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물거리고 능글맞은 박열(이제훈 분)과 후미코(최희서 분)는 이상하리만큼 시종일관 유쾌한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칭하는 그들은,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비장함과는 거리가 멀다. 다테마스 판사(김준한 분)가 구태여 받지 않겠다고 하는 정신감정을 받게 하려고 하는 부분에는, 도저히 범인의 생각으론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기이함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박열>은, 그렇게 1920년 식민지인의 비극을 다룬다.

단순한 이방인이 아닌 식민지인으로서의 삶이 호락호락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조망되는 그들의 삶은, 빈곤한 하층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무시받고 천대받으며, 괜시리 모여있다는 이유만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는 이들. 스무 살 언저리의 청춘들의 대화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것과 같은 꿈과 희망의 언어가 배제돼 있다. 민족의 배신자를 어떻게 린치할 것인가, 가난한 아나키스트 '동지'들에게 후원금을 계속해서 받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같은, 우울함에 희끗할 것 같은 화제들만 부유한다. 확고한 이념과 신념을 가진 열혈 지사(志士)이기엔 너무나도 청년인 그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이 가진 뜻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그려진다.

거리에서 감옥으로, 법정에서 다시 감옥으로 이어지는 플롯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하고 건조하기에 영화적 역동성의 측면에선 한계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폭탄조차 가지지 못한 채 테러를 시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시대를 조망한 영화는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김상옥이 보여줬던 화려한 비장미의 '스펙타클'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영화 <박열>은, 그럼에도 '정적'인 영화하고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최소화된 움직임과 대사들을 통해 훨씬 더 '동적'이고 극적인 시대의 표정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하나의 고착화된 이미지로써의 시대가 아닌, 웃고 울고 서로 사랑하고 떠들며 함께 모여 열혈분투했던, 고정된 '애국지사'이자 '아나키스트'이기 이전의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시도하는 것이다. 과잉도 과장도 없이, 담백하고 발랄하게 말이다.

영화 <박열>은 그런 의미에서 감독 이준익의 전작 <동주>와는 같은 듯 다른 영화다. 표상으로서의 "영웅"이 아닌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표현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흑백 사진 속 동주가 의지와 결의에 찬 유리와도 같은 청년이었다면, 살아 움직이는 박열은 한시라도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어 들쑤시는 야생의 들개와도 같이 그려진다. 오히려 박열보다 더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후미코나, 왠지 모를 청년 시절 특유의 '찌질함'마저 느껴지지만 그렇기에 더욱 인간적인 '불령사' 동지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악랄한 절대악이기엔 많이 모자라 보이게 그려진 일제에 대한 묘사는, 웃음으로 승화된 가장 신랄한 평가다.

시작도 끝도 인간 군상인 영화. 밋밋하지만, 절대로 건조롭진 않은 영화. <박열>은 완벽한 영화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박열'과 그의 시대에 대해서는 가장 인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담아내는데에는 성공했다. 비극은 희극처럼 그려졌지만, 그렇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실화가 배경이기에, 더더욱.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석구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darchi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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