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메이저리그 포스트 시즌을 지켜보면, 선발투수들의 정상적인 루틴(등판 사이 4~5일 휴식)을 깨뜨리고 일정을 당겨서 등판하는 투수들이 유독 많다. 선발투수들을 당겨쓰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3일만 쉬고 선발로 등판하는 투수가 있는가 하면 승부처에서 구원 등판하는 투수들도 있다.
메이저리그 정규 시즌이 팀당 162경기나 되기 때문에 선발투수 당겨쓰기는 정규 시즌에서는 활용할 수 없는 작전이다. 그러나 포스트 시즌에서는 매 경기를 결승전 같은 분위기로 한 순간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선발투수 자원이 부족한 경우 고육지책으로 당겨쓰기를 하는 팀들이 나온다. 간혹 투수들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선수 자원이 넉넉한데도 당겨쓰기를 하는 팀들도 있다. 보통 포스트 시즌은 2~3경기를 치른 뒤 이동일이 끼어 있기 때문에 4명의 선발투수만 활용해도 정상적인 루틴을 유지할 수 있지만, 당겨쓰기를 하는 팀들은 선발투수를 3명으로 운영한다.
갈수록 늘어나는 포스트 시즌, 에이스에게만 의존 못해메이저리그 초창기 포스트 시즌은 간단했다.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에서 정규 시즌 승률 1위를 차지한 두 팀이 월드 시리즈(7전 4선승제)를 치르면 끝이었다. 그런데 메이저리그의 규모가 점차 확장되면서 리그에 참가하는 팀들이 늘어났고, 1969년부터 각 리그는 동부지구와 서부지구로 나뉘었다.
각 리그가 2개 지구로 나뉘면서 각 지구의 우승 팀들이 격돌하는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7전 4선승제)가 신설됐다. 월드 챔피언 등극을 위해 포스트 시즌에서 필요한 승수는 4승에서 8승으로 늘어났고, 이에 따른 투수들의 부담은 크게 늘어났다.
1994년부터는 각 리그의 중부지구가 생겼다. 6개의 지구 시스템이 되었고, 8강 토너먼트로 치러지는 디비전 시리즈(5전 3선승제)를 위해 각 지구 2위를 차지한 팀들 중 가장 승률이 높은 팀에게 와일드 카드 혜택을 부여했다. 와일드 카드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팀은 리그 승률 1위 팀과 디비전 시리즈를 치르게 됐으며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홈 어드밴티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94년에는 선수 노조 총파업으로 인해 포스트 시즌이 열리지 않았고, 1995년부터 디비전 시리즈가 도입됐다. 8강 체제의 포스트 시즌이 시작되고 나서 월드 챔피언까지 필요한 승수는 8승에서 11승으로 늘어났다.
이후 와일드 카드 팀들의 강세(1997 플로리다 말린스, 2002 애너하임 에인절스, 2004 보스턴 레드삭스, 201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이어지자 리그 1위 팀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에 와일드 카드 팀과 지구 우승 팀들 사이에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2012년 와일드 카드 결정전이 신설됐다.
각 리그 와일드 카드 레이스에서 1위 팀에게만 주어졌던 포스트 시즌 티켓은 2위 팀에게도 주어졌다. 이들은 와일드 카드 1위 팀의 홈 경기장에서 단판 승부를 치른 뒤 디비전 시리즈에서 리그 1위 팀을 상대하게 되면서 포스트 시즌에서 1경기를 더 치르게 됐다. 와일드 카드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경우 월드 챔피언까지는 12승이 필요하게 됐다.
이 때문에 단판 승부로 열리는 와일드 카드 결정전을 제외하면 포스트 시즌에서 특정 에이스에게만 의존할 수 없게 됐다. 4명의 선발투수, 최소 3명의 선발투수가 등판 간격에 맞춰 경기를 이끌어야 안정적인 선수단 운영을 할 수 있는 미니 시즌이 된 셈이다.
포스트 시즌에서 선발투수 당겨쓰기, 커쇼는 4년 연속 앞당겨 등판디비전 시리즈는 2경기 + 이동 + 2경기 + 이동 + 1경기로 이뤄져 있으며,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는 2경기 + 이동 + 3경기 + 이동 + 2경기로 이뤄져 있다. 이에 따라 4명의 선발투수로 로테이션을 구성하면 정규 시즌에서 진행했던 4~5일 휴식 간격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이러한 4인 로테이션을 활용하지 않고 변칙적으로 투수진을 운영하는 팀들이 더러는 존재했다. 이들 중 월드 챔피언 등극까지 성공한 경우는 200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김병현이 이틀 연속으로 끝내기 홈런을 맞았던 그 시리즈)와 2009년 뉴욕 양키스, 2011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그리고 2014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였다.
2001년 디백스는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 원투 펀치를 제외하면 믿음직한 선발투수가 딱히 없었다. 이로 인해 실링이 월드 시리즈 1,4,7차전에 각각 3일 휴식 후 선발로 등판했고, 존슨은 2차전과 6차전에 선발로 등판한 뒤 7차전 구원 등판을 강행했다. 두 선수는 이러한 활약으로 월드 시리즈 역사상 유일한 공동 MVP를 수상했다.
2008년 마이크 무시나가 은퇴하면서 베테랑 선발투수가 1명 줄어들었던 양키스는 CC 사바시아(좌)와 A. J. 버넷(우) 그리고 앤디 페티트(좌) 3명으로만 포스트 시즌을 운영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월드 시리즈가 6차전에서 끝난 덕분에 1차전과 4차전에 등판했던 투수가 또 7차전에 무리해서 등판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았다.
2011년 카디널스는 디비전 시리즈와 월드 시리즈에서 풀 게임 접전을 치렀다. 월드 시리즈 5차전까지만 해도 카디널스는 선발투수들이 정상적인 등판 간격을 유지했다. 그런데 이틀 뒤 열릴 예정이었던 6차전이 비로 인하여 하루 밀리게 됐다. 이로 인해 5차전에 선발로 등판했던 에이스 크리스 카펜터는 3일 휴식 후 7차전에 한 번 더 선발로 등판하게 됐다.
생애 처음으로 3일 휴식 후 선발 등판을 하루 앞당겼던 카펜터는 7차전 승리투수가 되면서 카디널스의 월드 챔피언 등극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인하여 카펜터는 2012년 부상에 시달리다가 정규 시즌 막판 2경기 및 포스트 시즌 3경기 등판에 그쳤다. 2012년에 등판했던 5경기가 카펜터의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었다.
2014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에이스 매디슨 범가너는 와일드 카드 결정전부터 시작하여 도합 6경기에 선발로 등판했고, 그 중 완봉승 2회(와일드 카드 결정전, 월드 시리즈 5차전)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힘들었을텐데, 범가너는 이틀만 쉬고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5이닝 세이브까지 올리며 각 라운드 MVP를 독식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는 아예 하루 앞당긴 선발 등판이 연례 행사였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번의 디비전 시리즈에서 모두 1차전 등판 뒤 3일만 쉬고 4차전에서 다시 선발로 등판했다(2016년은 4차전 선발 후 1일 쉰 뒤 5차전 세이브 추가). 2014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3경기에서 팀은 승리했지만, 이 후유증으로 커쇼는 챔피언십 시리즈 등판 성적이 영 좋지 않았다.
올해 PS 앞당겨 등판한 선발투수 벌써 4명, 3명은 작전 실패그런데 올해 포스트 시즌에서는 벌써 4명의 선발투수가 예정보다 일정을 앞당겨 선발로 등판하는 강행군을 치르고 있다. 트레버 바우어(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디비전 시리즈 1차전과 4차전에 3일 휴식을 취한 뒤 선발로 등판했으며, 크리스 세일(보스턴 레드삭스)과 저스틴 벌랜더(휴스턴 애스트로스)는 1차전에 선발로 등판한 뒤 4차전에서 구원 등판했다.
로비 레이(애리조나 디백스)의 경우 원래 디비전 시리즈 1차전 선발 등판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와일드 카드 결정전 선발투수였던 잭 그레인키가 3.2이닝 만에 조기 강판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이틀을 앞당겨 구원 등판하게 됐다. 디백스는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타이후안 워커가 등판했고, 레이는 2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했으며 그레인키는 예정대로 3차전에 선발로 등판했다.
이들 중 앞당겨 등판하는 작전에 성공한 투수는 벌랜더 뿐이었다. 1차전 선발 등판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던 바우어는 4차전에서 1차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4차전에서 시리즈를 끝내려 했던 인디언스는 오히려 4차전을 패했고, 시리즈를 5차전까지 끌고 가게 됐다. 2차전에 등판했던 에이스 코리 클루버가 4일 휴식을 취한 뒤 5차전에 등판할 수 있지만 이후 챔피언십 시리즈 선발 로테이션이 꼬이게 됐다.
세일과 벌랜더는 나란히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맞대결을 했고, 당시에는 벌랜더가 판정승을 거뒀다. 그리고 4차전에서 두 선수는 나란히 앞당겨 구원 등판했다. 레드삭스는 지면 끝장이었고, 인디언스는 4차전에서 시리즈를 끝내고 싶었다. 세일은 4회초부터 등판했으며, 벌랜더는 5회말 1사부터 등판했으며 두 선수 모두 7회까지는 나름 호투를 펼쳤다.
그러나 세일이 8회초에만 2점을 실점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미 구원 등판으로 4이닝을 던진 상황에서 존 패럴 감독은 세일을 8회에도 올리는 무리수를 던졌는데,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승리투수가 된 벌랜더도 7회까지 호투하고 내려가긴 했지만, 5회말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등판하자마자 홈런을 맞고 시작하는 등 썩 좋지만은 않았다.
사실 시리즈 전적에서 앞서가고 있는 인디언스나 애스트로스가 바우어와 벌랜더를 3일 휴식 후 쓸 수 있었던 배경이 있었다. 2차전에 등판했던 각 팀의 에이스 클루버와 댈러스 카이클이 각각 정상 휴식 후 5차전에 나올 수 있었던 여유 때문이었다. 벼랑 끝에 몰렸던 레드삭스는 지면 끝장이었고, 롱 릴리프 데이비드 프라이스를 2차전과 3차전에 써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일을 쓸 수밖에 없었다.
디백스의 경우 레이를 앞당겨 쓰는 바람에 디비전 시리즈 전체 투수진 운영이 꼬이고 말았다. 당장 와일드 카드 결정전은 투수 6명을 쏟아 부어 어떻게 이기긴 했지만, 선발투수를 2명이나 투입(그레인키, 레이)하는 바람에 당초 계획했던 선발투수 활용이 불가능했다. 결국 디백스는 디비전 시리즈에서 다저스와의 선발 맞대결에서 3경기 모두 밀리고 말았다.
정작 2013년부터 매년 앞당겨 선발 등판을 자청했던 다저스의 에이스 커쇼는 이번 디비전 시리즈에서 1차전 1경기만 등판하고 시리즈를 끝냈다. 팀이 스윕으로 시리즈를 3차전만에 끝내 버렸기 때문에 커쇼가 4차전에 등판할 경우의 수 자체가 없어졌다. 만일 다저스의 시리즈도 4차전까지 갔다고 가정한다면 커쇼가 또 등판을 강행했을지 알 수 없다.
선발투수들을 앞당겨 쓰는 작전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감독의 몫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감독의 몫이다. 시리즈 최종전이나 일리미네이션 게임(지면 끝장인 경기)이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들이 나올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경기에서까지 선발투수를 당겨쓰는 것은 큰 모험이 될 수 있다.
마침 10월 11일(한국 시각)에 열릴 예정이었던 워싱턴 내셔널스와 시카고 컵스의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 4차전이 시카고 현지에 내린 비로 인하여 하루 미뤄졌다. 이 때문에 1차전에 등판했던 내셔널스의 에이스 스티븐 스트라스버그가 4일 휴식 후 정상 루틴으로 4차전에 등판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내셔널스의 더스티 베이커 감독은 스트라스버그를 무리해서 당겨쓰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스트라스버그는 2010년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토미 존 서저리) 이력이 있기 때문에 무리해서 당겨썼다가 젊은 선수의 커리어 자체에 큰 낭패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올해 PS에서 트렌드가 된 선발투수 당겨쓰기이지만, 트렌드를 따르지 않은 베이커 감독의 결정이 시리즈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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