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킬 미 나우>의 프레스콜 지난 5월,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한 연극 <킬 미 나우>의 프레스콜 당시 사진. 연극 <킬 미 나우>는 지체장애인 조이 스터디와 조이를 위해 작가의 길도 포기하고 헌신하는 아버지 제이크 스터디의 이야기를 다뤘다. 장애인과 성 그리고 안락사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지는 극이다.

▲ 연극 <킬 미 나우> 단체 사진 지난 5월 4일,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한 연극 <킬 미 나우>의 프레스콜 당시 단체 사진. 연극 <킬 미 나우>는 지체장애인 조이 스터디와 조이를 위해 작가의 길도 포기하고 헌신하는 아버지 제이크 스터디의 이야기를 다뤘다. 장애인과 성 그리고 안락사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지는 극이다. 가운데 'V'자를 하고 있는 게 작가 지이선이다. ⓒ 곽우신


아이러니하게도, 좋지 않은 인터뷰가 오히려 훨씬 쓰기 쉽다. 안 좋은 대부분을 버리고, 살릴 수 있을 만한 약간의 부분들만 재가공하면 된다. 반면, 좋은 인터뷰는 쓰기가 어렵다. 버릴 곳 하나 없이 극상의 품질로 올라온 재료, 예컨대 참치를 보는 느낌이다. 나가야 할 요리는 1인분, 욕심을 부린다고 부려 보아도 곱빼기가 한계이다. 그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손님 한 분께 내어드릴 수는 없다. 그러면 이제부터 눈물을 흘리며 취사선택이다.

지이선 작가와의 인터뷰가 딱 이런 경우였다. 지난 2일 오후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1시간 조금 넘지 않을까 생각했던 인터뷰는 1시간 30분을 넘겨서 그것도 기자의 다음 일정 때문에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주말에 연락이 왔다. 답변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다고, 그 캐릭터를 아끼는 마음에 비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 것 같다고 말이다. 그래서 5일 늦은 오후, 공연이 끝난 후 간단하게 맥주를 곁들이며 이야기를 또 나눴다. 그것이 2시간. 지이선 작가는 본인의 다른 작품인 연극 <모범생들>의 술자리로 이동해야 한다며 자리를 옮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연극 <프라이드>가 이번 주말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연극 <킬 미 나우>는 오는 7월 16일까지 고작 2주 남짓 남았다. 1등급 재료를 눈앞에 두고 당황스러워한 2등급 요리사. 그의 어설프고 부끄러운 요리를 이제야 독자들 앞에 내놓는다.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고통

연극 <모범생들> 프레스콜 서울 드림아트센터 4관에서 개막한 연극 <모범생들>의 프레스콜 사진.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의 첫 만남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대림외국어고등학교 독문과 A반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그렸다. '엘리트들의 백색 누아르'를 표방하는 이 작품은 학벌주의 사회와 성공제일주의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생각에 잠긴 지이선 지난 8일, 서울 드림아트센터 4관에서 개막한 연극 <모범생들>의 프레스콜에서 지이선 작가가 기자들의 질문을 들으며 고심하고 있다. '엘리트들의 백색 누아르'를 표방하는 이 작품은 학벌주의 사회와 성공제일주의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지이선 작가는 항상 자신의 문제의식을 극에 녹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 곽우신


어떤 관객은 "지이선은 역시 지이선" "지이선답다"라고 엄지를 추켜세우고 누구는 "역시 나는 지이선하고 안 맞는 것 같아"라고 고개를 젓는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건, 그에게 확실한 스타일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지이선'다운', 지이선의 스타일. 그렇기에 지이선이라는 이름 자체가 곧 하나의 브랜드이자, 극의 간판이자, 관객의 선택 기준이 된다. 이름 자체가 브랜드화된 연출은 몇몇 있지만, 작가의 이름을 보고 관객이 찾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배우 신성민은 지이선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자 "제가 감히..."라며 말을 아꼈다. 물론 이 말을 전하니 지 작가는 "그거 저 (물) 먹이려고 한 거예요!"라며 겸양과 위트를 섞어 부정했다.

하지만 지이선이 유능한 작가라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확실히 지이선 작가는 대학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이다. 2017년 6월 한 달만 생각해도 각색으로 참여했던 <프라이드>와 <킬 미 나우>가 호연 중이고, 김태형 연출과의 첫 호흡이자 올해 10주년을 맞은 <모범생들>도 개막하여 관객몰이에 들어갔으며, 관객참여형 실험극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가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정작 지이선에게 글을 쓰는 것은 '고통'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계속 감내하고 있다. 왜 글을 쓰는 것은 고통이고, 그런데도 글을 쓰는 것일까.

"행복이란 경험을 한 지 되게 오래된 것 같아요.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웃음) 한 1년 동안 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음…. <프라이드> 실비아들과 함께 자리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 날 굉장히 즐거웠었어요. 동료들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거기서 영감을 받았어요. 사실 저는 글 쓰는 거 진짜 싫어해요. 글을 쓰면서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요. 항상 아프고 힘들어요. 작가의 말도 쓸 때마다 고생하고…. 아무도 대신 써 주지 않고, 오롯이 혼자서 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감이 생기면 해 보고 싶은 이유는…. 공연이니까요. 연극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 거겠죠.

이전 시즌 <모범생들> 할 때 처음으로 느꼈었는데, 봉투가 툭 떨어지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갑자기 관객들이 모두 궁금해하면서 바닥을 보는 거예요. 그 순간에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공연과 관객이 함께 딱 모이는 느낌. 만지면 잡힐 것 같더라고요, 그 접점이. 그때 '공연이 이런 거구나'라는 느낌을 받고, 다음부터는 그곳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아요. 그 순간의 신성함이 있어요.

공연은 만드는 사람들로 인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관객들과 함께 완성해 가는 거죠. 관객분들의 상상력이 공연에 보태지고, 저는 그 안에서 숨 쉬는 사람이고. 이런 관객분들의 상상력이 저를 항상 아쉽지 않게 해주십니다.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항상 느껴요.

물론 공연 무대의 한계는 항상 있죠. 예를 들어 <킬 미 나우>에서 오리가 물 위에 둥실둥실 떠가는 걸 좀 보여주고 싶다든가, 물이 막 넘친다든가, 환상 장면에서 세트가 붕 떴으면 좋겠다든가…. (웃음) 그런데 이런 것들을 연극적인 상상력으로 생각하잖아요. 만약 <프라이드>를 영화로 찍는다고 생각해 봐요. 일단 런던까지 가야 하죠. 세트도 다 만들어야 하고. 그런데 연극 관객들은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나와서 말해도 실비아라고 믿어 주잖아요. 한 번의 암전으로 다들 극 속에 들어와 주시고.

그게 마법이죠. 다들 그 마법 때문에 못 벗어나는 게 아닐까요. 그게 연극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인 것 같고, 그래서 공연이 진짜 무서운 것 같아요."

각색의 어려움

배수빈 제이크와 윤나무 조이 지난 2016년 연극 <킬 미 나우>에 출연했던 배우 배수빈과 윤나무의 스튜디오 이미지 컷. 지이선 작가는 <킬 미 나우>와 <프라이드> 모두에서 배수빈을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한다. 배수빈 배우는 <킬 미 나우>에서 고무 오리를 보고 "사실은 내가 더 좋아했어"라는 대사를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그 대사 하려고 나 이거(제이크) 하는 거야"라고 할 정도로. 지이선이 만든 부분은 관객뿐만 아니라 배우도 좋아하낟.

▲ 배수빈 제이크와 윤나무 조이 지난 2016년 연극 <킬 미 나우>에 출연했던 배우 배수빈과 윤나무의 스튜디오 이미지 컷. 지이선 작가는 <킬 미 나우>와 <프라이드> 모두에서 배수빈을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한다. 배수빈 배우는 <킬 미 나우>에서 고무 오리를 보고 "사실은 내가 더 좋아했어"라는 대사를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그 대사 하려고 나 이거(제이크) 하는 거야"라고 할 정도로. 지이선이 만든 부분은 관객뿐만 아니라 배우도 좋아한다. ⓒ 연극열전


연극은 마법이다. 그 마법의 힘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도 어쨌든 지이선은 펜을 움켜잡고 있다. 관객과 창작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마법. 그래서 지이선은 관객들을 '동반자'로 여기고 있단다. 그리고 그 동반자들 덕분에 지이선은 지이선으로 존재할 수 있다. 자연인 박지선은 그렇게 작가 지이선이 되고, 그 마법으로 가득 찬 공간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다. 지이선이 지이선으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존중받는 것. 연극 <킬 미 나우>와 <프라이드>를 관통하는 주제, 아니 어쩌면 연극이라는 무대를 아우르는 주제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

"이 일을 제가 얼마나 오래 할지 잘 모르겠어요. 세상은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저 역시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무도 저를 찾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무섭기도 하고…. 그래서 요즘은 그냥 이 일을 최대한 오래, 즐겁게 하고 싶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계속 생기기만을 바랄 뿐이고요. 1년에 한두 개씩이라도 새로운 작품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궁극적으로'라고 생각할 때, 내가 '나라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건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고,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거잖아요.

<킬 미 나우>와 <프라이드> 둘 다 사실 작가의 얘기예요. <프라이드>에서는 올리버가 왜 동화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지가 중요하거든요. 그 사람들이 완성시키지 못한 이야기를 이 작품이 가져가고 있거든요. <킬 미 나우>는 작가가 쓰지 못 한 글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죠. 더 이상 작가가 될 수 없는 제이크의 아득함 그리고 간절함이 저의 마음에 와 닿았어요. <킬 미 나우>의 마지막은 제이크의 서문으로 완성되거든요. '만약 제이크가 작가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 작품을 맡았을까'라는 생각도 해요. 그래서 제가 낭독 장면을 넣었어요. 인간의 존엄이라는 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거고, 아빠 제이크의 정체성은 작가로 완성되기 때문에."

연극 <킬 미 나우>와 <프라이드>는 모두 원작이 있는 라이선스 작품이다. 라이선스 작품을 한국에 가지고 오면서 번역과 각색 작업은 필수다. 지이선은 모두 이 작품의 '각색' 작가이다. 창작보다 받는 페이는 훨씬 적지만, 각색에 드는 품은 창작이나 진배없다. 지이선은 번역가와 함께 원문과 번역 대본을 펴놓고 한 문장 한 문장씩 밑줄 그어가며 확인한다. 더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더 전달력 높은 뉘앙스를 위해 고민한다. 그리고 새로운 요소들을 만들어 집어넣는다. 어떨 때는 재창작 수준으로 고심하기도 한다. 이렇게 힘들 줄 알면서도, 굳이 각색으로서 이 작품들을 대학로로 가져왔다.

"자꾸 어려운 작품이 들어오더라고요. (웃음) 각색을 안 해도 될 것 같은 작품도 있고, 굳이 제가 안 해도 될 것 같은 작품도 있어요. 그런데 하고 싶다고 마음이 움직이는 작품들은 항상 이렇게 힘든 것들뿐…. (웃음) 그래도 제가 워낙 관심이 많으니까요. 소수자 얘기라는 측면이 마음을 움직였어요. 원작을 보니까 해야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작품들이었죠. <프라이드>도, <킬 미 나우>도 저에게 큰 역할을 했어요. 아마 두 작품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지이선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겠죠. 저도 예전에는 소수자 문제에 굉장히 둔감했었거든요. 저 스스로 고민이 많았을 때 이 작품들에 도움을 받았고, 그 이후로 글 쓰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달라졌어요.

<프라이드>는 서정적으로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1958년과 2017년을 관통하는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언어에 더 집착했죠. <킬 미 나우>는 이 이야기를 관객들이 끝까지 보게 하는 것이 제 목표였어요. 지금은 공연계에 성 소수자라든지, 여러 종류의 소수자 서사가 많이 나오고 있는 편이긴 하죠. 하지만 처음 이 작품들을 소개할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거든요. <킬 미 나우> 같은 경우는 불륜, 장애인, 성뿐만 아니라 매춘이라든지 가족이라는 집단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더 어려웠죠. 하지만 <킬 미 나우>가 '아 저 사람 너무 힘들겠다'에서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프라이드>보다 <킬 미 나우>가 굉장히 적극적인 각색이 들어갔어요. 없는 장면을 집어넣었고, 새로 쓴 대사도 많아요. 작가의 서문, 오리, 춤…. 트와일라와 라우디의 대화도 추가한 것이 많고…. 욕조 장면 직전에 환상-졸업식 장면까지도 완전히 새로 쓴 거예요. 원작은 '드라이'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맥락이 없는 장면도 많아요. 새로운 장면들을 써서 넣었던 이유는 원작에 있는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지점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예요. 욕조 장면 세 개를 없애지 않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그런 장치들을 집어넣게 되었어요.

연극열전에 참 고마워요. <킬 미 나우>를 갖고 오는 거에 고민이 많을 때 제가 직접 설득했어요. '저 믿고 가 보자'고. 그런데 제 것이 아니어서 항상 좀 조심스럽거든요. 제가 동성애자가 아니어서, 그리고 제가 비장애인이어서, 이 작품을 제가 조금의 차별이나 편견을 갖고 접근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실 마음이 좀 불편해요. 정말로 퀴어 분들이, 장애인 분들이, 안락사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 보았을 때 이 장면들이 폭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을지 항상 고민하게 됩니다."

지이선의 욕심

연극 <킬 미 나우>의 프레스콜 지난 5월,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한 연극 <킬 미 나우>의 프레스콜 당시 사진. 연극 <킬 미 나우>는 지체장애인 조이 스터디와 조이를 위해 작가의 길도 포기하고 헌신하는 아버지 제이크 스터디의 이야기를 다뤘다. 장애인과 성 그리고 안락사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지는 극이다.

▲ 환상 속의 조이와 제이크 조이가 아프지 않았다면, 제이크가 아프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작품 속 '고무 오리'는 매우 중요한 오브제이다. 그리고 지이선의 각색작이 대개 그렇듯, 이 고무 오리는 원작에 없는 오브제이다. <킬 미 나우>를 좋아하는 관객은, 저 오리만 봐도 눈물을 쏟게 된다. ⓒ 곽우신


지금, 여기의 맥락에서 작품이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예컨대 <킬 미 나우>를 대표하는 오브제인 오리도, <프라이드>의 명대사로 꼽히는 문장 속 돌고래도 모두 지이선의 작품이다. 관객은 분명 지이선의 그런 노력을 그리고 작품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오리'나 '돌고래'가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면서 웃음 짓고 또 감사해 하는 걸 보면, 그런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는 관객에게, 지이선은 무척 고마워하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일이 커질지 몰랐어요. (웃음) <킬 미 나우>는 우리의 일상과 멀어 보일 수도 있거든요. '이런 얘기일수록 나랑 최대한 가까운 거리, 내가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아이를 키우지 않아도 익숙한 소품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오리를 찾게 되었죠. 고무 오리하고 작가의 서문에 대해 동시에 생각이 났어요. <킬 미 나우> 각색을 처음 할 때, 작가의 서문부터 쓰고 시작을 했거든요. 저는 아기를 키워 본 적은 없지만. 아기가 있는 친구들의 집에 가 보면 항상 오리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그걸 밟았을 때 나는 소리가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고장 난 오리가 내는 '쉭쉭' 소리가 인상 깊었는데, 마치 제이크의 발작 소리와도 같지 않을까 했어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아이였을 때의 기억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오브제가 오리예요. 그리고 '미운 오리 새끼'라는 게 원작에는 없어요. 사실 고무 오리가 완성된 어른 오리가 아니라 아이잖아요. 인형이고. 가끔 고무 오리가 물에 떠 있는 걸 보면 슬플 때가 있어요. 친구네 가족이랑 물가에 놀러 갔었는데, 고무 오리가 멀리 떠가고 있었어요. 그 무표정의 오리에 제가 오히려 뭔가 감정을 투영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관객들에게 가깝게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친근한 것들, 아이스크림, 초콜릿, 춤, 고무 오리….

 연극 <프라이드>의 리허설 당시 촬영 이미지.

▲ 오종혁 올리버의 돌고래 연극 <프라이드>의 2017시즌 리허설 사진. <프라이드>에서 돌고래는 매우 상징적인 동물이다. 돌고래의 생물학적 특성에 꽂힌 지이선은 돌고래의 특성을 설명하는 대사를 작품에 넣었다. 지이선은 오종혁이 그 돌고래를 '분홍 돌고래'라고 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웨이크보드 타러 갔다가 분홍 돌고래를 봤다고 하던데…. (웃음) 그거 아니라고, 잘못 봤을 거라고 했는데 본인이 우기더라고요. 진짜로 봤다고. (웃음)" 아마, <정글의 법칙>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 연극열전


<프라이드> 돌고래는…. 제가 돌고래를 좋아해서. (웃음) 다큐멘터리에서 돌고래를 봤는데, 그 친구들만의 언어가 있더라고요. 되게 '유니크'하다고 느꼈고, 포인트로 가져가면 어떨까 싶었어요. 지금 보면 쑥스러운 대사지만, 당시에는 '너는 돌고래니까'라는 말이 되게 마음에 와닿는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일상에서 써 본 적 없지만 아마 올리버라면 썼을 거예요.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묘사해 보고 싶었어요. 서로를 보호해주는,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신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물속에 사는 포유류잖아요. 성 소수자와 돌고래,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웃음)"

하지만 각색은 각색일 뿐이다. 자신이 직접 쓴 작품이라면, 자신이 얼마든지 손을 댈 수 있다. 각색은 다르다. 원작자와 협의도 해야 하고, 자신이 어디까지 만질 수 있고 또 만져야 하는지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다. 원작을 '복사+붙여넣기' 하는 데 그친다면 그건 기만이고 책임 방조다. 동시에 우리 관객이 더 재미있게 즐기고,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끔 바꾼다는 핑계로 원작의 주요한 줄기나 메시지까지 훼손할 수는 없다. 각색은 동시에 그 원작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이선은 믿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이다. 원작의 한계가 눈에 들어왔을 때, 각색 작가는 어디까지 그 한계와 싸워야 하는가.

"지금이 재연, 삼연이기 때문에 아차 싶은 것들이 보이거든요. 각색이 항상 고민이에요. 원작 라인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도 있지만, 가끔 '내가 이걸 지울 수 있나?'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제가 좀 과하지 않은가?' 하는 고민이 항상 남아요. 분명히 과한 지점이 있어서 요즘은 그것에 대한 고민도 있어요."

실비아 그리고 트와일라

 연극 <프라이드>의 리허설 당시 촬영 이미지.

▲ 실비아의 역할, 실비아의 존재 연극 <프라이드>의 2017시즌 리허설 당시 촬영 이미지. 실비아는 원작에 비해 지이선이 많이 끌어 올린 캐릭터이다.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훌륭한 여자 배우가 활약할 수 있는 좋은 인물이 별로 없다는 문제의식도 있었지만, 극의 드라마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버려지는 캐릭터 없이 활용하고 싶었다고 한다. ⓒ 연극열전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한계선은 존재하고, 구멍도 있다. 한 작품이 그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완벽한' 그릇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 작품이 처음 탄생했을 때는 날카로운 첨단이었어도,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흐르면서 투박해지고 촌스러워지기도 한다. 소수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성 인물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캐릭터가 너무 납작하지는 않은지, 지나치게 나이브하지는 않은지 등…. 각색이 덧대서 구멍을 메우고 원작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지울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다.

"사실 제가 <프라이드>를 맡은 건 실비아 때문이 커요. 1958년과 2017년의 캐릭터들은 완전히 벌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1958년의 실비아가 맨 마지막에 나왔을 때 원작에는 잠옷 차림이에요. 하지만 굳이 트렌치코트를 입히고 여행 가방을 들게 한 것은, 그녀가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향해 떠난다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예요.

델포이 신전에서 들었던 메시지는 실비아의 마음이고, 먼 미래의 실비아가 그녀에게 해 주는 메시지죠. '필립과 올리버와의 관계와는 또 전혀 독립적인, 작품을 끌어가는 메시지의 역할을 실비아가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목소리는 실비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와 같은 생각을 해요. 실비아가 신전의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건 또 결코 아니거든요.

도구적으로 소비되지 않게끔 실비아에게 많은 것을 줬어요. '사는 것보다 이불이 더 포근하다고 느껴'라는 대사도 원래 올리버가 하게 할까 했다가, 실비아가 더 능동적이고, 삶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실비아에게 줬어요. 삼연을 하면서 실비아가 엄마가 되고 싶어 하고, 아이를 강하게 원하는 부분을 계속 고민하다가 없앨까 했어요. 그런데 임강희 배우는 이 대사가 꼭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그런 프레임에 갇혀서 고통받으며 고민하는 인물이라는 걸 보여준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배웠어요. 실비아가 대화를 통해 성장하는 인물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고….

1958년의 실비아가 성숙한 인간의 면모, 모순과 고통 속에서 성숙해지는 과정과 성장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물론 실비아에게도 아쉬운 부분은 있어요. 그래서 관객분들의 비판하시는 부분도 저는 충분히 그렇게 읽을 수 있다고 봐요. 원작의 한계도 있지만, 그 실비아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면 또 각색자로서 제 한계이기도 하고요. 각색자로서의 제 한계가 있는데, 제가 그 핑계로 도망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웃음) 함께 더 배우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관객분들이 실비아를 응원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드려요. 이거 꼭 전해주세요. (웃음) 실비아를 응원해주신 만큼 관객분들이 제게도 큰 용기를 주시고, 또 다른 고민들을 하게 해주셨어요. 다만,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프라이드>의 실비아나 <킬 미 나우>의 트와일라, 로빈이 자책하지 않는 거예요. 그녀들이 자책하며 살지 않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관객분들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저도 작업하면서 '만약 나라면?'이라는 질문을 제일 많이 했던 게 트와일라였어요. 이 작품은 한 개인으로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연대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이크가 떠나면서 연대가 생기잖아요. 트와일라에겐 로빈이, 라우디가 그리고 로빈과 라우디에게 트와일라가 생기잖아요. 그래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이 작품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늘 행복하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는 환경이죠. <히스토리 보이즈>에도 나오는 대사지만, '저는 행복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아요'라는 그 말처럼…. 솔직히 그 일 이후로 마냥 웃으면서 살 수는 없겠죠. 저는 트와일라가 체념하길 바라지 않고, 관객분들이 돌아가면서 트와일라에 대해 생각해 준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연극은 시대와 호흡한다. 시대적 맥락에서, 연극은 때론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그 힘을 잃기도 한다. 연극의 수명은, 그 시대와 현실에 가장 날카롭게 던질 수 있는 그 메시지가 효력을 다할 때까지일 것이다. 그래서 지이선 작가는 <프라이드>가, <킬 미 나우>가, 혹은 <모범생들> 같은 작품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그때가 되면 웃으면서 즐겁게 문을 닫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런 세상이 올까? 그러면 세상은 아마 또 다른 종류의 연극을 필요로 할 것이고, 그런 연극을 지이선은 옮겨오거나 직접 쓸 것이다. 지이선은 원작의 한계만큼이나 자신의 미숙함을 탓한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꾹꾹 작품에 많은 것을 눌러 담고 있다. 나는 지이선의 그 밀도를 좋아한다. 치밀하고 촘촘하게 짜인 대본 위에서 인물은 울고 웃고 춤춘다. 어쩌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걱정하고, 그래서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그 태도가 지금의 지이선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걱정과는 달리 오래도록 그의 감수성과 비판 의식이 대학로에 남아있을 것 같다. 내일도 나는 여전히, 작품의 홍보 포스터에 '지이선 작' 혹은 '지이선 각색'이라고 쓰인 글자에 설레며 극장에 들어설 것이다.

연극 <킬 미 나우>의 프레스콜 지난 5월,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한 연극 <킬 미 나우>의 프레스콜 당시 사진. 연극 <킬 미 나우>는 지체장애인 조이 스터디와 조이를 위해 작가의 길도 포기하고 헌신하는 아버지 제이크 스터디의 이야기를 다뤘다. 장애인과 성 그리고 안락사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지는 극이다.

▲ 배우 윤나무가 작가 지이선에게 "<킬 미 나우>를 쓰거나 공연하면서 한 번도 운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한 번 울컥했던 지점이 어디냐면, 윤나무 배우가 '누나는 정말 훌륭한 작가야.(feat. 조이)'라고 문자를 보낸 적이 있어요. 제가 그걸 받고서, 마치 조이가 "아줌마는 정말 훌륭한 작가에요"라고 말 한 것처럼 들렸어요. 조이가 제이크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제이크가 일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얼마나 컸을지 느껴지기도 하고. 그때 '왈칵'했죠." ⓒ 곽우신


연극 <모범생들> 프레스콜 서울 드림아트센터 4관에서 개막한 연극 <모범생들>의 프레스콜 사진.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의 첫 만남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대림외국어고등학교 독문과 A반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그렸다. '엘리트들의 백색 누아르'를 표방하는 이 작품은 학벌주의 사회와 성공제일주의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연극 <모범생들> 프레스콜의 김태형 서울 드림아트센터 4관에서 개막한 연극 <모범생들>의 프레스콜에서 김태형 연출이 마이크를 잡았다. 김태형과 지이선의 첫 만남이기도 한 <모범생들>. 이후로 이들은 호승심으로 엮여서 애증의 작업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곽우신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웃음) 김태형 연출이랑 같이 일한 지는 10년 되었더라구요. 같이 일하고 있는 세 분이 다 달라요. 어떻게 다르냐면…. 태형 연출은 저를 희곡 자판기로 생각해요. 그냥 동전 넣고 누르면 나오는 줄 알아요! 김동연 연출은 저를 동료이자 친구로 생각해요. 그리고 동연 연출은 작가도 겸하기 때문에 같은 작가로 저를 많이 생각해줘요. 안타까운 건 요새 점점 태형 연출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변하고 있는 거고요. 오경택 연출은 저를 대학로의 공공재쯤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요. (웃음) '어? 그 작품 한다고? 그럼 그것도 하고 이것도 하면 되겠네' 이런 식…. (웃음)

담임 선생님으로 비유했을 때, 동연 선생님은 자습시간에 학생들의 질문을 매우 성실하게 받아서 답해주는 스타일이에요. 반면 김태형 선생님은 오자마자 '자, 책 펴라'하고 칠판에 쫙 써가면서 시험문제를 하나하나 찍어주죠. 경택 연출은…. 책을 덮고 '너는 꿈이 뭐니?'라고 물어보면서 '얘들아, 세상은...' (웃음)

일할 때 편한 것은 동연 연출이에요. 저를 많이 배려해주거든요. 태형 연출과 저는 항상 서로 화가 나 있는 상태고요. (웃음) 어릴 때 너무 많이 싸우고, 힘든 시기를 같이 지나와서…. 뭐 누가 태형 연출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면 같이 욕해요. (웃음) 그러다가 또 너무 나쁜 말이면 막 변호해 주죠. '까도 내가 깐다!' (웃음) 저는 항상 태형 연출이랑 같이 안 하고 싶다는 얘기를 해요. 대신 태형 연출은 항상 저랑 하고 싶어해요. 막 울고, 무릎 꿇고…. (웃음) 서로 기질이 비슷하진 않아요. 그런데 코드는 맞는 부분이 많아서, '얘랑 작품 하지 말아야지'하면서도 어느새 작품 얘기를 하고 있는 저를 보면 기분이 별로 안 좋아요. (웃음)

그래서 <프라이드>나 <킬 미 나우>처럼 다른 연출 분들을 만나는 경험이 좋아요. 저는 작가이기 때문에 많은 연출 분들을 만나 봐야 하고, 그럴 때 마다 다른 세계로 여행을 가는 느낌이 들거든요."

연출이 작가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은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언젠가 '김태형 연출 없는 김태형 연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일종의 뒷담화 인터뷰. 그리고 그 인터뷰의 인터뷰이 1호는 지이선인 것으로 정했다.


지이선 킬미나우 프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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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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