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9월이 왔다. 여름이 떠나갈 듯 했지만 미련이 남은 듯 묘한 계절이다. 이 시기만큼 묘한 것이 또 있다. '축구 그리고 방송사 파업' 그 둘이다. 조금 오래 된 축구팬이라면 20년 전 9월의 함성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해 음력으로 이른 추석이 지나고 9월의 마지막 일요일 낮에 MBC TV 축구 생중계가 우리 축구팬들의 가슴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송재익 아나운서와 신문선 해설위원의 목소리로 녹음된 생생한 기억이다.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예선 맞수 일본과의 어웨이 경기였다.

1997년 9월 축구 생중계, 선명했던 MBC 로고

 지난 1997년 월드컵 축구 아시아예선 한국 대 일본의 경기.

지난 1997년 월드컵 축구 아시아예선 한국 대 일본의 경기. ⓒ 연합뉴스


차범근 감독이 이끌고 있던 당시 한국 남자축구대표팀은 67분에 홈 팀 일본의 미드필더 야마구치에게 어이없는 로빙 슛으로 먼저 골을 내주며 흔들렸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83분에 오른쪽 풀백 이기형(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선수의 오른쪽 크로스를 받은 골잡이 최용수 선수가 이마로 패스한 공을 서정원(현 수원 블루윙즈 감독) 선수가 기막히게 헤더 골을 터뜨려 1-1 점수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 '도쿄 대첩'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골이 3분 뒤에 터져나왔다. 이번에도 '이기형-최용수'를 거친 공이 이민성 선수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의 왼발 끝을 떠난 중거리슛은 일본 골키퍼 가와구치가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지만 멋지게 왼쪽 구석에 꽂혔다. 각본 없는 축구 드라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경기는 스포츠 생중계 역사의 획을 그었다고 할 정도로 놀라운 56.9%의 시청률을 찍었고 당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도쿄 대첩'이라는 신조어를 처음 만들어 자랑했다. 이 말은 지금도,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MBC의 공정성은 땅에 떨어졌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최근에 갑자기 MBC가 망가진 것이 아니라 꽤나 오래 된 일이다. 9월 4일부터 그들의 동지나 다름없는 KBS 노조원들과 함께 총파업을 시작했다. 한국 방송 역사상 가장 무거운 목소리와 슬픈 목소리가 방송국 앞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축구팬으로서 20년 전 송재익 아나운서가 생중계하던 화면 오른쪽 위 MBC 로고가 그립다.

당신들의 뜨거운 땀방울이 헛되지 않기를

여기 묘하게도 MBC, KBS 총파업과 한국 축구의 현실이 겹치고 말았다.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를 남겨놓고 있는 한국 남자축구대표팀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달 마지막 날 밤 MBC 본사가 있는 상암동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은 이란을 상대로 유효 슛조차 하나도 기록하지 못하는 졸전을 펼치며 0-0 점수판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후반전 초반 이란 미드필더 1명이 퇴장당했고 같은 시각에 중국이 우즈베키스탄을 1-0으로 이겨주었기 때문에 단 1골만으로도 러시아 월드컵 본선행 기쁨을 6만 명이 넘는 대관중들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축구대표팀이 지난 4일 오후(현지시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분요드코르 경기장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전을 하루 앞두고 훈련을 하고 있다.

축구대표팀이 지난 4일 오후(현지시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분요드코르 경기장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전을 하루 앞두고 훈련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직 1경기의 기회가 남았다. 5일 밤 0시 타슈켄트 부뇨드코르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우즈베키스탄과의 어웨이 경기에서 지지만 않는다면 이란에 이어 2위 자격으로 러시아월드컵 본선 티켓을 손에 쥘 수가 있다.

마음가짐으로는 양 방송사 노조원들이 마이크와 카메라를 내려놓고 총파업에 나선 입장과 크게 다를 것 없다. 완전히 주저앉아 망가지기 전에 남은 힘 모두 끌어모아 공정 방송을 사수하겠다는 간절한 목소리와 과거 아시아 축구를 주름잡았던 한국 축구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내뱉는 구호가 비슷하게 들린다.

그간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잘 모르겠다며 묻는다. 부패 권력에 휘둘린 방송의 곪은 속살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월드컵에 꼬박꼬박 참가하고 핵심 선수들이 축구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유럽 무대에 꾸준히 진출하여 활약하고 있으니 기대치는 점점 커져만 갔다. 경기력 자체만으로 이 정도로 놀림감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특히, 벼랑 끝에 몰린 신태용호는 MBC를 두고 '반면교사'라는 따끔한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팬들에게 신뢰를 잃은 방송이 어느 정도까지 망가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채널을 돌려버린 팬들에게 다시 믿음을 주기까지 뼈를 깎는 고통이 뒤따른다. 총파업을 승리로 이끌어내는 것부터 겸허하게 외양간을 뜯어내고 다시 짓는 일까지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특별한 국가대표 팀을 향한 팬들의 기대감 또한 공정 방송에 대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경우 월드컵 한 번 쯤 못 나가도 되겠지에서 그치는 축구장 분위기가 아니다. 유럽처럼 클럽 축구의 뿌리가 깊고 단단하게 뻗어있지 못한 한계가 곳곳에서 민낯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여러 해에 걸쳐 다듬으며 정착시키고자 하는 리그 시스템 자체가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일부 선수들이 그라운드 밖에서 정신없이 내뱉은 말들로 많은 팬들이 상처받았다. 국가대표, 월드컵 본선 진출, 주장 완장 등의 무게가 몹시 무거워서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여기서 우리 선수들이 선택할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라운드 안에서 경기력으로 자신들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방송 노동자들이 뛰어야 할 곳은 삶과 예술의 생생한 현장이다. 축구 선수들의 현장은 바로 그라운드다. 그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지난 달 31일 밤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MBC 노조원들이 "돌아와요 마봉춘!"을 새긴 옷을 입고 파업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했지만 경기 결과는 물론 분위기 면에서 다른 언론에 노출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봉춘과 고봉순 그리고 축구 국가대표팀을 향한 마지막 신뢰와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이번 파업과 축구가 동시에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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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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