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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괴로울 때마다 나는 우주를 생각했다. 머나먼 우주로 나를 보내버려서 이 넓고 광활한 우주에서 나와 내 마음이 얼마나 티끌 같은지 생각하다 보면 조금씩 감정이 무뎌졌다.

그것만으로 부족할 땐, 처절한 심정을 세포 단위로 쪼개어 내 몸과 마음은 모두 세포들의 작용일 뿐이라고 되뇌기도 했다. 날마다 죽고 태어나는 수만 개의 세포가 나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이 감정 역시 결국 수만의 세포들이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외로움도 절망도 사그러지는 것 같았다.

<랩걸> 표지 사진
 <랩걸> 표지 사진
ⓒ 알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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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나 세포 같은 세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에 속해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매일 만나고 대화하는 인간관계의 총체가 아니라, 내가 가진 한 줌의 사회적 지위나 통장 잔액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세계가 있다는 것 말이다.

그 세계 속에 나와 다르게, 또는 나와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들이 있다는 건 새삼스럽지만 놀라운 일이다. <랩걸>이 들려주는 식물과 식물학자의 이야기가 딱 그렇다.

<랩걸>은 식물학자 호프 자런이 쓴 에세이로, 그녀와 그녀의 동료 '빌'이 함께 식물을 연구하며 지나온 20년의 삶의 자취를 담고 있다.

제목은 '랩걸'이지만 이 두 사람의 연구는 대학 건물의 오래된 골방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미국 전역, 아일랜드, 때로는 지구 반대편에까지 확장된다. 흙을 삽으로 퍼내고 이끼의 표본을 채취하면서 식물의 생존 방식과 성장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 호프 자런의 일이다.

기초 학문에 야박한 연구 지원금을 타내기 위해 전쟁에 쓰일 폭발물을 연구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폭발물 실험으로 타낸 연구 지원금으로 그녀는 '일주일에 40시간은 폭발물 프로젝트에 전념하고 또 다른 40시간은 곁가지로 진행하는 식물학 실험에 바치겠다는 기만적인 계획'(40쪽)을 세운다.

식물학만으로는 지원금을 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면서도 그녀는 이 연구실과 그녀의 동료 빌의 월급을 위해 계속 연구비를 충당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린다.

연인도, 친구도 아닌 그 이상의 대안적 관계  

빌과 호프의 관계는 상당히 독특하다. 이 두 사람은 연인도 아니고 일반적인 친구 관계도 아니다. 명시적으로는 빌이 호프의 연구를 돕는 연구실 조수지만 그건 순전히 돈이 얽힌 계약에서만 그렇고, 빌과 호프는 함께 연구를 진행하고 가치와 학문, 그 이상의 경험을 공유하는 삶의 동반자다.

정말 위험했던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빌이 우울에 찌든 목소리로 '함께 일하는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자 호프는 빌에게 '우리는 친구잖아, 아니야?'라고 묻는다. 빌의 대답은 이랬다.

"아니야 (..) 너랑 나랑은 어딘지도 모르는 데서 길을 잃은 불쌍한 바보들이야. (...) 그러니 입 닥치고 잠이나 자."

이 둘의 관계는 그들이 연구하는 식물과 빼다 닮았다. 다음 문장은 빌과 호프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어떤 말벌은 무화과나무 꽃 밖에서는 번식하지 못한다. 이 무화과꽃은 또 말벌의 도움이 없이는 수정하지 못한다. (...) 이 두 유기체들(말벌과 무화과)은 이런 관계를 거의 9천만 년 동안 유지해오면서 (...) 함께 진화해왔다."(289쪽)

출산, 육아 그리고 과학계에 만연한 성차별에도 호프가 지치지 않고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것, 그러면서도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던 배경에는 빌이 있다. 빌은 호프에게 성별 잣대를 들이대며 그녀의 연구 성과를 축소하지 않고, 단지 상사일 뿐이라며 자본의 관계로 선 긋지도 않는다.

호프 역시 빌을 밴에 사는 괴상한 히피라고 비하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빌의 능력과 성품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구천만 년까진 아니더라도, 이십 년이 넘도록 이들은 말벌과 무화과처럼 함께 하며 서로의 진화를 돕는 관계를 이어 나간다. 빌과 호프는 자본이나 성, 인맥의 영역이 아닌 그 이상의 관계 맺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세상의 끝에서 그는 끝이 없는 대낮에 춤을 췄고, 나는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닌 지금의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287쪽)

이들이 하는 연구와 이들의 사랑은 다르지 않다. 식물이 그렇듯이 이들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서로 다른 생명체의 이야기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책

원래 나는 식물 서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씨앗이 발아하여 나무가 되는 이야기는 너무 고리타분한 성장 서사 같았다. 역경을 견뎌라, 갈대처럼 흔들려라,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서 있는 나무처럼... 사람들이 식물을 다루는 방식은 언제나 혁명이 아니라 끈질긴 인내와 희생이었다.

하지만 <랩걸>에 쓰여진 식물은 이와 판이하다. 곤충이 누르면 튕기는 이파리(책에서는 이를 벌레에게 꿀을 먹이고 엉덩이를 툭 쳐서 날려보낸다고 표현한다), 스스로 팔을 휘두르는 식물(비록 아주 아주 느린 속도지만),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완전히 같은 나무... 인간이 식물을 성장의 대명사로 쓰거나 말거나 전혀 상관 없이, 식물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그들만의 법칙을 개발하면서 생존하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훨씬 더 좋았다. 모두가 공유하는 자연 원리란 없으며 그러니 모두가 하나의 '옳은' 방식으로 살아가지는 않아도 된다는 말로 들렸다. 이 책을 다룬 한 기사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식물은 우리와 달라요. 저는 수십 년 동안 식물을 연구한 뒤 깨달았어요. 식물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사람과) 공통점이 있긴 합니다. 빛을 향해 자란다는 거죠."

<랩걸>은 사람과 식물이 '함께' 빛을 향하는 책이다. 식물 이야기와 호프의 삶이 서로의 서사를 지탱하되 섣불리 어느 한 쪽의 메타포로 흡수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두 생명체의 이야기가 서로 '직권 남용'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것, <랩걸>만이 선사하는 독특한 평화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알마(2017)


태그:#랩걸, #호프자런,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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