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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경력의 집배원 원모씨는 자신의 일터인 안양우체국 앞에서 지난 6일 분신했다.
 21년 경력의 집배원 원모씨는 자신의 일터인 안양우체국 앞에서 지난 6일 분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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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전 11시, 안양우체국 정문 계단에서 한 집배원이 분신했다. 21년 경력의 정규직 공무원인 원아무개씨, 그는 500㎖ 음료수병에 인화성물질을 담아와 그대로 몸에 붓고 불을 붙였다. 우체국 내에 있던 직원들이 이를 발견하고 몸에 붙은 불을 껐으나, 전신에 화상을 입은 원씨는 지난 8일 끝내 사망했다.

원씨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씨의 죽음에 대해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부인과 두 딸, 초등학생 막내 아들은 갑작스런 가장의 죽음 앞에 충격에 빠져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원씨의 우체국 동료들만 조심스레 평소 원씨가 했던 말과 행동을 근거로 추론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건 원씨가 분신하기 전 자신의 배달구역 지역주민들을 찾아가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는 사실이다. 우체국 동료들은 "원씨가 평소 업무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휴가 중 분신한 21년 경력의 정규직 공무원

21년 경력의 집배원 원모씨가 지난 6일 분신했다. 이틀 뒤 그는 가족 곁을 떠났다. 그의 유골은 안양 청계공원묘지에 모셔졌다.
 21년 경력의 집배원 원모씨가 지난 6일 분신했다. 이틀 뒤 그는 가족 곁을 떠났다. 그의 유골은 안양 청계공원묘지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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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씨의 유골은 지난 10일 경기도 의왕시 안양청계공원묘지에 모셔졌다. 하루종일 폭우가 쏟아진 탓에 원씨가 잠든 무덤은 쉬이 다져지지 않았다. 표지석 없이 만들어진 무덤엔 평평한 대리석 하나만 올려져 이곳이 원씨의 무덤임을 알렸다.

공원묘지 관리자는 "정오 무렵 가족들과 지인들이 와서 고인을 모시고 갔다"며 "우체부 아저씨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분신까지 했겠냐"고 안타까워했다. 원씨의 무덤 앞엔 지인이 두고 간 담배 한 개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원인조차 불명확한 분신자살, 원씨가 소속됐던 우정사업본부 노조는 자체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우정노조 산업안전본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현장실태 조사팀이 구성 돼 11일부터 이틀간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정노조의 한 조사 위원은 "휴가 중 직장에서 분신한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며 "일을 하면서 발생한 원인이 있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지난 6일 분신한 원모씨가 생전에 맡았던 구역, 안양 지역 재건축 아파트 '메가XXX'
 지난 6일 분신한 원모씨가 생전에 맡았던 구역, 안양 지역 재건축 아파트 '메가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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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위원의 말대로 원씨는 휴가 중에 직장까지 찾아와 분신을 했다. 안양우체국에서 원씨와 가깝게 지낸 한 동료는 "그가 최근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원씨가 속한 팀은 재개발로 인해 담당구역이 확대되자 팀원 간 구역 조정을 했다. 원씨는 기존에 맡던 구역을 재조정하는 수준이 아닌 완전히 다른 구역으로 재배치됐다. 3일 정도 동료와 함께 견습을 다녔다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원씨는 휴일에도 담당구역 지리를 익히기 위해 새로 맡은 구역을 돌며 손수 지도를 그렸다. 하지만 '메가'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거대한 원씨의 새 구역은 그가 아무리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도 항상 무리가 발생했다.

원씨가 맡은 새 구역은 4000세대 이상의 아파트 대단지였다. 기존의 마을을 허물고 대기업이 공사를 맡아 생긴 아파트 단지다. 실제로 원씨가 소속된 안양우체국의 업무량은 신도시가 몰려 업무가 많다는 경인청 평균보다 상당히 과한 편이다. 원씨의 한 동료는 "집배원들의 업무가 많은 것은 다 아는 사실 아니었냐"며 "안양은 그중에서도 특히 바쁜 곳 중 하나"라고 밝혔다.

기자 역시 이를 체감했다. 원씨의 동료와 접촉하기 위해 오전과 정오, 업무가 끝났다고 판단된 오후 8시까지 십여차례 이상 통화를 시도했지만 때마다 들려온 답은 "업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밤 9시가 지나서야 겨우 통화가 된 원씨의 동료는 "하루에 13시간 이상은 기본으로 일을 한다"며 "새벽부터 출근해 업무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안양우체국 "우리도 슬프다"

안양우체국 소속의 한 집배원이 지난 10일 우중에 업무를 보고 있다.
 안양우체국 소속의 한 집배원이 지난 10일 우중에 업무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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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우체국 측은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지난 10일 현장에서 만난 안양우체국 관계자는 원씨의 죽음에 대해 "저희도 같은 동료였다"며 "충분히 슬픈 상황"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공식적인 입장은 향후 우정사업본부를 통해 발표하겠다"고 덧붙였다.

우정사업본부의 태도 역시 매우 미온적이다. 우정사업본부는 "원씨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할 것이냐?"는 질문에 "일단 경찰 조사를 기다리고 있다"며 "(안양우체국) 내부에서 보고된 내용 밖에 파악이 안 된 상태"라고 밝혔다.

그러나 원씨의 죽음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엔 하나같이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있다. 특히 일부 동료들은 자신들도 언제 어디서 이런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내비치며 "원씨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원씨의 죽음에 대해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개인적인 사유에 의한 우발적인 사망'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유서조차 남기지 못한 원씨의 죽음은 올해 발생한 12건의 집배원 사망사고 중 다섯 번째 '자살'로 기록되게 됐다.

지난 10일 전국집배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청운동주민센터 앞에 모여 집배노동자의 사망을 규탄하는 집회를 했다.
 지난 10일 전국집배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청운동주민센터 앞에 모여 집배노동자의 사망을 규탄하는 집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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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안양우체국, #우정사업본부, #집배원,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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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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