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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6퀴어문화축제 때 모습.
 지난 2016년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6퀴어문화축제 때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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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 신촌, 그곳에서 처음 당신을 보았습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축제의 한편에서 당신은 누군가의 존재를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었죠. 나는 당신과 비슷한 사람들의 모습을 외국의 사진에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없진 않았지만 그 마음을 들키는 게 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당신들을 배경으로 손으론 브이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죠.

처음 저에게 당신들은 그저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환영받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왔을까. 하지만 저녁이 되자 그 의구심은 분노로 뒤바뀌었습니다. 당신들은 도로에 누워 우리의 행진을 막았지요. 처음에는 그저 해프닝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1년에 한 번 뿐인 우리의 행사를 왜 망치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5년에도 2016년에도 여름이면 나는 당신을 만났습니다. 해가 가면 갈수록 당신은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했고 더 큰 스피커를 가지고 왔죠. 경찰들은 그런 당신과 우리를 분리 시키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쳤고, 잠시 더위를 식히러 카페에 갈 때가 아니면 나는 당신을 마주할 일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안정감이 느껴졌지만 가까운 거리도 둘러서 가길 반복하자 점차 짜증이 났습니다. 그때의 당신은 제게 그런 존재였죠.

그러다 그해 6월에는 올란도의 게이 클럽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애도의 감정과 동시에 공포심이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축제에 난입하려던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일을 겪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하는 불안함을 느꼈습니다.

나는 당신이 안타깝습니다

지난 2016년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6퀴어문화축제 때 모습.
 지난 2016년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6퀴어문화축제 때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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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1년에 한 번씩은 꼭 마주쳤습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감정은 기이함에서 분노로 다시 두려움으로 번져 나갔죠. 물론 그 아래에 깔린 주된 정서는 짜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나는 당신이 싫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대구퀴어문화축제에 참여했을 때 나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습니다.

행진이 시작되고 도로 위를 춤을 추며 걸을 때 당신들은 그 옆에 일렬로 서서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었죠. 날씨는 무더웠고 퍼레이드 코스는 만만치 않게 길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쉬지 않고 춤을 췄습니다. 물론 즐거워서 그랬기도 했지만 늘어지고 지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즐겁고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이기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무표정한 얼굴로 무릎을 까닥이는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트럭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서요. 그제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무더운 날씨에 가만히 서서 피켓을 들고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구나. 끔찍하게 지루한 일일 수도 있겠구나. 오죽하면 반대하는 행사의 행진 트럭에서 나오는 음악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흔들고 있었을까.

처음으로 당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씁쓸했습니다. 이 더운날 세상 행복한 사람들 옆에서 꼭 그러고 있을 필요는 없는데. '혐오 세력'이라는 이름과 달리 당신들은 우리를 사랑하고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시위를 한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정말로 구해져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를 놀라게 한 당신의 한 마디

지난 2016년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6퀴어문화축제 때 모습.
 지난 2016년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6퀴어문화축제 때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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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우리는 오랜 시간 함께 의자에 앉아 있던 적도 있습니다. 2015년 퀴어문화축제를 앞둔 여름이었죠. 당신은 우리의 행진을 부득불 막겠다며 집회 신고를 앞둔 며칠 전부터 남대문 경찰서 앞에 앉아 있었죠. 이에 질세라 우리도 그 다음 순번으로 진을 치고 앉아 있었습니다. 달아 오르는 여름이었지만 더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과 그토록 가까이서 오랜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역시나 무섭기도 하고 짜증도 났습니다. 갑자기 나를 해코지 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고 왜 남까지 사서 고생을 하게 만드나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무리들 중의 하나가 당신에게 염려를 건넸습니다. 돌아가며 쉬엄쉬엄 자리를 지켰던 우리와 달리 당신은 몇 시간째 의자에 붙박이처럼 심지어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앉아 있었으니까요.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받은 당신은 그때서야 다음 차례로 오기로 한 목사가 오지 않고 있다며, 이 더운날 너무한 거 아니냐고 입을 열었습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당신의 입에서 그런 인간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신도 사람인데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으리라 나는 생각했을까. 어쩌다 당신은 나에게 이상함과 분노, 공포 그 이상의 존재가 되지 못했을까. 좋은 일만 하기도 짧은 인생에 왜 우리는 고작 이런 관계나 맺어야 할까.

당신의 피켓은 무슨 색인가요

지난 2016년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6퀴어문화축제 때 모습.
 지난 2016년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6퀴어문화축제 때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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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무릎은 흔들던 당신, 그 여름 남대문 경찰서 앞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오지 않던 목사를 향해 불평을 터트리던 당신, 그런 당신이 이제 나에겐 지루함도 느끼고 더위에 힘들어하고 약속을 어긴 동료에게 미움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미움과 혐오 뿐이 아니라 다른 감정이 들어설 여지가 있다면 퀴어문화축제의 현장에서도 충분히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증오를 내려 놓는 것은 어떨까요. 축제가 주는 해방감과 즐거움, 행복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어떨까요.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여섯 색 무지개 깃발은 원래 여덟가지의 색을 담고 있었습니다. 각각의 색이 상징하는 바가 있었고 퀴어문화축제는 그 의미가 충만한 현장이었죠. 우리는 각자의 섹슈얼리티(Sexuality)를 자유롭게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생(Life)의 충만함을 느꼈고 강렬한 햇빛(Sunlight) 아래에서 치유(Healing)의 경험을 했습니다. 초록색 잔디 위에서 발을 구를 때 자연(Nature)의 아름다움을 느꼈고 재주 넘치는 이들의 공연은 마술처럼 다가왔습니다(Magic/Art). 다양한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평온하고 조화롭게 어울렸으며(Serenity/Harmony)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긍심의 정신(Spirit)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렇게 축제 속에서 우리는 무지개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당신이 든 혐오 피켓 속에는 이 여덟 가지 중 어떤 색도 자리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 피켓을 내려 놓으세요. 혐오와 증오를 던져 버리세요. 그래서 세워진 바리케이트를 무너뜨리세요. 축제의 현장으로 건너오세요. 광장은 넓고 우리에겐 시원한 음료수도 있답니다. 춤을 추세요. 노래하세요.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미워하고 부정하지 말고 긍정하고 축복하세요. 지금 건넨 이 손을 언젠가 당신이 맞잡을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태그:#퀴어문화축제, #성소수자, #혐오,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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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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