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축구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덕분에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 다각도의 분석이 가능해져 이전보다 다양한 '숫자'가 팬들에게 데이터로서 제공된다. 데이터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코어, 득점의 수 등 몇몇 숫자만이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보통 경기장 내에서 일어나는 플레이에 대한 숫자(득점, 슈팅 수 등)가 의미를 가지는 와중에 유독 플레이와 아무 연관이 없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숫자가 있다. 바로 선수들 등에 적힌 숫자. 즉 '등번호'다. 등번호는 그 선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동시에 많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 단순히 선수 구분의 편의성을 위해 탄생한 등번호는 세월이 흐르자 단순한 번호가 아닌 의미와 가치를 더해진 '특별한 숫자'로 변모했다. 물론 모든 등번호가 가치 있는 '위대한 등번호'가 될 수는 없다. 세계 축구사에서 소수만 인정받은 '위대한 등번호'의 계보를 살펴보자. - 기자 말

축구팬들은 흔히 유벤투스를 '이탈리아 축구의 혼'이라 칭한다. 유벤투스가 이탈리아 축구에서 가지는 위상이 잘 드러나는 표현이다. 유벤투스는 33번의 리그 우승 기록을 가졌고, 수많은 이탈리아 축구의 영웅들을 배출했다. 과거의 영광에 국한되지 않고 최근에는 전무후무한 리그 6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쌓으며 여전히 승승장구 중이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세리아A를 유벤투스의 리그로만 기억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유벤투스는 항상 왕좌를 위협받았다. 유벤투스를 항상 지근거리에서 추격했던 존재는 '밀란 형제'였다. 밀라노에서 같은 구장을 쓰는 '한 지붕 두 식구'의 주인공 AC 밀란과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줄여서 인터밀란)는 2000년대 후반에는 유벤투스를 제치고 세리아A를 양분하기도 했다. 밀라노의 두 거인은 항상 유벤투스를 견제하며 존재감을 과시했고, 2006년 유벤투스가 세리아B로 강등되는 이탈리아 축구의 위기 속에서 밀란 형제는 굳건히 전력을 유지하며 유럽을 제패하기도 했다.

지역 라이벌인 두 팀은 공교롭게도 똑같이 등번호 '3번'의 영웅을 추억하고 있다. 포지션도 왼쪽 측면 수비수로서 동일하다. 수비수가 클럽 최고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이탈리아스럽다. 밀란 형제 각각의 영구 결번이 된 '3번 수비수'에 대해 알아보자.

'카테나치오'의 변속 기어 - 지아친토 파케티

   아주리 군단의 캡틴으로도 유명했던 인터 밀란의 파케티

아주리 군단의 캡틴으로도 유명했던 인터 밀란의 파케티 ⓒ 위키미디어


유럽이 한창 전쟁의 화마 속에 신음하던 1942년 여름 세계 축구의 역사적인 인물이 태어났다. 훗날 인터 밀란 최초의 영구 결번의 영광을 누리는 지아친토 파케티가 그 주인공이다. 유년 시절부터 또래에 비해 뛰어났던 신체 조건을 지녔던 파케티는 공격수로서 축구를 시작했다. 1960년 인터 밀란 성인 팀에 합류한 파케티는 자신의 축구 경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감독을 만났다.

1960년 FC 바르셀로나에서 인터 밀란으로 넘어온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은 파케티의 신체적인 능력과 수비력에 주목했다. 에레라는 파케티의 수비 능력을 감안해 전통적인 공격수가 아닌 공격인 가능한 수비수로서 그를 변화시켰다. 파케티는 데뷔 시즌과 그 다음 시즌까지는 중용받지 못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격적이었던 인터 밀란의 스타일에서 '애매한' 역할의 파케티의 자리를 없었다.

하지만 부임 후 두 시즌 간 무관에 그친 에레라 감독은 타이틀을 가져올 필요가 있었다. 에레라 감독의 우승 프로젝트의 테마는 공격이 아닌 수비였다. 인터 밀란의 수비 축구가 성공하기 전까지 세계 축구의 흐름은 언제나 공격이었다. 에레라는 그 흐름의 반하는 '리베로' 시스템을 도입해 혁명을 일으켰다.

AC 밀란에서 가능성을 보였던 리베로 시스템은 인터 밀란에서 꽃을 폈다. 3백 아래에 또 한 명의 수비수인 리베로를 배치한 인터 밀란의 수비는 '카테나치오(빗장)' 그 자체였다. 인터 밀란은 리베로인 아르만도 피치를 중심으로 한 수비가 경기의 바탕이 되었고, 공격수 산드로 마촐라가 역습 상황에서 공격을 마무리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수비적인 팀은 수비와 공격에 간격이 멀다. 수비진과 공격진 사이에 발생하는 거리를 메워줄 선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선수가 왼쪽 측면에 위치했던 파케티였다. 파케티는 3백의 일원답게 기본적으로 수비에 가담했지만, 공격 상황에서는 과감하게 왼쪽 측면을 질주했다. 동료들이 후방에서 탈취한 공을 전방까지 운반했다. 파케티는 인터 밀란에서 629경기를 뛰는 동안 75골을 터뜨렸다. 주 임무는 공을 공격수 혹은 미드필더에게 전달하는 것이였지만 상황이 주어지면 호쾌한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저돌적인 전진과 파워 넘치는 슈팅이 파케티의 무기였다.

강력한 수비에 마촐라라는 '판타지스타'를 보유했고 공수의 확실한 연결 고리인 파케티까지 함께 뛴 인터 밀란에게 우승은 더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62-1963 시즌 리그 우승으로 9년 만에 이탈리아 챔피언으로 복귀한 인터 밀란은 1963-1964 시즌 구단 최초로 유로피언컵(UEFA 챔피언스리그 전신)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까지 침몰시킨 총 9경기 동안 인터 밀란은 5골만 실점하는 짠물 수비를 보여줬다. 파케티는 전 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우승에 일조했다.

이듬해 인터 밀란은 유로피언컵 결승전에서 에우제비오가 이끄는 벤피카를 누르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효율적인 축구로 유럽을 2년 연속 제패한 인터 밀란에게는 'Grande(최고)'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그렇게 'La Grande Inter(위대한 인터 밀란)'이 탄생했다. 파케티는 1965년 발롱도르 2위를 수상하며 공로를 인정받았다.

빗장수비의 변속 기어 역할을 톡톡히 한 파케티는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도 승승장구했다. 1963년부터 아주리 군단의 일원이 된 파케티는 주장으로서 UEFA 유로 1968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탈리아 최초의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우승으로 남아있다. 파케티는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주장직을 역임하며 준우승이란 업적을 만들었다.

파케티의 존재는 현대 축구에서 파트리스 에브라, 마르셀로 등으로 대표되는 공격형 풀백의 시초로서 의미가 깊다. 파케티와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가 당대에 이미 활약했기에 엄밀히 말하면 시초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뛰어난 공격력과 수비력을 동시에 갖춘 선수는 없었다. 파케티를 유렵형 풀백의 선두 주자로 꼽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인터 밀란의 성공 이후 많은 약소팀들이 그들의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대게 약체의 카테나치오는 본인들의 객관적인 전력의 약세를 감추기 위한 수비적인 축구로 구현됐다. 종종 단단한 수비수와 뛰어난 공격수가 인터 밀란의 플레이를 비슷하게 흉내냈지만 그들에게는 파케티가 없었다. 에레라 감독의 말처럼 카테나치오는 수비만 하는 전술이 아닌 '공격수와 같은' 파케티를 필요로 하는 '이기는 전술'이었다. 어찌보면 파케티는 카테나치오 전술의 핵이었다.

밀란의 심장 - 파울로 말디니

   말디니의 역사는 곧 AC 밀란의 역사다.

말디니의 역사는 곧 AC 밀란의 역사다. ⓒ 위키미디어


1977년 이탈리아 축구 아니 세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수비수로 꼽히는 프랑코 바레시가 AC 밀란에서 데뷔전을 가졌다. 만 17세의 나이에 세리아A 무대를 밟은 바레시는 다음 시즌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AC 밀란에게 수많은 영광을 안겨줬고, 그의 등번호 6번은 AC 밀란 최초의 영구결번이 되었다.

바레시라는 거물이 등장한 지 7년 후 또 하나의 별이 AC 밀란에서 떠올랐다. 그는 바레시보다 어린 만 16세의 나이로 AC 밀란에서 데뷔전을 가졌다. 1985-1986 시즌부터 AC 밀란의 주전 수비수로 자리잡은 이 소년은 AC 밀란에서만 이후 24년 간 뛰면서 AC 밀란을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만들었다. 그의 이름은 축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왼쪽 수비수로 추앙받는 파울로 말디니다.

파울로 말디니는 이탈리아 수비의 또 다른 전설인 체사레 말디니의 아들이다. 체사레의 인도로 유년 시절 파올로 말디니는 유벤투스에서 AC 밀란의 팬으로 전향했다. 이로 인해 AC 밀란의 첫 번째 황금기의 주축이었던 체사레의 업적은 정확히 30년 뒤 파올로의 데뷔로 대를 이어가게 됐다.

오른발 잡이였지만 소속팀에서는 왼쪽 풀백으로서 활약하게 된 아들 말디니는 꾸준한 왼발 연습으로 훌륭한 양발 잡이로 성장했다. 중앙 수비수로 활약해도 좋을 만큼의 수비력과 풀백으로서의 과감한 전진성을 동시에 지닌 말디니의 합류로 AC 밀란은 그 유명한 '철의 포백'을 구축하게 됐다. 말디니-코스타쿠르타-바레시-타소티로 구성된 포백 라인은 압박 축구의 창시자라 불리는 아리고 사키의 지휘 아래 상대방의 공격을 완벽하게 봉쇄했다. AC 밀란은 1988-1989 시즌 리그 총 34경기에서 단 14실점만 허용하는 악몽과 같은 수비를 이탈리아 팬들에게 선보였다. 말디니는 데뷔한지 5시즌 만에 전설의 포백 라인에 일원으로서 이름을 당당히 올렸다.

극악무도한 철의 포백과 아리고 사키의 압박 축구는 적을 질식시켰다. 작은 틈조차 보이지 않는 수비력이 팀의 기반이 되었고, 반 바스턴-루드 굴리트-프랑크 레이카르트 '오렌지 삼총사'로 구성된 공격진도 공존하는 AC 밀란은 완벽에 가까운 퍼포먼스 끝에 1988-1989 시즌 유러피언컵 챔피언에 등극했다. 우승 과정에서 AC 밀란의 수비진은 총 9경기에서 5실점만을 내줬다.

기존의 뛰어난 수비수 조합을 보유하고 있던 와중에 등장한 말디니는 AC 밀란 수비의 화룡점정이었다. 철의 포백의 단단함은 그대로 유지됐고 AC 밀란은 1989-1990 시즌 유로피언컵도 차지하면서 유로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다. AC 밀란은 9경기에서 3실점만 허용하면서 이전 우승 과정보다 더 치밀한 수비력을 상대에게 선사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AC 밀란 수비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한 말디니는 2009년 은퇴 시즌까지 모든 시즌에서 리그 10경기 이상을 소화하는 꾸준함을 보였다. 많은 실력파 수비수들이 AC 밀란을 거쳐갔지만 말디니의 아성을 넘볼 수는 없었다. 왼쪽 풀백으로서 경력을 시작한 말디니는 철의 포백이 해체되고 나이로 인해 순발력이 떨어지자 중앙 수비수로 자리를 옮겨 영향력을 이어갔다. 말디니는 AC 밀란에게 7번의 리그 우승과 5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선물했다. 특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무대만 8번이나 경험했다. 말디니가 '로쏘네리(AC 밀란의 애칭)' 유니폼을 입었던 기간 동안 AC 밀란은 이탈리아의 강자가 아닌 유럽 최강자로서 위상을 달리했다.   

왼쪽 풀백의 전설답게 월드컵 우승 한 번 정도는 경험했을 법 하지만 아쉽게도 1994 미국 월드컵 준우승 기록이 말디니의 최대 업적이다. 물론 말디니의 수비력은 항상 놀라웠다. 어린 나이에 참가한 유로 1988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이른 시절부터 완성된 수비력을 인정받았다. 1994년 월드컵에서는 조별 리그에서 부상당한 바레시를 대신해서 준결승까지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다. 유로 2000에서도 말디니는 수비의 핵으로 활약하며 준우승이란 성과를 거뒀다.

이탈리아가 24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2006 독일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말디니에게는 천추의 한이지만, 월드컵 우승이 없다고 해서 말디니가 세운 업적에 흠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만큼 말디니는 개인적인 능력과 팀 커리어를 모두 보유한 이탈리아 최고의 수비수였다.

파케티와 말디니라는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을 역사에 새겨놨던 밀란 형제는 지난 몇 년 간의 부진을 딛고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올 시즌 리그에서 인터 밀란은 파죽의 3연승으로 의외의(?) 전력을 과시하고 있고, AC 밀란은 최근 라치오에게 1-4 패배를 당하면서 기세가 한 풀 꺾였지만 이적생들이 팀에 잘 녹아 들고 있어 올 시즌 목표인 챔피언스리그 복귀에 대한 전망이 나쁘지 않다. 새로운 스타가 등장하지 않아 과거의 전술을 추억하는데 그치고 있는 밀란 형제가 올 시즌 반전을 일으킬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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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형제 3번 지아친토 파케티 파올로 말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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