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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5일부터 11일까지 오스트리아 빈(Wien)에 다녀왔다. 유럽의 사회혁신가들이 모이는 Eu-SPRI Annual Conference Vienna 2017에서 서울시(서울혁신파크)의 사회혁신 리빙랩 프로젝트 사례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회의장 밖 거리에서 마주친 몇 가지 혁신적 풍경들을 두 번에 걸쳐 전하고자 한다. 첫 번째 글은 자전거와 사람 그리고 자동차가 공존하는 아주 멋진 길에 대한 이야기다. - 기자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주치게 되는 흔한 풍경. 고풍스런 건물들 사이로 트램이 지나다닌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주치게 되는 흔한 풍경. 고풍스런 건물들 사이로 트램이 지나다닌다.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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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러 도시 가운데 우리에겐 조금 낯선 도시인 오스트리아 빈(Wien)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다. 경영컨설팅사인 머서(mercer)가 해마다 발표하는 '도시 삶의 질 순위(Quality of Living City Rankings, 2017.3)'에서 빈은 벌써 8년째 1위를 지키고 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로 뒤를 이었다.

('도시 삶의 질 순위'는 정치·사회 환경, 경제 환경, 사회·문화 환경, 의료와 건강에 대한 배려, 학교와 교육, 공공 서비스와 교통, 여가, 소비재, 주거, 자연 환경 등 10개 범주 39개 요소를 기준으로 평가한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폴이 25위로 첫 손에 꼽혔고, 나머지 2~5위는 도쿄(47), 코베(50), 요코하마(51), 오사카(60) 등 모두 일본 도시들이 꼽혔다. 서울은 76위에 이름을 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걷기 좋은 도시 빈

빈은 너비가 서울의 2/3에 달하지만 인구는 약 180만 명으로 서울의 1/5에도 못 미친다. 어디를 가도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길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어, 마치 17세기 바로크시대의 유럽을 거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거리 어디로 눈을 돌려도 눈에 띄는 게 또 있다. 바로 자전거와 자전거길이다. 빈은 '자전거 도시'다.

빈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이들을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빈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이들을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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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 도심을 걷다 보면 왜 사람들이 이 곳을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는지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풍경들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몰리는 '슈테판 대성당' 앞 광장(Stephansplatz)에서부터 끝없이 늘어선 노천카페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웅장하게 솟은 그림 같은 건물들을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탄성을 자아내는 오스트리아 의사당과 빈 시청사, 빈 미술사 박물관과 국립 오페라 극장 등이 모두 느긋하게 20분만 걸으면 닿을 만큼 가깝다.

빈 어디를 둘러봐도 고풍스럽고 웅장한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빈 어디를 둘러봐도 고풍스럽고 웅장한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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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넋을 놓고 걷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전거길에 들어섰다가 자전거에 치이거나, 자전거를 타다 급하게 멈춰 선 이로부터 짜증 섞인 타박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호되게. 빈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있든 걷고 있든, 누구나 자전거길을 지키는 게 모두에게 이롭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니 이 도시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라면 자전거를 타지 않은 채로 자전거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늘 발밑을 살펴야 한다. 혹시 내가 걷는 길에 자전거가 그려져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빈의 자전거길
 빈의 자전거길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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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길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보행자와 자전거 탑승자들
 각자의 길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보행자와 자전거 탑승자들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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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에는 무려 1300km가 넘는 자전거길이 깔려 있다. 도시 너비가 415㎢(20.3×20.3km)이니 자전거길이 얼마나 촘촘한지 알 수 있다. 공공자전거인 '빈 도시자전거(Citybike Wien)'는 2003년에 첫 선을 보였고, 오늘날 약 48만 명이 이 공공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많다보니 자전거 신호등이 따로 있을 정도다.

빈의 공공자전거 'Citybike Wien'
 빈의 공공자전거 'Citybike Wien'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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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 자전거신호등
 빈의 자전거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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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려면 지켜야 할 규칙도 까다롭다. 가령, 만 16세가 되기 전에는 어린 아이를 태우고 탈 수 없다. 태울 수 있는 나이가 돼도 반드시 한 번에 한 명씩만, 아이의 몸에 맞는, 단단히 고정된 의자에 앉혀야 한다. 또 10~12살의 어린이는 자전거시험을 치러 면허를 따지 않으면 혼자서는 자전거를 탈 수 없다. 만 16살 이상의 누군가가 곁에서 함께 자전거를 타야 한다.

사람과 자전거 그리고 자동차의 공존

빈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곳이 있다. '마리아힐퍼 길(Mariahilfer Straße)'이라 불리는 곳이다. '마리아힐퍼'란 이름이 붙은 길은 '빈 서역(Wien Westbahnhof)'을 중심으로 한쪽은 박물관들이 모여있는 '무제움스크바르티어(MuseumsQuartier)', 다른 쪽은 쇤부른(Schönbrunn) 궁전으로 이어진 약 4km가량의 제법 넓은 길이다. 이 가운데 '빈 서역'에서부터 '무제움스크바르티어' 쪽으로 난 1.6km의 길에 온갖 옷가게와 식당, 카페들이 모여 있어 날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보통 '마리아힐퍼 길'이라고 하면 이곳을 가리킨다.

마리아힐퍼 길의 초입. 자전거를 탄 한 무리가 길을 오르고 있다.
 마리아힐퍼 길의 초입. 자전거를 탄 한 무리가 길을 오르고 있다.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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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까지만 해도 사람과 자전거 그리고 차가 뒤엉켜 복잡했던 이 길이 지금은 모두가 맘 편히 다닐 수 있는 길로 탈바꿈했다. 올해 4월엔 박원순 서울시장도 이곳을 다녀갔다. 박 시장이 다녀간 뒤로 '보행자 전용 도로'에 눈길이 쏠렸지만,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건 그것만이 아니다.

'보행자 전용 도로'는 1.6km 가량 길게 이어진 길 한 가운데에 자리한 450m 구간뿐이다. 그 양쪽 옆으로 난 나머지 약 1.15km엔 차가 다닌다. 단, 시속 20km 이하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차가 속도를 줄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자동차가 시속 20km 이하로 움직이면서 자전거와 사람도 마음 놓고 같은 길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가 시속 20km 이하로 움직이면서 자전거와 사람도 마음 놓고 같은 길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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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어느 날, '무제움스크바르티어'에서 '빈 서역' 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걸었다. 차들은 최고 제한 속도인 시속 20km보다 훨씬 더 느리고도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들어와선 안 된 길에 들어선 것 마냥. 반면, 차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페달을 구르는 이들은 거리낄 것이 없어 보였다. 커다란 차들과 두 바퀴의 자전거들이 뒤섞여 달리는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일 법도 한데, 그 옆을 지나는 이들에게선 걱정스런 눈빛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이 길을 지나는 동안은 서로가 서로를 더 (차를 모는 이들이 조금 더) 살피고 조심하리란 믿음이 깔려있는 듯했다. '공존을 위한 배려'가 이 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길에선 주차도 함부로 할 수 없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만 할 수 있고, 짐을 내리려는 차들도 정해진 곳에 잠시 차를 댈 수 있을 뿐이다. 길을 지나는 데도 오래 걸리고 주차도 할 수 없으니 굳이 차를 타고 이 곳을 찾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그러니 길을 지나는 차의 수도 자연스레 줄어들게 된다.

차와 자전거가 공존하는 마리아힐퍼 길의 모습
 차와 자전거가 공존하는 마리아힐퍼 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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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속도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도시의 풍경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빈에서 마주친 가장 낯설고도 설레는 풍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교회 골목(Kirchengasse)'이란 표지판이 나오자 버스도 차도 모두 오른 쪽으로 빠져나갔다. 여기서부터 '차 없는 거리'가 펼쳐진다(골목길로 빠져나간 차들도 30km 이하로 다녀야 한다. 오스트리아의 골목길은 대부분 제한속도가 30km/h다). 차들이 모두 빠져나간 널찍한 거리를 비로소 사람과 자전거, 유모차들이 한가로이 거닐었다. 5년간이라는 긴 준비와 주민투표를 거쳐 2015년에야 '차 없는 거리'로 새롭게 태어난 이 길을 찾는 이들은 많게는 하루 약 7만 명에 달한다고 하니 빈의 선택은 옳았던 셈이다.

삶의 질 1위 도시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보행자 전용도로' 앞에서 옆으로 빠져나가는 버스. 여기서부터 차 없는 거리가 약 450m 펼쳐진다.
 '보행자 전용도로' 앞에서 옆으로 빠져나가는 버스. 여기서부터 차 없는 거리가 약 450m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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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힐퍼 길 중 '보행자 전용 도로'의 여유로운 풍경
 마리아힐퍼 길 중 '보행자 전용 도로'의 여유로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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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 이른바 '보행 친화 도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3월 옛 한양도성 안 16.7km 길을 '녹색교통진흥특별대책지역'으로 정하는가 하면, 2020년까지 공공자전거 '따릉이'와 자전거길도 크게 늘리기로 했다. 차를 줄이고 자전거를 늘려, 서울을 걷거나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시가 발 벗고 나선만큼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서울의 풍경도 조금씩 바뀌어갈 것이라 믿는다.

1000만 명이 모여 사는 거대 도시가 하루아침에 빈이나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84만 명), 덴마크 코펜하겐(59만 명)처럼 바뀌길 기대하는 건 무리다. 서울엔 서울에 어울리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빈으로부터 배워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존의 지혜'와 '몸에 밴 배려'가 아닐까. 속도를 늦추는 것만으로도 공존이 가능할 수 있다는 '다른 생각' 그리고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조금 더 살피면서 더디 가려는 태도 말이다.

적어도 내겐 하나를 몰아낸 풍경보다 그렇게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제 길을 가는 풍경이 더 아름다웠다. 오스트리아 빈이 그랬듯, 우리도 시와 시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마음가짐을 바꿔간다면 세계에서 일흔여섯 번째로 살기 좋은 도시에서 조금은 더 살기 좋은 도시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추후 서울혁신파크 블로그(http://s_innopark.blog.me)에도 실릴 수 있습니다.



태그:#사회혁신, #서울혁신파크, #비엔나, #빈,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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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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