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주말드라마 <비밀의 숲> 9화. 검사장 부인인 이연재(윤세아 분)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이젠 듣기도 질리는 차별적 프레임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다. 순간 '또...' 싶지만, 한여진 형사(배두나 분)의 심드렁한 대꾸가 이어진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 맞장구치는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까지 다른 여자들을 적으로 대해온 게 아닐까요?"

한여진은 "강력반 여형사는 처음이네. (다른 남자 팀원들이) 잘해줘요?"라는 이연재의 질문에도 "잘해줄 이유는 없으니까요. 똑같습니다"라고 답했다. 가뜩이나 경직돼 있던 극 중 식사 자리는 배두나의 말에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 TV를 시청하던 많은 여성 시청자들은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조력자' 아닌 여주 반갑다

 tvN <비밀의 숲>

남-여라는 성별 차이가 아니라도, 검사와 형사라는 설정은 관계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여진 형사(배두나 분)은 늘 자기주도성과 주체성을 잃지 않는다. ⓒ CJ E&M


<비밀의 숲>은 검찰 스폰서 살인 사건 이면에 숨겨진 진실과 검사들의 추악한 비리를 추적하는 드라마다. 기존 수사물에서 여성의 역할은 주로 프로파일러나 부검의였다. 사건을 추적하는 남자 형사에게 영감과 도움을 주는 조력자에 머물렀다. <시그널>의 김혜수나, <터널> 이유영은 나름 자기주도적인 역할이었지만, 결국 '약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범인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하기야, 데이트 폭력이 로맨스로, 스토킹이 순정으로 포장되는 우리 드라마에서, '좌충우돌 민폐 여경'이 아닌 것만 해도 감사하다.

극 중 한여진이 놓인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 강력반 형사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 경찰에게 무시당하기 일쑤. 하지만 그는 텃세에 굴하거나, 징징대는 법이 없다. 특유의 집요함과 정의로움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한여진은 지난 8회 방송에서 동료들이 박경완(장성범 분)을 구타해 거짓 자백을 받아내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한 사람보다, 내 곁에 평범한 동료들이 이랬다는 걸 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분노했다. 그리고는 "이들이 처음부터 잔인하고 악마라 그랬겠나. 하다 보니 되고, 눈 감고 침묵하니까 이러는 거다. 누구 하나만 제대로 짖어주면 바뀔 수 있다"고 외친다.

이런 한 형사에게 주인공 황시목 검사(조승우 분)는 오히려 타협을 제안한다. 가만히 있으면 2주 뒤 방면될 수 있지만, 인권문제가 불거지면 검사장 이창준(유재명 분)이 박경완을 장기간 잡아 가두고 풀어주지 않을 거라는 이유에서다. 인권과 실익 사이에서 선택하라는 황 검사의 말에, 한여진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선택을 빙자한 침묵을 강요받았을까. 난 절대 타협할 수 없다"며 맞선다. 결국 황 검사는 이를 인권단체에 알리고, 인권단체는 박경완이 출소하자마자 이 일을 세상에 알린다. 남-여라는 성별 차이가 아니라도, 검사와 형사라는 설정은 관계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스폰서 검사'라는 주제 역시 '검사'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여진은 늘 자기주도성을 잃지 않고,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민폐? 자기 목적에 충실한 영은수

 tvN <비밀의 숲>의 한 장면.

영은수의 무모함은 황시목 입장에서 본다면 분명 민폐다. 하지만 기존 드라마 속 '민폐' 캐릭터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 CJ E&M


<비밀의 숲>에 등장하는 당찬 여성 캐릭터는 한여진만이 아니다. 전 법무부장관 딸인 영은수(신혜선 분)는 초임 검사다. 그는 '떡값'을 받았다는 누명을 쓰고 장관 자리에서 쫓겨난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싸운다.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검사장은 그의 '주적'이다. 목적과 복수심이 분명한 탓에 의욕이 앞서 종종 황시목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한다. 하지만 김가영(박유나 분)의 휴대폰을 찾기 위해 서동재 검사(이준혁 분)의 방에 숨어든 황 검사를 구해주기도 하는 등 검찰청 내에 '내 편'이랄 사람이 없는 황시목을 곤경에서 구해주는 이도 영 검사뿐이다.

영은수의 아버지이자 황시목의 스승인 영일재(이호재 분)는 하나뿐인 딸을 염려한다. 황시목에게 딸을 지켜달라 부탁하며 "아직 어린애다. 세상이 얼마나 교활한지, 인간 본성이 어떤지 모르는 하룻강아지"라고 말한다. 검사인 딸을 "지식과 타이틀로 무장해 더 위험한 햇병아리"라고 표현하며 "걔가 불로 뛰어들지 않도록 부탁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영은수를 한 명의 검사가 아닌, 그저 어리고 연약한 여성으로만 여기는 표현이지만, 아버지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는 대사다. 만약 황시목이 그저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해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시목은 "내게 월급쟁이 검사가 되지 말라고 가르쳐주신 분 아니냐. 영 검사는 어린아이도, 연약한 여성도 아니"라고 대꾸한다. 대신 칼을 맞으라면 그럴 수는 있지만, 사람을 통제하는 게 가능하냐고.

영은수는 정말 통제가 불가능한 사람이다. 서동재 검사가 김가영 살인 사건의 범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를 도발해 목을 졸리는가 하면, 아버지의 무죄를 증명해줄 뇌물 배달원 김태균(이재원 분)이 도망치는 듯 싶자 냅다 트럭에 올라탄다. 언뜻 기존 수사드라마 속 범죄 피해자가 되는 여성 캐릭터가 아닌가 싶겠지만, 영은수는 좀 다르다. 검사장 일가가 살인 사건의 범인이기를 바라는 영은수는,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가며 복수를 위해 한발 다가간다. 때문에 서 검사에게 목이 졸려 기절해 있다가도 금세 정신을 차리고는 다짜고짜 황시목에게 찾아가 "서 검사는 사람 죽일 사람이 아니"라고 알린다.

죽다 살았다는 것보다, 원하는 진실에 다가갔다는 사실에 더 기뻐하는 영 검사를 두고, 황시목은 "네 행동 정상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영 검사는 아무렇지 않게 "어떻게 제정신 일 수 있냐. 3년 동안 엄마 아빠는 죄인처럼 살았다"고 대꾸한다. 황시목 입장에서만 본다면 앞뒤 분간 없이 달려드는 영 검사의 행동은 분명 '민폐'다.

하지만 보통 드라마 속 답답한 민폐형 여성 캐릭터와는 다르다. 어수룩해서, 뭘 잘 몰라서 하는 발생하는 실수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위한 나름의 계산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영 검사는 목적이 분명하다. 그 목적이 황 검사와는 조금 어긋나 있을 뿐이다. 결국은 맞닿게 되겠지만 말이다. 

테리우스가 된 <군주> 화군

 <군주>의 화군은, 질투에 눈이 멀어 흑화하지 않는다. 사랑을 얻지 못한다해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스스로 조력자가 되는 '테리우스형' 캐릭터는 그간 서브 남주들의 전유물이었다.

<군주>의 화군은, 질투에 눈이 멀어 흑화하지 않는다. 사랑을 얻지 못한다해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스스로 조력자가 되는 '테리우스형' 캐릭터는 그간 서브 남주들의 전유물이었다. ⓒ MBC


종영을 앞둔 MBC 사극 <군주> 속 화군(윤소희 분)도 그랬다. 흔히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한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는 질투심으로 흑화해 모두를 나락으로 빠트렸다. 여주를 짝사랑하는 서브 남주는 꽤 자주 여주의 행복을 위해 조용한 조력자로 남는 경우가 많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군주>는 달랐다. 가은(김소현 분)을 짝사랑해 눈이 먼 이선(엘 분)이는 질투에 눈이 멀어 흑화했지만, 화군은 세자(유승호 분)를 위해 스스로 편수회의 대편수가 되어 물심양면 돕는다. 가은을 사랑하기 때문에 도움받기를 꺼리는 세자에게 "중전도, 저하의 여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편수회의 대목이 되어 편수회를 저하에게 바치겠다"고 말한다. 그간 사극과 현대극을 통틀어, 이런 서브 여주는 없었다. 이런 테리우스식의 사랑은 언제나, 서브 남주에게나 허락됐기 때문이다. 많은 서브 여주들이 <비밀의 숲> 한여진이 들어야 했던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반가운 것은, 지난해부터 불기 시작한 여성 소비자들의 지적을, 콘텐츠 생산자들이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간 여성들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가장 강력한 소비자임에도 불구하고, 콘텐츠 안팎으로 무시당해왔다. 소비자들의 의식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생산자들의 인식이 제자리에 머물다 보니 불협화음이 불거진 것도 여러 번이다.

사실 이 같은 불협화음과 조율이 우리에게만 있는 일은 아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만 봐도, 모아나는 남자 캐릭터 의존 없이도 성장했고, '왕자의 아내'가 아니라 스스로 부족의 영웅이 된다. 왕자와의 결혼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결말이었다. 오랜 기간 소녀들에게 고정된 여성상과 비현실적인 미의 기준을 주입한다며 비난받아온 디즈니도 결국, 세상의 변화에 몸을 맡긴 것이다.

대중문화는 말 그대로 대중들의 문화다. 대중이 변화하는 대로, 대중이 원하는 대로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 대중문화의 미덕.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진보하는 세상에 맞춰 조금씩 변화하는 드라마가 반갑다.

비밀의 숲 군주 배두나 신혜선 윤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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