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20세기 계약결혼을 히트 친 실존주의 커플이다. 철학적 지성을 공유한 연인이자 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한 주체성을 내세운다. 그러다가 사랑 영역에서는 각자도생하면서도 끝까지 파트너십을 이어간다.

그들보다 몇 년 앞서 더 견고한 파트너십으로 정치적 파장을 일으킨 세기의 연인이 존재한 바를 이제서야 안다. 아나키스트적 신념을 동색으로 하여 한곳에 몸을 부린 식민지 '조센징' 박열(이제훈 분)과 식민국 '내지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 영화 <박열>은 두 아나키스트가 협연한 '불꽃 청춘'을 재현한 논픽션 역사물이다.

 영화의 한 장면(감옥에서 연출한 사진)

영화의 한 장면(감옥에서 연출한 사진) ⓒ 메가박스 플러스엠


둘의 중매쟁이는 시 '개새끼'다. 영화는 첫 부분에서 그 정황을 사실적으로 연출하여 부각시킨다. 영화는 단순한 반일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항일로서의 의미를 개새끼의 일화로 전달하고, '개새끼' 박열에 감동한 후미코의 동거 제안으로 이어진다.

삯을 부족액으로 땅에 던진 일본인에게 더 달라고 매달리다 얻어터지는 인력거꾼 박열은 보잘것 없는 '조센징'이지만 정면으로 저항하는 '개새끼'다. 그 개새끼임을 겪고 이와사키 오뎅집에 들어서는 박열을 낯선 점원 후미코가 반긴다. 둘은 정면으로 세상을 돌파하는 깜냥이 닮아 있다.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의 군관민이 합세한 조선인 대학살 장면들은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구체적 역사 진술에 해당한다. 영화는 국제적 비난에 몰린 일본 정부가 잔머리를 굴려 낚은 박열과 후미코 때문에 골머리 앓으며 파열하는 내각을 훑는다.

그 국면을 이용해 두 사람은 황태자를 암살하려던 대역죄인을 자처하며 재판정에서 조선의 혼례복을 입고 의견을 개진하는 초유의 스캔들을 일으킨다. 스캔들 중 하나인 옥중 사진과 싱크로율 100%인 내면 연기를 발산한 배우 이제훈과 최희서가 돋보인다.

 박열과 후미코(당시 신문기사)

박열과 후미코(당시 신문기사) ⓒ 메가박스 플러스엠


 관복 입고 재판정에 선 박열

관복 입고 재판정에 선 박열 ⓒ 메가박스 플러스엠


두 배우가 원석임을 알아본 이준익 감독의 매눈은, 먼지투성이로 사장된 역사적 인물 박열과 후미코를 철저한 고증으로써 관객의 재미를 돋우며 감동적으로 밝혀 준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만신창이가 된 지금 여기의 역사 의식 수습에 마중물로 쓰일 만하다.

"고증에 충실한 실화"라는 자막이 없다면 믿기지 않는 <박열>의 인물들이고 사건들이다. 변호를 자임한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를 낳은 일본 제국주의의 선진성이 한몫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겨우 20대 초반인 박열의 담대한 거래는, 사후 후미코 주검을 조선 땅에 묻기 위해 혼인신고를 제안한 사려 깊음과 더불어 성숙해 눈길을 모은다.

결론적으로 <박열>은 항일투사 박열의 일대기가 아니다. 개새끼 박열이 감옥에 빠진 정황과 선전(善戰)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향하는 일제강점기의 청춘을 선보인다. 그 베끼기 힘든 자유인의 잔상이 오래갈 듯하다.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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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종류의 책과 영화를 즐긴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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