어 동성애 인구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고백하자면, 10여년 전의 나도 브라질에서 건너온 남편에게 그녀처럼 보였을 것이다. 연애 당시 남편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일리야(가명)를 몇 번 만났었다. 가을 밤 늦게까지 이어진 일리야 생일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물었다. "혜정은 일리야가 게이인 거 아직 모르죠?"

2013년 동성혼이 합법이 된 브라질 출신 남편은 한국인들을 '동성애자 감별맹'이라 불렀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성커플을 인지하지 못하고  동성애 혐오발언을 하고 있는 경우도 본 적이 있다며, 결국 눈치채지 못할 만큼 본인들의 삶에 불편도 없으면서 막연한 혐오와 거부감을 쏟아낸다고 우려했다.

고향 러시아에 돌아가고 싶은 일리야가 한국에 머무르는 이유 또한 동일하다. 한국에서 연인과 거리를 걷다 보면 '게이 외국인 커플'보다는 '외국인 남자 친구'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지인의 희망처럼 한국이 동성애 인구가 상대적으로 낮은 '청정지역'이 아니라, 극도로 성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여서 성 소수자들이 드러내지 않았거나 보여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전 세계 20여개가 넘는 동성혼 합법 국가들의 경우, 법제화 때문에 동성애자의 숫자가 느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권리를 보장해주기 때문에 더 이상 성적 정체성을 감출 필요가 없어진 경우일 것이다.

호주 생활 갓 시작한 한국인들이 '호주에는 거리에 왜 이렇게 장애인이 많나' 의아해 하다가 결국엔 알게 되는 이치다. 한국의 장애인 숫자가 적은 것이 아니라, 밖으로 자유롭게 나다닐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나 눈에 띄지않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었단 사실을 .

캔버라 공항에 걸린 '동성혼 합법화 찬성' 광고

지금 호주에서는 동성결혼(Marriage Equality) 찬반을 묻는 전국민 우편투표(Australian Marriage Law Postal Survey)실시 기간이다. 투표 결과에 따라 연방의회는 현재 결혼법을 개정할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호주에서 실시되고 있는 동성혼 찬반을 묻는 우편투표 용지
 호주에서 실시되고 있는 동성혼 찬반을 묻는 우편투표 용지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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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투표가 개시되는 날짜에 맞추어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교장은 학부모에게 안내 메일을 보냈다. 한국의 교육인적자원부와 같은 'The Department of Education and Training'에서  성적 취향이 다른 LGBTI 학생을 포함한 모든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도록 안내하는 '안전한 학교 프로그램'(Safe Schools Program)을 개발했으며, 주정부는 2018년까지 전 Government Secondary school(공립 중.고등학교)에서 이 프로그램을 학교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교육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는 안내문이다. 물론 초등학교에서도 필요하다면 각자의 여건에 맞게 활용될 수 있음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얼마전 방문한 호주의 수도 캔버라 공항에서 순간 멈칫했다. 공항 중앙에 큼지막하게 매달린  간판에는 "This business is YES (동성혼 합법화를 찬성합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호주 수도 캔버라 공항에 걸린 '동성혼 합법화에 찬성합니다.' 대형 광고물
 호주 수도 캔버라 공항에 걸린 '동성혼 합법화에 찬성합니다.' 대형 광고물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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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흐르면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이런 대형 광고물을 볼 수 있을까? 언제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동성혼 찬반여부를 묻는 투표 용지를 받게 될까?

느리지만 꾸준히, 결국엔 가능할 거라 여긴다. SNS에서도 예전에 비해 관련 글들이나 논쟁이 불붙는 경우를 자주 본다. YES든 NO든 공론화의 장으로 계속 불러들여 입에서 입으로 말과 생각이 부딪히고 엉키고 풀리다 보면, 결국엔 호주처럼 투표용지에 클릭할 날이 올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호주 동성혼 찬반 우편투표, #MARRIAGE EQUALITY, #동성혼 , #멜버른, #LGBTI 차별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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