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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구매하기] '백발의 거리 투사' 백기완 선생님과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 공동 저자로 나서서 <두 어른>이란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책 수익금은 비정규노동자들이 '꿀잠'을 잘 수 있는 쉼터를 만드는 데 보탭니다. 사전 구매하실 분은 기사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편집자말]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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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 지 열흘 만에 10만 부 돌파했다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의 인기 비결을 물었다. 굴욕이었다. '우리나라 3대 구라'라는 명성을 잊고 예의상 던진 것인데... 인터뷰 제한시간 30분이 후딱 지나갔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과 문정현 신부, 두 어른에 대한 질문 20여 개를 준비했지만, 던질 새가 없었다.

그는 "이제 됐지요?"라고 말하면서 "밥이나 먹자"고 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그는 "질문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기자를 달래듯이 이렇게 말했다.

"흔히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라고, 고수에 따라 창은 달라져."

좋은 고수가 북과 추임새로 흥을 돋우어야 명창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고수처럼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지만, 그가 1인 2역이었다. 북치고 추임새를 넣으면서 판소리까지 했다. 몇 번이고 말을 가로채려 했지만 포기한 이유가 있었다. 재미있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백기완 선생' 편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의 답변도 이야기에 녹였다.

기자가 준비한 질문은 백기완 소장과의 개인적인 인연과 사건‧사고 속의 인물 평가였다. 그는 문화유산답사기를 쓰듯 우리 역사의 줄기와 흐름 속에서 맥을 짚었다. 거란족 침입에서부터 촛불 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통사 속에서 인물을 조명했다. 그는 현대사의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두 어른'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다웠다. 

지난 13일 명지대학교에서 만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70). 그는 본격적인 인터뷰로 들어가기 전에 우스개부터 했다.

"백기완 선생님과 문정현 신부님이 만드는 <두 어른>(오마이북 출간 예정), 이 책 안 사면 민족반역자로 몰자고. 하-하-하-."

그는 인터뷰를 마친 뒤 "이제 강의실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라면서도 <두 어른> 책 홍보 영상까지 찍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열흘 만에 10만 부 돌파, 인기 비결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교수실에는 3만 권의 책이 커다란 책장에 빼곡하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교수실에는 3만 권의 책이 커다란 책장에 빼곡하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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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 '5번'이라고 찍힌 건물 4층 문화유산자료실에서 그를 만났다. 대학교수 연구실치고는 꽤 컸다. 커다란 책장에 빼곡한 책을 구경하며 넓은 사무실을 두리번거리자 한마디 했다. 

"책 많죠? 대한민국 대학교에서 가장 큰 교수실이죠. 대부분 7.5평인데, 여긴 18평입니다. 다른 방에 자료실이 있는데 장서는 3만 권. 하-하-하-."    

- 백기완 선생님 이야기에 앞서 최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이 출간 열흘 만에 10만 부를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그 비결은 무엇이지요? 수익금을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에 기부하는 <두 어른> 책도 많이 팔려야 해서요.

"25년 동안 내 자세를 잃지 않고 쌓아온 축적이 있어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개인적인 저술인데 독자와 함께 만들었어요. 어떤 식으로든 아름답고 멋있게 종결하려고 합니다. 강고한 시절을 살면서 뿌리를 잃지 않으려는 민족정신의 징표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국토의 절반 정도를 썼는데 내가 꼭 쓰고 싶은 것은 우리 섬입니다. 울릉도와 독도로 마무리하고 싶어요."

그는 화두를 민주화운동과 촛불 혁명으로 옮겼다. 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여기부터 민주화운동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어른에 대한 프롤로그였다.   

[촛불혁명] 6월 항쟁과 붉은 악마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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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군사독재 시절 데모하고 사는 동안에 나라가 커지고 한류도 흘러가고 있죠. 이게 민주화운동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민주화운동 속에서 키워온 역량이 다른 한편에서 나타난 거라고 생각해요.

지난 31일에 한국과 이란 축구경기를 보러 갔어요. 맨날 바쁘다면서 왜 거기에 갔느냐는 말도 들었어요. 그러나 사실 저는 축구를 보러간 게 아니라 응원하는 젊은이들을 보러 갔죠. 그걸 느끼고 싶었어요. 지난겨울 촛불 혁명은 6월 항쟁과 붉은악마가 합쳐진 겁니다.

인류 역사상에는 없는 이 환상적인 무혈혁명은 이런 민중의 역량 속에서 가능했지요. 87년 6월 항쟁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를 죽여가면서 한 겁니다. 붉은악마의 응원은 우리 민족혼이 불러낸 거죠. 후세에 촛불 혁명을 가르칠 때에는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한반도의 사건사고사로 가르치고 있어요. 세계사 속에서, 강대국 간섭을 받으면서 한반도가 어떻게 자기 운명을 결정해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유 교수는 다른 민족에는 없는 '이것'을 강조하려고 오래된 역사 속으로 이야기를 몰았다.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린 패배자인가 승리자인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다른 민족에는 없는 '이것'을 강조하려고 오랫동안 역사이야기를 꺼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다른 민족에는 없는 '이것'을 강조하려고 오랫동안 역사이야기를 꺼냈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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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거란족이 쳐들어왔을 때 서희 장군과 강감찬 장군이 물리쳤다고 기록하는 건 사건사고사입니다. 이 전쟁에서 실패한 뒤 거란은 망했습니다. 청나라는 왜 조선에 쳐들어와서 인조를 항복시키고 인질만 데리고 돌아가? 그 때 청나라는 조선을 무장 해제시키고 식민 지배를 할 수 있었는데 그냥 돌아가지 않았나요? 몽골족은 자기가 지배한 나라는 칭기즈 칸이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충렬왕, 충선왕 등 고려왕조를 이어갔지요. 27년 피눈물 나는 백성들의 항쟁으로 이뤄낸 결실이죠. 원나라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싸워 이길 수는 있어도 지배할 수는 없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힘이 우리의 역사적 저력입니다.

사건사고사로 보면 우린 패배자이지만 세계사 전체로 보면 인류 역사상 없었던 깡패나라조차 우리 운명을 통치하는 권한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우린 한자 문명권으로 들어온 이래로 중국 신세를 많이 졌죠. 라이샤워가 쓴 <동양문화사>를 보면 '유교를 만든 건 중국이지만 이상적 유교 국가를 건설한 것은 조선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반성할 것도 있습니다. 19세기 올 때까지 우리는 중국 문명의 신세를 졌기에 새로운 문명과 기술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죠. 중국이 새로 무엇을 만들면 그것을 벤치마크해 우리 것으로 만들면서 문명에 낙오되지 않았어요. 2등의 행복이랄까. 중국이 청자를 만들자 이를 본받아 고려청자를 만들었죠. 그리고 이것을 더 개발해서 상감청자를 만들었어요. 그런 변형과 활용엔 천재적인 기량이 있었어요. 핸드폰, 텔레비전을 누가 발명했건 그것을 질 좋고 값싸게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잖아요. 

하지만 우리 민족은 창조하는 자, 1등의 저력을 갖추지 못했죠. 고유기술이 없다는 거죠. 노벨과학상 받은 사람도 없어요. 일등은 기술만 갖고는 안 됩니다. 핸드폰을 만들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 소비자가 좋아할까를 다루는 것은 제어계측 전자공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류학, 심리학, 민속학 등 인문학의 문제죠."

약속된 인터뷰 시간이 거의 지나가는 것에 대한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 그런데 이제는 <두 어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제가 질문을... 

이 말을 듣고도 그는 여전히 역사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방향을 잡았다.

[재야] '하느님 빽'도 없던 백기완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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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는 항상 강자가 있었죠. 강자는 약자를 침략해서 잡아먹었어요. 그런데 강자로 누리던 동아시아의 흉노족, 탁발씨, 거란족 등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지요. 그런데 조선족은 지금까지 살아남았어요. 박정희가 유신 헌법을 들고 나왔을 때 세계 지성들은 '이제 한국은 끝났다'고 했어요. 대들다가 걸리면 5년 이상 사형에 처한다고 했죠. 그런데도 이에 굴하지 않고 데모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이때 우리에게 힘이 됐던 건 '재야'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재야라는 개념이 없어요. 조선 시대에도 재야 개념이 있었죠. 그땐 '산림(山林)'이라고 했어요. 높은 지성들이 출세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키웠던, 우암 송시열이나 남명 조식 선생 같은.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공부하는 어른이 존재하는 그런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뿌리가 박정희 시대를 경과하면서 재야가 되었습니다.  

60년대에는 함석헌, 장준하 선생이 재야였어요. 70년대 들어와서 백기완 선생이 합류했습니다. 1975년에 재야 단체라는 것은 사실상 백 선생님이 내건 '백범사상 연구소',  오늘날의 '통일문제연구소'밖에 없었어요. 백 선생님은 재야를 지키면서 재야를 세력화했습니다. 나중에 이 분이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은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재야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재야는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의 가치와 도덕, 민주의 가치를 지킨 정신 지도자입니다. 그 재야 인사 중에서 독보적인 인사가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계훈제입니다. 한편으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양심적인 신부와 목사가 있었죠. 박형규, 강원룡 목사와 유신헌법을 반대했던 법정 스님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양심적인 종교인과 학자들을 재야로 끌어낸 데에는 백기완 선생님의 혁혁한 공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계의 큰 행복이었죠. 지학순 주교와 박형규 목사가 보여준 모습은 대단했습니다. 그 뒤에 문익환, 문동환 목사가 있었고 문정현, 문규현, 함세웅 신부가 잇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종교인들은 '하느님 빽'이 있었어요. 그런 빽이 없었던 게 백기완 선생님이었습니다. 민족혼으로 밀고나간 거죠. 거기에 백 선생님은 재야 어른 중에서 확고한 위상이 있었습니다. 엄혹했던 시절 그분이 없는 집회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경험을 분리해 생각하기 쉬운데 백 선생님은 한 몸에 담고 사셨습니다. 고맙고 존경스럽죠."

[백기완은?] "나의 아버지 같은 존재"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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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교수가 말하는 백기완 선생님은 민중들의 '창과 방패'였다. 극악무도한 권력의 폭력 앞에 머뭇거리는 민중의 방패였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창이 되어 부정한 권력을 향해 날아갔다.

"백기완 선생과는 오래 됐지. 내가 대학생 시절이었으니까. 그때부터 백 선생님은 학생운동하는 젊은이들과 친하게 지냈죠. 저는 3학년 때 3선 개헌 반대를 했다고 무기정학을 당했어요. 74년에 백기완 선생이 긴급조치 1호로 들어가고, 나는 뒤이어 긴급조치 4호로 들어갔어요. 저보다 먼저 감옥에서 나온 백 선생님은 내 친구를 통해 상업학교를 나온 제 여동생을 백범사상연구소 직원으로 썼어요. 유지연이라고 해요. 백선생님 왈, 백범사상연구소에서 월급을 주는 첫 번째 정식 직원이었다고 했어요.

감옥에서 나온 뒤 나는 취직할 데도 없었고 형사는 그런 제 동향보고를 했습니다. 그때 자장면 한 그릇 사 준 사람은 백 선생님밖에 없었어요. 취직도 시켜줬죠. 금성출판사 편집장인 강민 시인이 백 선생님 친구였는데, '이놈이 6남매의 장남인데 감옥에서 나와서 먹고살아야 하니까 데리고 가라'고 했어요. 저에게는 가족 같고 아버지 같은 분이죠.

백기완 선생님 댁이 퇴계로 5가에 있을 때, 설날이면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어요. 어느 해인가, 밥상이 푸짐했어요. '내 친구가 갈비 한 짝 보내서 떡국에 고기를 넣었어'라고 말하면서 기분 좋게 웃던 모습이 선합니다. 리영희 선생님 집에도 세배꾼들이 들끓었는데, 문인들의 종점(저녁을 먹는 곳)은 리영희 선생 댁이었고, 주로 젊은 학생들의 종점은 백 선생님이었어요. 이게 재야의 풍경이자 인간미였습니다. 

선생님 댁에 세배 가기가 부끄러워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소신으로 미술평론을 밀고나갔지만, 험난한 시절에 한 사람이 귀했습니다. 함께하자는 손길을 어쩔 수 없이 뿌리쳤을 때 큰 빚을 진 것처럼 찾아뵙기도 죄송스러웠죠. 그럴 때 나를 감싸주시고, 다독여주셨습니다. 선생님 주변에는 사람들이 들끓었어요. 지금도 주변에 수많은 '딴따라'들이 있잖아요. 마음이 항상 젊어서 젊은 아이들과 잘 노십니다. 하-하-."

[일문일답] 백범이 그리는 나라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들고 있던 부채에 백범의 말을 적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들고 있던 부채에 백범의 말을 적었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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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현 신부님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없으신지요?
"중요한 현장에서 신부님을 뵈면 반가웠지만, 개인적 만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문화재청장으로 있을 때 문 신부님은 용산 미군기지 반환 운동을 하고 계셨어요. 어느 날 고궁 박물관 앞에서 문 신부님을 만났는데 제 두 손을 맞잡으면서 한 말씀 하시더라고요. '내가 최후의 빽으로 생각하는 건 당신'이라고 말입니다. 백기완 선생님과 문정현 신부님, 이 두 어른은 시대와 역사가 낳은 인물이죠."

- 혹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두 어른을 소개한다면 어떤 우리의 문화역사 속에 어떤 모습으로 그릴 수 있을까요?
"백 선생님은 민주화 과정의 큰 어른이었죠. 이 분이 없으면 집회가 안 됐습니다. 정신적으로 민주화를 추켜세웠고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백범 사상을 이어간 겁니다. 백범의 화신처럼 등장해서 강고한 세월을 관통하신 분이죠."

- 두 어른을 인간문화재로 치면 국보급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인간문화재로 삼는다면, 국보급이고 말고요. 화려한 문화유산이라기보다는 강진에서 다산 정약용에 대해 쓴다든지 제주에서 추사 김정희, 제천에 가서 의병운동을 소개하듯이, 우리 민주화운동의 맥락 속에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 허물어진 곳에서 길을 가다가 우연하게 마주친 두 분의 헌신적이고 용감한 실천. 그 험난한 이야기를 쓰겠지요."

- <두 어른> 대담집을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천배 만 배의 가치가 있죠. 사회과학적 분석과 자료에 의한 삶의 궤적은 얼마든지 찾아보는 게 가능하지만 이분들의 속마음에 내재된 정신과 정서, 그것을 인간의 이야기로 쓴 것은 나중에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당신들께서 직접 후배들에게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엄청 귀합니다."

- 어떻게 하면 <두 어른> 대담집을 독자들에게 많이 알릴 수 있을까요?
"광고는 한계가 있습니다. 책을 한 번 읽은 사람이 '너도 읽어 봐라'라고 입 선전을 해야 합니다. 책이 나오면 저부터 입 선전을 하겠습니다. 지금 사전예약 기간인데, 한 권이 아니라 열 권 이상을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읽히겠습니다."

- 보다 많은 분들이 책을 사서 볼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한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젊은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경직될 수 있고, 이념이 불꽃 튀는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두 어른 삶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사람에게 자극과 재미, 충격, 일깨움을 줄 겁니다. 내 답사기가 많이 팔리는 것은 문화유산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를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어른> 대담집은 생생한 인간의 이야기이기에 안 읽는 사람이 손해죠."

유 교수는 점심을 먹고 교정으로 들어와 학생들이 쉬거나 돌아다니는 시멘트 바닥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잠시 뒤 양복 안주머니에서 붓펜을 꺼내 가지고 다니던 부채에 글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화보국'이라고 한자로 크게 쓴 뒤에 '백범의 내가 그리는 나라'라고 부제를 붙인 뒤, 둥근 부챗살 끝에 작은 글씨로 백범의 말을 적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부강(富强)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먹고 살기 족하면 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외적의 침입을 막을 만하면 됩니다. 내가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문화(文化)의 힘입니다."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에 선물로 준 그 부채를 들고 유 교수와 헤어진 뒤 가제본된 <두 어른>의 책장을 펼쳤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를 만들자는 바랄(꿈)이다.
하지만 그 꿈은 제 손으로 일구질 않으면
그 꿈을 꾸던 놈이 죽는다는 아, 그 실천적 명제, 바랄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거야. 알가서.
이 뺑뺑이처럼 돈의 굴레만 뱅글뱅글 맴만 도는 것들아."
(백기완. <두 어른> 책 102쪽)

"더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더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는

저마다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
(문정현. <두 어른> 책 133쪽)

유홍준 교수가 입으로 풀어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두 어른> 편을 함께 들으신 독자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오늘 10월에 출간될 책 <두 어른>의 공동 저자는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이다. 이 책은 현대사의 질곡을 앞장서 헤쳐나온 두 어른의 육성이다. 여든다섯 살의 '거리의 백발 투사'와 여든 살의 '길 위의 신부'가 직접 자기 삶의 정수를 담았다.

*대담집 <두 어른>의 사전판매(1쇄) 전액은 꿀잠 기금에 보태 빚을 갚는 데 사용됩니다.

 <두 어른> 표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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