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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고려 초기 실권자 천추태후를 닮아 가고 있다.

두테르테는 도널드 트럼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 또 현재까지 7천 명 이상의 마약범 용의자를 현장에서 사살했다. 경찰과 자경단의 손을 빌려 그렇게 했다. 7월 1일 열린 남부 다바오델수르주 설립 50주년 기념사에서는 "필리핀을 파괴하지 말라"며 "왜냐면 내가 진짜 죽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 뒤 허리에 찬 권총을 보여주였다. 대통령치고는 꽤 특이한 인물이다.

두테르테가 천추태후를 닮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두테르테' 하면 '막말'이나 '마약범 처벌'이 떠오르지만, 그가 벌이는 또 다른 중대한 작업이 있다. 바로 그 점이 천추태후를 닮았다.

태조 왕건의 손녀인 천추태후는 왕실 근친혼 풍습에 따라 사촌오빠인 경종 임금과 결혼해 목종 임금을 낳았다. 997년 아들 목종이 18세 나이로 왕이 되자, 천추태후는 섭정 자격으로 실권을 잡았다. 그 뒤 아들에게 왕권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목종시대 12년간은 사실은 천추태후 시대 12년간이었다.

그의 국정 운영은 강력하고도 진보적이었다. 호족이라 불리는 귀족세력을 압박했다. 당시의 귀족은 노비와 토지를 대거 보유하고 나라 경제를 주물럭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재벌에 상응했다. 그런 귀족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편 것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신진 세력을 많이 늘렸다. 그는 과거 급제자의 정원을 증가시켰다. 신진 세력의 활로를 뚫어줄 목적이었다. 하지만, 보수 세력을 위축시키는 이런 조치는 훌륭하지만 위험했다. 고려판 보수 종편 언론이 있었다면, 패널들이 온종일 침 튀기며 천추태후를 욕했을 것이다. 

천추태후는 다소 엉뚱한 면도 있었다. 정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차기 임금으로 추대할 계획까지 추진했다. 왕건의 손녀인 천추태후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이므로 왕씨 가문의 양자로 입적되면 정통성의 하자가 어느 정도는 치유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리수가 동반되는 일이었다.

드라마 <천추태후>.
 드라마 <천추태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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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위험한' 균형자 외교 추진한 천추태후

이런 가운데, 천추태후는 대외관계에서 대담한 면모를 발휘했다. 외교상의 실리를 얻을 목적으로 다소 위험해 보이는 균형자 외교를 추진했다.

천추태후의 집권 기간은 고려와 거란족 요나라의 제1차 전쟁과 제2차 전쟁 사이에 있었다. 제1차는 993년 발발하고, 제2차는 1010년 발발했다. 제1차 때 활약한 인물이 서희다. 강감찬은 제3차 때인 1018년에 활약했다. 천추태후의 집권은 1차 전쟁 4년 뒤에 시작해 2차 전쟁 직전에 끝났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에는 요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천추태후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과도기 때 집권했다. 송나라(북송)에서 요나라로 패권이 넘어가는 시기에 권력을 잡았다. 그가 집권한 시점은 고려가 사대관계의 상대방을 송나라(북송)에서 요나라로 바꾼 직후였다.

제1차 전쟁 때 고려는 서희의 활약에 힘입어 '압록강 이남 강동 6주의 여진족 거주지를 고려가 점령하는 것에 대해 요나라가 이의를 걸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요나라를 상국 혹은 황제국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993년). 이렇게 해서 고려의 동맹국이 바뀐 뒤인 997년 천추태후가 권력을 획득했다.

997년 시점에는 송나라가 요나라보다 약간 우위에 있었다. 요나라의 우세로 확실히 전환한 시점은 7년 뒤인 1004년이다. 그래서 요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는 있지만 아직은 북송이 좀더 강한 상황을 천추태후는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어느 한쪽에 완전히 기울기보다는 양쪽을 적절히 저울질하는 쪽으로 외교노선을 정했다. 99년, 그는 송나라에 사신단을 파견해 국교 재개를 희망했다. 요나라를 견제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송나라가 수락함에 따라 고려와 송의 관계는 회복됐다.

관계가 복구되자 천추태후는 요나라에 대한 합동 공격을 제안했다. 송나라는 거절했다. 그러자 천추태후는 999년 그 해에 요나라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했다. 사대관계의 상대방을 다시 요나라로 바꾼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목민과의 동맹을 강화한 때는 안보 외교를 우선시한 시기이고, 중국 한족와의 동맹을 강화한 때는 경제 외교를 우선시한 시기다. 천추태후는 안보 외교에서 경제 외교로 돌아섰다가 다시 안보 외교로 선회했다. 999년에 요나라와의 동맹을 재개한 것은 안보 외교로 돌아선다는 신호였다. 경제적 이익과 안보상 이익을 적절히 안배하는 방향으로 외교관계를 수행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판단은 아주 적절했다. 5년 뒤인 1004년, 요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해 항복 조약을 받아냈다. 전연지맹(澶淵之盟)이라 불리는 이 조약에서, 송나라는 16개 주에 걸친 영토를 할양하고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조공하기로 합의했다. 중국 한족이 치욕을 겪은 것이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천추태후는 요나라와의 동맹관계를 복구하고 이를 안정시켜 두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집권기간 동안 요나라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그가 요나라를 공격하려고 시도한 적은 있어도, 침략은 받지 않았다. 이렇게 천추태후는 강대국 사이를 왔다 가다 하며 외부 침략을 방지하고 실리를 챙기는 데 주력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로드리고 두테르테.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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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기' 식으로 이익 주워담는 두테르테

두테르테는 남중국해 문제로 대(對)중국 관계가 악화되던 2016년 6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집안은 중국계 이민 가정이다. 그래서 취임 전부터, 그가 친중국 노선을 강화하지 않을까 예측이 많았다.

취임 직후에는 그런 예측이 실현되는 듯했다. 2016년 9월에 두테르테는 라오스 아세안정상회의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지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바마가 회담 중에 인권문제를 제기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정상회담을 취소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미국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1986년 필리핀 시민혁명 뒤에 증폭된 반미운동의 결과로, 1992년 미군이 필리핀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남중국해 분쟁과 국내 반란세력을 걱정한 필리핀은 1999년에 미국과 방문군 협정을 체결해서, 미군이 합동군사훈련을 목적으로 필리핀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미군을 필리핀에 다시 주둔시키기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아직 미군이 주둔한 것은 아니지만, 이 조약의 이행을 위한 준비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두테르테는 2014년의 약속이 폐기될 수 있다고 미국에 경고했다. 오바마와의 정상회담을 폐기하던 시점에 그런 경고 메시지도 보냈다.

이런 점만 놓고 보면, 두테르테가 친중국 노선으로 기울었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에서 그가 보여준 행보를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두테르테는 남중국해 분쟁에 관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중재 절차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중재 절차는, 필리핀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 있는 스카보로 암초를 2003년에 중국 함선이 점거함으로 인해 시작했다. 그리고 두테르테의 취임 직후인 2016년 7월 12일, PCA는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부정했다. 이런 중재 결정으로 필리핀의 입지가 유리해졌다. 

남중국해 분쟁은 필리핀과 중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중국과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중·미 사이의 동아시아 패권 경쟁과도 연계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두테르테는 남중국해에 대한 자국의 권리를 굳히기보다는, 이를 이용해 중국과 미국 사이를 오가며 실리를 한껏 챙기고 있다.

2016년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두테르테는 베이징의 시진핑을 방문해 240억 달러의 경제협력 약속을 받아냈다. 그에 대한 대가로 두테르테는 '남중국해 분쟁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양국간 협상으로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세계적 분쟁으로 비화시키지 않겠다는 확신을 베이징에 심어준 것이다.

하지만 시진핑과 헤어진 지 며칠 뒤인 10월 25일 그는 "PCA의 중재 결정이 구속력이 있다"는 발언을 해서 중국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10월 말에 중국은 분쟁 지역인 스카로보 암초 주변에서 필리핀 어선이 조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0월 25일의 발언으로 필리핀이 추가적인 소득을 거둔 것이다. 남중국해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는 중국 지도부의 애타는 심리를 이용해 실리를 챙긴 것이다.

그런데 두테르테는 남중국해 문제를 빌미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도 실리를 챙기고 있다. 중국 방문을 끝낸 지 4일 뒤인 2016년 10월 26일이었다. 이 날 그는 아베 총리를 방문해 경제적 실익을 챙겨냈다.

두테르테는 일본으로부터 대형 순시선 2척을 공여받고 해상자위대 연습기 TC 90을 대여받았다. 또 농업개발을 위한 50억엔 차관을 빌려주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남중국해 문제로 중국이 팽창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일본의 심리를 활용해 경제·안보상의 이익을 모두 얻어낸 것이다. 막말을 쉼없이 내뱉고 마약사범들을 가차없이 처벌해 독재자 인상을 풍기면서도, 강대국들 사이를 오가며 실리를 살뜰하게 챙기는 살림꾼 행보까지 벌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동아시아 각국 지도자들은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힘의 팽창을 추진했다. 김정은은 핵실험과 ICBM 발사로 세계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시진핑은 미국을 명확히 거역하지는 않지만 남중국해나 무역문제 등을 통해 미국을 살살 건드리고 있다. 아베는 평화헌법 개정 및 군사대국화 추진으로 인해 이웃나라들과 갈등을 빚으며 영향력 팽창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동아시아 특히 동북아 각국이 분주하게 뛰는 틈을 활용해, 두테르테는 눈에 얼른 안 띄는 방법으로 이익을 챙기고 있다. 그 옛날 고려 천추태후처럼 중국과 미국, 중국과 일본 사이에 살짝 끼어들어 경제·안보상의 실리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남북한·중국·미국·러시아·일본이 뒤엉켜 갈등하는 외교구도에 끼어들어 이삭줍기 식으로 이익을 주워 담고 있는 것이다.


태그:#두테르테, #천추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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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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