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브이아이피>

영화 <브이아이피>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브이아이피>는 <신세계>와 <대호>를 연출하고 <부당거래>와 <악마를 보았다> 등의 시나리오를 썼던 박훈정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는 북한에서 연쇄살인을 일삼았던 고위 관료의 아들 김광일(이종석 분)이 탈북하여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다시 시작되는 그의 살인과 이를 추적하는 남한 형사 채이도(김명민 분), 북한 형사 리대범(박희순 분) 그리고 김광일을 남한으로 올 수 있게끔 도왔던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 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고위 관료의 사이코패스 아들, 그리고 그를 추적하는 국정원 직원, 열혈 형사와 그를 따르는 동료들. 인물 구성만 봐도 <브이아이피>가 최근 한국영화를 장악하다시피 한, 기존의 '비리 장르' 혹은 '사회 장르' 물의 영화들과 결이 다르지 않은 작품임이 한 눈에 읽힌다.

특히, 겉겹만 봐서는 <베테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이아이피>는 북한 고위 관료의 아들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점, 그리고 국정원과 CIA 가 공모해 그를 남한으로 옮겨온다는 점 등의 나름 새로운 설정들이 기존 영화들에 대한 권태로움을 잠시나마 유보하게 한다.

 영화 <브이아이피>

영화 <브이아이피> 속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또 하나의 특이점은 타란티노가 그의 작품들에서 그렇듯, '막'을 이용해 영화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에필로그를 포함 다섯 개의 '막 (幕)'으로 구성된다. 1은 현재 시점의 홍콩, 2는 과거 시점의 북한 등으로 전개 되어, 5. 에필로그에서 다시 1. 현재 시점의 홍콩으로 돌아와 끝을 맺는 형식이다. 이런 구조가 어떤 목적으로 선택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영화의 내러티브와 구조에 전혀 보탬을 주지 않는다. 매 막의 인서트에는 예상 가능한 키워드와 펼쳐질 이야기를 단순 요약한 단어/문장만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라, 결과적으로는 겉멋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사족이 되어버렸다.

물론 극영화 인만큼 형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영화가 선형적(linear) 구조를 따르지 않기에 시간의 프레임을 구조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 다만, 이 분리된 구조를 채우고 있는 메인 캐릭터들의 연기가 불안하고 조화롭지 않다. 따라서 형식의 분리(分離)가 영화 전체의 분열(分裂)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셈이다.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이라고 할 수 있는 배우들의 '뜨는' 연기톤은 시작부터 끝까지 안정을 찾지 못한다.

 영화 <브이아이피>

영화 <브이아이피>에서 채이도 형사를 연기하는 김명민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가령, 채이도 형사를 연기하는 김명민은 등장하는 첫 신부터 (병원 신을 제외한) 마지막 신 까지 입에서 담배를 떼지 않고 거의 모든 문장에 욕설을 섞는데, 문제는 이 (한국형) 누아르 형사물의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이 이미 너무 많이 사용된 캐릭터거니와 김명민이 가진 '자타가 공인하는' 진중한 목소리와 페르소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살인자를 향한 그의 분노는 서서히 증강하는 것이 아닌 영화 초반부터 정점에서 시작하는데 시종일관 동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소리를 지르는 그에겐 페이소스와 연민이 없다. 따라서 그가 살인자에게 (사적인) 복수를 다짐하는 것이 동료 형사의 자살 때문이라는 모티브는 설득력이 없다.

캐릭터 설정의 문제는 이 영화의 가장 중심 축에 놓인 연쇄살인범 김광일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는 잔인한 살인을 일삼는 악마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자신이 검거되는 순간 까지도 영어로 된 원문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고상한' 인물이다. 영화의 중심 사건이 살인범을 바탕으로 시작되는 만큼 살인범의 캐릭터 구축은 좀 더 공을 들였어야 하는 부분이다. 피칠갑에 흥분하는 살인마가 하이 클래스 수준의 음악과 책을 읽는 것은 주구장창 담배를 씹어대는 형사만큼이나 올드한 설정이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박사, <아메리칸 싸이코>의 월 스트리트 금융 전문가, <살인의 추억> 에서 박해일이 맡았던 '배운 청년' 용의자 등 연쇄 살인범, 특히 여성을 골라 죽이는 살인범들의 이미지는 대부분 지식인과 하이 클래스를 표방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지 않은가. 

 영화 <브이아이피>

영화 <브이아이피> 속 북한 연쇄살인범 김광일 역의 이종석.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아마도 현재 <브이아이피>를 둘러싼 가장 큰 논란인 초반 시퀀스의 살인 묘사는 결국 그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전반적으로 결핍이 더 많이 보이는 영화의 과잉이 폭력의 스펙터클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살인자가 여자의 목을 조를 때 힘줄이 툭툭 튀어나오는 (비교적 긴) 테이크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살인자의 POV, 시점 샷도, 살인자들이 피해자와 공존하는 풀샷도 아니며, 오로지 관객 시점 샷으로 찍힌 폭력의 스펙터클이다. 다시 말해 가해자와 개연성을 잇지 않는 동떨어진, 관객만을 위해 만들어진 포르노그래피적 묘사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기존의 수많은 영화들, 가령 <추적자> <악마를 보았다> 등의 영화에서도 이 정도 수위의 영화는 존재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한국에서 인기를 모았던 미드, CSI 시리즈에서 역시 여성의 시체는 즐비하게 나왔다. 이에 있어서는 일정 부분 동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전반적으로 톤이 불안정한 가운데 영화 초반의 강렬함을 영화의 나머지가 끌고 가지 못하기에 초반 살인 시퀀스의 '부도덕함'이 더 두드러지는 것이다. 차라리, 살인자 김광일의 죽음을 앞의 희생자 시퀀스와 정도(intensity)를 맞춰서 수미쌍관으로 맺음했다면, 영화의 톤 앤 매너에 있어서도, 영화의 논란이 되는 '강간 포르노적 묘사'의 이슈에 있어서도 다소 해소가 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영화 <브이아이피>

영화 <브이아이피>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많은 사람들이 오랜 동안 고민하고 협업해 나온 작품을 이렇게 헤집어 놓고 나니 마음이 좋지 않다. 매번 한국영화가 개봉될 때 마다 사실은 조금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지켜 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 '조금 더 많은 애정'이 더 큰 만족감을 주기도 하고 더 큰 실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번 케이스는 안타깝지만 후자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브이아이피>는 인물 구축에 실패한 영화다. 영화의 인물들은 도식적으로 설계 되었고, 그 도식 안에서 변주와 응용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단절된 에피소드 안에서 소멸해 버린다. 다수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강렬한 역할들로 자리매김 하여 비교적 명배우 반열에 서는 피터 스토메이어가 이 영화 안에서 별 활약 없이 겉도는 걸 봐도 이건 단순히 배우 연기력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같은 류의 영화들이 판을 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부류 안의 캐릭터들 역시 배우, 혹은 배우들의 조합만 바꿔가며 반복된다는 것이다. 내 영화평에서 늘 반복되는 말이지만 그래도 과함이 없다. 지금 한국영화에는 돈이 아니라, 고민이 필요하다.

브아이이피 한국영화 영화리뷰 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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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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