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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경우

1964년 4월 20일 가을 아침,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근교 리보니아(Rivonia) 법정. 아홉 명의 흑인 사나이들이 들어선다. 푸른 죄수복을 입고 면도를 깔끔하게 한, 덩치가 우람한 사나이 하나가 유독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45세의 만델라에 씌워진 혐의가 어머무시하다. 총파업(사보타주) 주동, 공산혁명 기도, 내란 음모…. 

특히 '빨갱이' 혐의는 극우 정권의 필살기이다. 피고가 살아 남으려면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필사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우리네 역사에서 그리 생소하지 않은 상황에 만델라가 처해 있는 것이다. 그가 피고인석에서 일어선다. 법정은 긴장감으로 터질 듯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My Lord…)."

그의 목소리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피고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주 침착하고 정중하면서도 단호했고 명료했다. 아무런 변명도 선처도 구하지 않는 만델라의 연설은 장장 세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것은 피고의 진술이라기 보다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논고이자 심판이었다.

175분쯤 흘렀을까? 만델라는 무슨 일인지 말을 멈춘다. 읽고 있던 원고 뭉치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고개를 들어 판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연설의 말미를 토해낸다.

"저는 한 평생 아프리카 민중을 위한 투쟁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저는 백인의 지배에 대항하여 싸웠고, 그리고 흑인의 지배에도 맞서 싸웠습니다. 저의 가슴 깊은 곳에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의 이상이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조화를 이루고 공평한 기회를 누리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내가 삶을 바치고자 했고 이루고자 했던 꿈은 그것입니다. 그 이상을 위해 이제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81페이지, 176분간에 걸친 최후 진술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법정 최후 진술. 아래 여백에 만델라의 친필이 보인다
 법정 최후 진술. 아래 여백에 만델라의 친필이 보인다
ⓒ Mandela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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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여백에 만델라의 친필이 보인다.

"나는 원고를 책상 위에 놓고 판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나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마지막 구절을 발언 하고 자리에 앉았다. 순간 침묵이 법정에 흘렀다. 몇 분이 지난 것 같았지만 사실은 30초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윽고 큰 탄식소리와 함께 깊은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그 날 종일 판사는 나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하였다." - 만델라

김대중의 경우

그로부터 16년 반 뒤 1980년 9월 13일 가을 아침, 유라시아의 동단 한반도에서도 육군본부 군사 재판정.

56세의 김대중에 대한 혐의는 만델라에게 씌워졌던 혐의 못지않게 흉험했다. '내란 음모, 내란 선동, 계엄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외국환 관리법 위반'. 군사 법정은 남아공의 법정보다 더욱 살벌하다. 재판은 김대중 제거를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함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변호인단의 최후 변론이 끝나자 가슴에 수인 번호를 단 김대중이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선다. 터질 듯한 침묵을 깨고 김대중이 입을 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의외로 차분한 톤의 진술이 거의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원고도 없었고 필기도구도 없었다. 그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김대중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김대중 내란 음모'의 거짓을 지적하고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이유와 그럴 능력이 우리 국민에게 있음을 강론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80년 신군부로부터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수로 복역하기도 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80년 신군부로부터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수로 복역하기도 했다.
ⓒ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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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는 분명히 전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유신 세력이 있는 반면, 민주주의 지향하는 다수의 민주세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를 해야 하고 이미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나에 대한 관대한 처분보다는 다른 피고들에 대한 관용을 바랍니다. 결국 이분들에 대한 혐의의 책임자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방청석의 억눌린 흐느낌 속에서 김대중은 유언과 같은 진술을 마무리한다.

"내가 처형당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는 일입니다. 나는 여기 이 기회를 빌려 공동 피고인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피고인들과 방청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와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고 "김대중 만세"를 외치며 끌려나갔다. 한완상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 공동 피고인 24명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아마도 디제이(DJ·김대중) 최후진술 때가 아닐까 한다. 끓어오르는 의분심을 가눌 길 없어 평생 처음으로 창자로 <애국가>를 불렀다. 디제이는 1시간 40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당당히 자기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의 침착함에 나는 놀랐다. 사형 구형을 받았던 피고인이 그토록 태연하고 침착하게 자기 심경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우리는 비록 힘없이 묶여 있는 처지였으나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이미 승리하고 있었다." - <한겨레>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 - 7회 내란음모 재판(하) 중

최후 진술 이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만델라의 경우를 먼저 보자. 최후진술 중에 특히 마지막 부분은 당국의 엄한 검열과 단속에도 불구하고 전파를 타고 지구촌에 울려퍼졌다. 언론이 붙인 제목은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I Am Prepared to Die)였다. 피델 카스트로의 유명한 연설 "역사가 나를 해방시키리라"(History Will Absolve Me)를 연상케 한다. 이후 만델라 구명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64년 6월 9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 190호를 채택해 재판을 중지하고 만델라를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유엔 56개국의 대표가 공동으로 만델라 구명을 위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세계평화평의회(World Peace Council)도 구명 운동을 벌였고 유니버시티 오브 런던 유니온(University of London Union)은 모의 투표로  만델라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유엔 안보리가 결의문을 낸 지 사흘 뒤에 남아공 법정에서 만델라에게 무기징역이 언도됐다. 가까스로 사형을 면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김대중은 어떠했나. 김대중 제거 작전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최후진술을 한지 불과 사흘 뒤에 사형이 선고됐다. 사형수 김대중은 감방에서 간수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아, 이제 나를 형장으로 데려가려는 걸까' 생각하며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았을까.

그 즈음 예기치 않은 일들이 국내외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먼저 국내를 보면, 우리 언론의 맹활약이 가히 눈물 겨울 정도였다. 언론은 전두환 찬양에 매진했다. 한 신문은 재판이 진행되던 때 '인간 전두환,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을 특집으로 실었고, 또다른 신문은 9월 11일 공판일에 맞추어 '선동. 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이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런 역할을 자임한 이들은 언론뿐만이 아니었다. 한국 제일이라는 어떤 시인은 전두환을 시종일관 예찬했고, 어떤 목사들은 전두환에게 축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김대중 죽이기'를 위한 이들의 소망은 이제 곧 이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그들의 소망이 실현되진 않았다. 나라 밖에서 구명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 브라운 국방 장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레이건 정부가 앞장 섰고 유럽에서는 독일의 빌리 브란트, 폰 바이체커 대통령 등이 김대중 구명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미국의 부두 항만 노조가 미국 정부에 김대중을 구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오스트리아 전 수상 크라이스키는 자신이 제정한 평화상을 감옥의 김대중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차관 제공을 보류했고, 일본 최대 노조 총평의회는 한국 상품의 하역을 거부했다. 미국, 유럽, 일본의 해외 교포들도 구명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대중의 생명을 두고 조국에서는 그를 죽이려 하고 외국에서는 그를 구하려고 하는 기이한 형국이 연출되고 있었다. 결국 전두환과 그 일당의 김대중 제거 프로젝트는 무위로 돌아 가고 만다. 그 뒤의 이야기는 생략한다.

만델라의 최후 진술 'I am prepared to die'는 육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2000~2001년 남아공 당국과 영국의 국립 도서관이 공조해 법정에서 녹음됐던 테이프에서 만델라 음성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만델라 법정 최후 진술
▲ 녹음 테이프 만델라 법정 최후 진술
ⓒ South Africa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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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김대중 최후진술 육성은 들을 수 없다. 녹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중의 최후진술은 문익환의 아들 문성근이 방청석에서 외워 기록한 뒤 외국의 언론과 인권단체에 알렸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만델라와 김대중의 최후 진술은 살아 남아 우리 곁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빛나는 증언이자 우리 자신과 역사를 비추는 거울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 김홍업 전 의원이 18일 오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 김홍업 전 의원이 18일 오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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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만델라,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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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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