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는 7월 13일부터 10월 16일까지 100일 프로젝트로 '당신이 기다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되어주세요 600'(당기다 600)을 진행합니다. 인권활동과 다큐멘터리 제작을 이어가기 위해 안정적인 활동비를 확보하고 아픈 활동가와 지친 활동가에게 안정적인 쉼을 제공하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편집자말]
"욜, 나 암이래" 김일란 감독이 이 말을 하며 멋쩍게 웃었습니다. 덧불일 말이 없었을 겁니다.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연분홍치마가 어떤 과정을 거쳐 다큐멘터리를 만드는지 직간접적으로 봐왔던 나로서는 너무 자연스럽게 암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였는지 모릅니다. 큰 병원을 가야 한다는 말에 긴 시간 통화를 하지 못했지만, 긴 한숨으로 내 마음을 달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어제 김일란 감독을 만나고 왔습니다. 요즘 인권재단 사람이 인권활동가들의 삶을 조망하며 스토리펀딩 모금을 하고 있는데, 김일란 감독도 그중 한 명이라 취재 기자와 함께 인사를 하러 간 것입니다. 위암 판정 전에 기획이 되었던 거라 다시 제안해야 하나 걱정했었는데, 연분홍치마와 김일란 감독은 선뜻 응해주었습니다.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빠르게 회복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다행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가보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좀 덜해졌습니다. '이 사람이 아팠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일란 감독과 다른 연분홍치마 소속의 감독들은 여전히 밝고, 진지했고, 힘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위암투병 중이다 보니 요즘 김일란 감독이 <면역혁명>이라는 책을 읽나 봅니다. 면역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다가도 독립다큐멘터리 영화감독들의 촬영 이야기로 돌아가면 정말 '면역'을 지킬 수 없는 이들의 삶을 보게 됩니다.

또 최근에 간암으로 하늘나라로 떠난 박종필 감독과 얽힌 에피소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움 때문이었겠지요. 세월호와 관련된 촬영을 너무 좋아했다고 말하는 김일란의 증언은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세월호 관련 추모행사 시작 전까지 영상편집을 하다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영상파일을 전해줬다는 이야기, 누군가는 집회순서 하나로 스치듯 봤을 그 영상, 4~5분을 만들기 위해 밤새 씨름하고 있었을 이들을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의 안정적인 활동과 안정적인 사무실 운영구축를 위해, 더불어 아픈 활동가와 쉼이 필요한 활동가에게 안정적인 쉼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연분홍치마가 난생처음 후원주점을 엽니다.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의 안정적인 활동과 안정적인 사무실 운영구축를 위해, 더불어 아픈 활동가와 쉼이 필요한 활동가에게 안정적인 쉼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연분홍치마가 난생처음 후원주점을 엽니다. ⓒ 연분홍치마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후원주점 포스터가 보였습니다. 막 도착했나 봅니다. 아는 척을 하자 꼭 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포스터를 단체에 붙여달라고 손에 몇 장을 쥐여주었습니다. "뭐 도와줄 거 없어요?" 물으니 오기만 해달랍니다. "가서 서빙이라도 하겠다. 아무거나 시켜 달라"는 말로 응원을 하고, 후원주점에서 보자는 약속을 한 뒤 연분홍치마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취재기자님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맞아요, 이제 연분홍치마가 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연분홍치마는 늘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몇 개월 전 연분홍치마 김일란, 한영희 감독이 정기후원 모금이 절실하다며 인권재단 사람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한 명의 감독에게 120만 원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다섯 명의 감독들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 600만 원의 후원금이 필요하다는 것, 지금 생각해도 참 단순한 계산법입니다. 100만 원 조금 넘는 후원금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었고, 각자 알바 뛰면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촬영과 편집에 집중 못하는 현실을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 무엇보다 인권운동에 더 집중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연분홍치마의 절박함을 움직였을지 모릅니다.

한 달에 단체 운영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 계산하는 건 쉽지만, 모금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문제는 자신감이었습니다. 뉴스로 마주하기에도 힘든 이야기들을 카메라에 담는 건 잘 하면서 정작 자신들을 소개하는 데는 주저하는 모습이라니, 베테랑 감독들이 자신들의 장점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연분홍치마 활동 13년, 카메라에 담긴 스토리와 이들이 만난 사람들만 움직여도 연분홍치마 모금이 잘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속마음으로는 TV 광고를 하는 유니세프도 아니고 짧은 기간 몇 백 명의 정기후원자를 모은다는 건 쉽지 않은데 '잘 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당기다 600은 현재 연분홍치마가 정기후원 배가 운동 프로젝트 이름입니다. '당신이 기다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되어주세요'의 줄임말. 월 600만 원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지금도 모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 이름을 보고 내가 연분홍치마가 만들어줬으면 하는 다큐멘터리는 무엇이지 생각했습니다. 사실 제가 연분홍치마에 바라는 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인권운동의 동료로서 옆에 있길 바랍니다. 투쟁하는 현장을 함께 지키고, 아픔과 환희의 현장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 모두들 아시겠지만 연분홍치마는 다큐멘터리만이 아니라 투쟁현장에서도 늘 함께였습니다. 기자회견 사진에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은 늘 그 자리를 함께 지키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카메라를 들고 참가자들의 발언, 표정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혹 기자회견을 기획했는데 기자가 안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연분홍치마 감독들의 카메라가 있었기에 든든했고, 무안함을 감추기에도 좋았습니다.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 ⓒ 연분홍치마


작년 12월 1일 세계에이즈의 날을 앞두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거리 인권 캠페인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HIV 감염인분들도 계셨고, 지지자도 함께했던 날. 연분홍치마 감독들에게 캠페인 풍경을 영상에 남겼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습니다.

바쁜 가운데서 자리를 함께 해주었고, 참여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6분 남짓한 감동을 주는 영상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며칠 후 HIV 감염인들과 이 영상을 함께 봤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밝혀질까 두려워 캠페인에는 나오지 못했지만, 영상을 통해 감염인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직접 확인하고 기뻐했습니다. 단순히 편집기술이 좋아 만족했다기보다 연분홍치마가 만든 영상에는 그 사람에 대한 연대의 마음, 따뜻함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감염인들에게도 그것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스러운 연분홍치마가 오는 28일 후원주점을 엽니다. 이날 술 한 잔 기울이며 연분홍치마의 안부를 묻고 인권운동에 꼭 필요한 영상활동가들을 응원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HIV 감염인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겠습니다. <종로의 기적> 관객들도 나이 들어가고 있겠죠? ^^ 우리 술 한잔하며 옛이야기 해볼까요?

인권재단 사람 정욜 활동가 인권재단 사람 정욜 활동가

▲ 인권재단 사람 정욜 활동가 인권재단 사람 정욜 활동가 ⓒ 정욜


<난생처음 사랑스러운 연분홍치마 후원주점>
일시: 2017년 9월 28일(목) 오후 5-12시
장소: 하이델베르크하우스 신촌(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3-3, 지하1층)
문의: 02-337-6541 / ypinks@gmail.com

후원공식계좌: 우리은행 1006-701-255845 연분홍치마
함께 하는 사람들: <연분홍치마의 친구들> "진분홍치마"
사랑스러운 포스터 디자인: 이진아 작가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정욜은 인권재단 사람의 활동가로,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운동, HIV감염인 인권운동을 가장 앞장서서 활동하고 있으며, 연분홍치마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연분홍치마가 제작한 영화 <종로의 기적>(2010)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처음 성소수자인권운동의 현장에서 만나, 다큐멘터리 영화 속 주인공으로, 다시 성소수자인권운동의 현장으로 이어진 정욜님과의 인연 덕분에 연분홍치마가 걸어가는 인권운동의 길이 외롭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연분홍치마와 정욜 활동가의 힘찬 걸음이 계속 될 수 있도록 응원해주세요.
연분홍치마 난생처음사랑스러운후원주점 인권재단사람 정욜 정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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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연대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합니다. 마마상, 3XFTM,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종로의 기적, 두 개의 문, 노라노, 공동정범, 안녕히어로, 플레이온, 무브@8PM, 너에게 가는 길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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