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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1395년 6월 한양을 한성부로 개편하고, 도성조축도감을 설치하여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18.6㎞의 한양도성을 쌓았다.
▲ 한양도성 태조 이성계는 1395년 6월 한양을 한성부로 개편하고, 도성조축도감을 설치하여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18.6㎞의 한양도성을 쌓았다.
ⓒ 배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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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년 8월 조선의 수도로 한양이 결정되었다. 천도 문제가 일단락되자 태조 이성계는 1394년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했다. 그런 다음 그해 10월 25일 개경을 떠나 사흘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당도하여 도성 건설에 매진했다.

한양은 유교 경전인 <주례>의 도성 조영 원칙에 입각하여 건설됐다. <주례>의 동관고공기에 제시된 도성 조영 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왕남면(帝王南面), 왕이 거처하는 궁궐은 남향으로 짓는다. 전조후시(前朝後市), 궁궐 앞에는 조정을 두고, 뒤에는 시장을 설치한다. 좌묘우사(左廟右社), 군주의 위패를 모신 태묘는 궁궐 왼쪽에,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신 사직은 궁궐 오른쪽에 둔다.

이 같은 원칙에 따라 도성 내부를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하여 궁궐과 조정관아, 종묘와 사직 등을 배치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북악산(백악), 남산(목멱), 낙산(타락), 인왕산으로 둘러싸인 한양은 <주례>의 도성 조영 원칙을 충족할 만큼 평지가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도전은 <주례>의 도성 조영 원칙을 충실하게 반영하려 애썼다. 법궁인 경복궁은 북악산을 등지고 정남향으로 지었고, 그 앞에는 육조거리를 만들어 조정관아를 배치했다. 경복궁의 왼쪽에는 종묘를 건설했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했다. 다만 한양의 지형상 종묘는 경복궁보다 앞으로 치우쳤고, 시전(市廛)은 경복궁 뒤편에 옹색하게 배치되었다.

정도전은 <주례>의 동관고공기에 제시된 도성 조영 원칙에 따라 군주의 위패를 모신 종묘는 경복궁 왼쪽에,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신 사직은 오른쪽에 건설하도록 설계했다.
▲ 종묘 정전 정도전은 <주례>의 동관고공기에 제시된 도성 조영 원칙에 따라 군주의 위패를 모신 종묘는 경복궁 왼쪽에,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신 사직은 오른쪽에 건설하도록 설계했다.
ⓒ 박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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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 9월 29일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이 완공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10월 5일 종묘에 나아가 4대조의 신위를 봉안하고, 12월 28일 경복궁에 입궁했다. 한양으로 천도한지 1년 2개월만이었다. 이보다 앞선 1395년 6월 6일에는 한양을 한성부로 개편하고, 도성조축도감을 설치하여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18.6㎞의 도성을 쌓았다. 한성부가 관할하는 구역은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였다. 성저십리의 경계는 북쪽으로는 보현봉에서 아미산, 석관현(石串峴)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능선이며, 동쪽으로는 수유리에서 발원한 우이천과 중랑천, 남쪽으로는 지금의 동호대교 인근의 두모포에서 양화나루에 이르는 한강, 서쪽으로는 석곶현과 홍제천을 거쳐 양화나루에 이르는 구간이다.

한양도성이 완공된 것은 1396년이다. 도성이 완공되면서 한양은 수도로서 위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한양이 수도로 자리 잡기까지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어야 했다. 1차 왕자의 난(1398)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1399년 3월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후 2차 왕자의 난(1400)으로 조선의 3대 임금이 된 태종 이방원은 1405년 10월 한양 환도를 단행하였다.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이 설계한 한양의 공간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경복궁은 형제들을 살육한 피비린내 나는 공간 아닌가. 환도와 함께 태종 이방원은 종묘 북쪽에 창덕궁을 짓고, 국중(國中) 대로인 종로(운종가)에는 행랑(行廊)을 만든 다음 시전을 설치했다. 이리하여 전조후시와 좌묘우사의 원칙이 무너졌다.

대한제국의 한성부 개조사업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다음 1897년 10월 문무백관을 이끌고 환구단에 나아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 환구단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다음 1897년 10월 문무백관을 이끌고 환구단에 나아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 서울역사편찬원 <시민을위한서울역사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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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한성부 개조사업은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 1896년 광무개혁으로 이어지면서 진행되었다. 갑오개혁을 이끈 연립 내각의 내부대신 박영효는 치도(治道, 도로 정비)의 중요성을 오래전부터 인식하였다. 박영효는 한성판윤으로 재임하던 1883년 치도국을 설치할 정도로 치도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한성부의 치도사업은 한성부윤 유정수가 가가금령(假家禁令)을 발표(1895. 4. 16)하면서 시작되었다. 가가금령은 도로를 침범해 지은 가가의 철거와 신축을 금하는 것이었다. 가가금령은 도로 정비가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일본인들의 남대문로 진출을 막으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1895년 8월에는 총리대신 겸 내부대신 박정양의 주도로 '도로수치(道路修治)와 가가기지(假家基地)를 관허(官許)하는 건'이 채택되어 한성부의 도로 폭과 가가 높이 등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또한 1898년 9월에는 한성판윤 이채연의 주도로 대대적인 도심 정비사업이 추진되었다. 종로와 광통교 주변을 비롯하여 정동에서 모교, 서대문에서 경복궁, 경운궁에서 야주개, 황토마루에서 동대문, 광통교에서 남대문을 잇는 도로의 가가 철거와 정비가 이루어졌다.

박정양과 이채연 등 개화파들이 주도한 한성부의 도시개조사업은 워싱턴 DC의 도로망과 공간 구성을 모방한 것이었다. 당시 한성부의 개조사업에 대해 1894년에 이어 1896년 10월 한성을 방문한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이자 여행가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수없이 많은 좁은 길들은 넓혀지고 있고, 도로는 포장되어 자갈이 깔려지고 있다. 그리고 돌을 재료로 한 배수구는 그 양쪽 측면을 따라 만들어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이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많은 작업과 함께 자극적이고 혐오스럽던 서울의 향기는 사라졌다. 위생에 관한 법령이 시행되었고, 집 앞에 쌓인 눈을 그 집의 모든 식구들이 치우는 것이 의무적일 정도로 한국의 문화 수준은 매우 높아졌다. 그 변화들은 너무나 커서, 나는 1894년도였다면 서울의 한 예로서 이 장을 위해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를, 그 특징적인 빈민촌을 발견할 수 없었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인화 역),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498~500쪽.

대한제국의 한성부 개조사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문무백관을 이끌고 환구단에 나아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황도(皇都)의 위용을 갖추기 위해 경운궁에는 정관헌, 돈덕전, 수옥헌(중명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이 연이어 건설되었고, 경운궁을 중심으로 방사상 도로가 개설되었다.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여 대한제국이 청나라로부터 자주국임을 천명하였다.

한성부의 도로 경관은 1899년 5월 17일 서대문에서 청량리를 잇는 전차가 개통되면서 크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1899년 12월에는 종로에서 남대문을 지나 용산으로 이어지는 전차가 개통되었고, 1900년 7월에는 남대문에서 봉래동을 거쳐 서대문에 이르는 노선이 부설되었다. 이즈음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서대문정거장과 남대문정거장이 한성의 관문으로 역할하였다.

대한제국이 추진한 한성부 개조사업은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의 한성부 개조사업은 내실을 기하기보다는 개화된 이미지를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했고, 근대국가로의 이행을 위한 주체역량이 미약하여 좌절하고 말았다.

조선총독부의 경성 개조

1930년대 초반 세계를 휩쓴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일본, 조선, 만주를 묶는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34년 6월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을 수립하였다.
▲ 경성시가지계획평면도 1930년대 초반 세계를 휩쓴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일본, 조선, 만주를 묶는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34년 6월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을 수립하였다.
ⓒ 서울역사편찬원<시민을위한서울역사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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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한성의 이름은 경성(京城)으로 바뀌었다. 식민지 조선의 경성은 더 이상 수도가 아니었다. 수도의 지위를 박탈당한 경성은 경기도에 편입되는 동시에 관할구역이 도성 안과 용산 일대로 축소되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한성부 개조사업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1912년 경성시구개수(京城市區改修) 계획을 수립하였다. 경성시구개수의 중심공간은 종로-황금정(을지로)-본정(충무로)으로 이어지는 남북도로였다. 여기에 더해 태평로, 남대문로, 소공로, 돈화문로, 창경궁로 등 경성의 남북을 잇는 도로의 신설과 정비 계획이 포함되었다. 특기할 것은 세종로 사거리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태평로가 경성시구개수의 일환으로 1912년 폭 27m의 도로로 신설되었다는 사실이다.

경성시구개수 계획은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크게 바뀌었다. 일제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구실로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립키로 결정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1916년 7월 10일 착공하여 1926년 1월 4일 건물을 완공한 다음 그해 10월 1일 낙성식을 가졌다.

이즈음 일제는 경성부청의 신축 이전도 추진하였다. 경성부청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사가 있던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로 결정되었다. 경성부청은 1925년 3월 착공하여 1926년 11월 완공되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경성부청-경성역으로 이어지는 경성 도심의 공간배치가 일단락되었다.

1930년대 초반 세계를 휩쓴 대공황은 경성의 도시계획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공황의 극복을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일본, 조선, 만주를 묶는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대륙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에서 거점 도시 개발을 계획하였다. 1934년 6월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은 이 같은 공업화 정책의 산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4월 조선시가지계획령에 기초하여 경성부를 확장하였다. 당시 경성에 편입된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독도(纛島, 뚝섬)면, 숭인면, 은평면, 연희면과 시흥군 북면, 동면, 영등포읍, 김포군 양동면이었다. 경성에 편입된 지역은 동부로는 청량리, 왕십리, 한강리였고, 서부로는 마포, 용강, 연희, 신촌, 은평이었으며, 한강 이남은 영등포와 노량진일대였다. 눈여겨 볼 것은 이때 영등포와 노량진이 편입되면서 경성이 한강 이남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중후반 청계천의 전면 복개를 계획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대경성계획의 일환으로 청계천을 복개하여 자동차 전용도로와 지하철을 건설, 병참기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인력난, 자재난, 재정난에 봉착하게 되면서 대경성계획은 유야무야되었다.

새서울백지계획과 서울도시기본계획

1961년 5월 23일 화신산업 사장 박흥식은 가회동 자택에서 연행되었다. 5.16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부정축재 혐의로 박흥식을 연행하여 구속시켰다. 박흥식이 석방된 것은 구속 43일 만인 1961년 7월 5일이다.

"장차 예상되는 수도 서울의 인구증가에 대비한 주택건설계획을 민간기업인 입장에서 구상하여 제출하라."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 부정축재처리위원장인 육군 소장 이주일은 박흥식을 석방하면서 이렇게 지시했다.

박흥식은 한강 이남인 송파동과 가락동에서 삼성동, 역삼동, 서초동, 반포동, 방배동을 거쳐 경기도 과천시에 이르는 광활한 부지에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개발한다는 파격적인 계획안을 수립하였다. 남서울계획안이라 명명된 계획안은 미개발된 한강 이남의 2,400만평의 부지에 30만명 이상을 수용하는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남서울계획안이 제출되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부가 이 사업을 직접 추진하는 것은 불가하므로 제안자인 박흥식이 개인사업으로 추진하라고 발을 뺐다. 사업 추진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외국 자본(상업차관) 조달에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우여곡절 끝에 박흥식의 남서울계획안은 수포로 돌아갔다. 애당초 정부가 추진해야 할 공공의 도시개발을 개인사업가에게 맡겨 추진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서울시장 김현옥은 1966년 8월 13일 '서울도시기본계획'을 발표한 다음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서울시청 앞 광장에 ‘대서울도시기본계획전시장’을 만들어 5천분의 1의 서울 지형도에 서울도시기본계획을 배치하여 전시하였다.
▲ 대서울도시기본계획전시장 서울시장 김현옥은 1966년 8월 13일 '서울도시기본계획'을 발표한 다음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서울시청 앞 광장에 ‘대서울도시기본계획전시장’을 만들어 5천분의 1의 서울 지형도에 서울도시기본계획을 배치하여 전시하였다.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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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50만명을 수용하는 새 행정수도를 만들어내겠다."

서울시장 김현옥은 1966년 5월 27일 서울시청 기자실에 들러 이렇게 발표했다. 김현옥의 이날 발언은 사전에 준비되지 않은 즉흥적인 것이었다.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새서울백지계획은 이렇게 공식화되었다.

3~4천만평의 부지에 상주인구 100만~150만명이 거주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서울백지계획은 무궁화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새서울백지계획의 공간 배치는 북쪽에는 대통령 관저, 남쪽에는 입법부(국회), 동쪽에는 행정부, 서쪽에는 사법부로 구성되었다.

김현옥 시장은 새서울백지계획과 함께 서울도시기본계획 수립도 병행했다. 서울시가 국토계획학회에 의뢰하여 수립한 서울도시기본계획은 1966년~88년까지 서울의 인구를 500만명으로 산정, 강북에 집중된 기능을 분산하겠다는 취지였다. 1966년 기준의 불변가격으로 3,235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 서울도시기본계획은 입법부는 남서울(현 강남구와 서초구)에, 사법부는 영등포에, 행정부는 용산에, 대통령 직속기관은 세종로일대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1966년 8월 13일 서울시장 김현옥은 기자회견을 통해 서울도시기본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런 다음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서울시청 앞 광장에 '대서울도시기본계획전시장'을 만들어 5천분의 1의 서울 지형도에 서울도시기본계획을 배치하여 전시하였다. 그해 9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이어진 전시회에는 79만6,998명이 찾았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서울도시기본계획은 장기적인 서울 발전의 비전을 수립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강남 개발은 서울도시기본계획에 기초하여 추진되지 않았다. 폭발적인 인구증가, 경제 개발, 남북 대치 하의 안보문제가 강남 개발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1966년 제3한강교(한남대교)와 1968년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면서 강남 개발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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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봉 시민기자는 <오마이뉴스>에 매달 1만원 이상씩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10만인클럽 회원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 주십시오. 휴대폰 010-3270-3828로 전화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끝까지 취재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서울도시기본계획, #새서울백지계획, #김현옥, #한성부개조사업, #조선시가지계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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