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감독을 좋아하세요? 한 편 한 편의 영화로는 알 수 없는 영화감독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오마이스타>는 한 시대를 풍미한 국내외 영화감독들을 집중 조명하고자 합니다. [감독열전]은 시민-상근기자가 함께 쓰는 기획입니다. 관심 있는 여러분의 참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1974)은 '음란(Obscenity)'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영화의 자진 영화 검열단체 '에린(えいりん[映倫])'과 충돌해 길고 긴 법정 공방을 치러야 했다. 놀라운 사실은 영화를 법정에 끌어들인 이유가 사실적 성행위 재현 때문이 아닌, 너무 "문학적으로 묘사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커스틴 케이터Kirstin Cather <영화의 음란함에 대하여> 참고). 다시 말해서 결국 성행위를 스크린에 옮기는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그걸 너무 멋지게 표현해서 관객을 유혹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 이야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감각의 제국>의 검열 케이스를 꺼내든 이유는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이 기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박쥐>나 <아가씨> 등의 작품에서의 섹스 신들은 너무 아름답고 처절하다. 신부와 유부녀의 간통이든, 여성 주인과 하녀의 밀회든, 그들의 사랑 나눔은 감각적 즐거움(sensual pleasure)을 넘어서 삶의 영속과 내면적 해방을 그려내는 하나의 장(場)으로 보인다.

 영화 <박쥐>

영화 <박쥐>의 섹스 신은 충격적이었다. 또한 영화 내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였다. ⓒ CJ 엔터테인먼트


<박쥐>에서 드러나는 영속(永續)의 수혈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에로티즘 (Erotism)>에서 "섹스는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바타유에 의하면, 섹스가 모든 것이 끝나는 의미의 죽음이 아닌 인간의 유한한 삶이 가진 불연속성(discontinuity)에 연속성(continuity)을 부여하고, 영속(eternity)을 담보하는 유일한 행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죽음'을 (이어) 사는 것, 즉, "내면적이고 영속적인 행위"이고, 그런 의미에서 살아있는 육신들의 전유물, 즉, 삶의 알파와 오메가를 잇는 근원적 행위인 것이다(필자의 다른 글, "영화 <연인>으로 보는 죽음과 섹스 그 경계"에서 인용). 죽음과 삶을 잇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섹스 신은 <박쥐>에서 가장 잘 표현되지 않았나 싶다.

신부인 상현(송강호)은 아프리카에서 전염병을 앓던 중 수혈받은 피로 뱀파이어가 된다. 흡혈귀가 된 그는 갑자기 갈구하게 된 욕망과 쾌락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는 초등학교 동창 강우의 집에 방문했다가 그의 아내 태주를 보고 반하게 되고 그녀 역시 상현에게 사랑을 느낀다. 태주는 상현과의 밀회를 위해 그가 봉사하는 병원에 방문한다. 그리고 식물인간 환자가 입원 중인 한 병실 구석 침대에서 서로의 생명을, 사랑을 수혈한다.

 영화 <박쥐>

이들의 러브 신은 게걸스럽고 처절하다. 성적 욕망이 아닌 생존의 욕망이 구현되는 순간이기에 이들은 서로의 발과 손을 들고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 물고 핥아댄다. ⓒ CJ 엔터테인먼트


사제에서 욕정이 가득한 남자로 태어나는 상현에게 태주의 육신은 '먹이'이고 '생명'이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평생을 자신을 "주워 키워준" 모자(母子)에게 학대받으며 살아왔던 태주에게 역시 상현은 구원이며 부활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러브 신은 게걸스럽고 처절하다. 성적 욕망이 아닌 생존의 욕망이 구현되는 순간이기에 이들은 서로의 발과 손을 들고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 물고 핥아댄다. 영화는 이를 눈뿐만이 아닌 귀로도 느낄 수 있게 한다.

<박쥐> 전반에 걸쳐 사운드는 다소 과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두드러진다. 마치 <링>이나 <다크 워터> 같은 나카타 히데오 감독의 공포영화들에서의 판화 양각 같은 사운드를 상기시킨다. 상현이 흡혈하는 장면들과 상현과 태주가 서로를 탐하는 장면들에서 피를 마시고 육체가 부딪히는 소리들은 해부학적인 상상이 가능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하게 들린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운드들이 태주와 상현의 섹스 신과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서로의 육신으로 생명과 사랑을 수혈받는 이들의 결합은 바타유가 언급했던 불연속성에서 영속으로 변환되는 인간의 육체를 절절하게 표현한다.

 영화 <아가씨>

영화 <아가씨>. 아가씨와 하녀의 밀회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 CJ 엔터테인먼트


<아가씨>와 내재적 해방(inner liberation)

알프레드 히치콕은 여성이 주인공이었던 그의 두 작품, <레베카>와 <마니>의 여주인공의 내면을 정밀하게 그려내기 위해 그들을 "침대 위에 올렸다"고 언급한 바 있다(마이클 워커Michael Walker <히치콕의 모티프Hitchcock's Motifs> 참조). 다시 말해, 이 작품들에서의 베드 신은 성적인 표현의 도구가 아닌, 이 인물들의 심리와 내재적 불안 등을 레이어 없이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셈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볼 때,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숙희의 (첫)'결합'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속이기로 작정했던 이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혹은 서로가 무너지는 내면을 교환하는 순간이다. 숙희가 하녀로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백작, 하정우 분)를 만나게 되는 히데코는 자신의 하녀 숙희에게 키스는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사실상 히데코가 만나는 남자는 사기꾼이고 그는 숙희와 공모하여 히데코의 재산을 빼앗고 정신병원에 넣어 버리려는 작전을 수행 중이다. 숙희는 작전에 가담하였으나 점점 히데코 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낀다. 숙희는 키스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며 히데코의 침대로 뛰어든다. 히데코는 히데코대로 사기꾼과 공모하여 본인 대신 숙희를 정신병원에 넣고 자신을 이용하는 삼촌의 손아귀에서 탈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녀 역시 자신의 계획과는 반대로 숙희에게 빠져든다.

 영화 <아가씨>

이들의 배치와 모션은 일반적인 섹스 신들로부터 큰 차별점을 갖는다. ⓒ CJ 엔터테인먼트


숙희가 '키스하는 법'을 가르치며 히데코의 침대에서 그녀와 입을 맞추는 장면은 그들이 처음으로 각자의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임과 동시에 이들이 처음으로 서로를 옥죄는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혹은 서로를 해방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히데코는 굴절된 욕망을 가진 삼촌의 손아귀에서, 숙희는 사기꾼으로 살아왔던 그녀의 인생을 지배했던 돈의 욕망에서, 그리고 그녀들을 속박했던 비틀린 남성들로부터 탈(脫)종속하는 모멘텀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배치와 모션은 일반적인 섹스 신들로부터 큰 차별점을 갖는다. 가령, 대다수의 섹스 신이 등장인물의 수직적 상하, 혹은 지배/피지배적인 구도로 보이지만, 히데코와 숙희는 주로 나란히 (옆으로) 누워 서로를 바라보는 수평적인 구도에서 그려진다. 이들은 짓이기고 누르는 모션보다 감싸고 품어 안는 동작을 취한다. 욕정과 정복이 아닌, 감성과 마음의 연대가 느껴지는 베드 신이다.

박찬욱의 영화는 나의 심장을 뛰게 한다. 물론 위에 언급했던 섹스 신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만들어내는 에로티시즘은 늘 무언가와 엉켜있다. 때로는 웃음과 자유가, 때로는 음란함이 그리고 죽음과 생명이 등장인물의 숨결에 육신에 묻어난다. 그의 다음 작품에 안달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다.

박찬욱 박쥐 아가씨 한국영화 베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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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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