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가와 TV에선 '시간'을 다룬 콘텐츠가 큰 인기를 구가 중이다. 시간을 소재로 삼았던 영화로는 <시간여행자의 아내> <어바웃 타임> <루퍼> <시간이탈자> <백 투 더 비기닝> <나만이 없는 거리>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너의 이름은> 등이 있다. 안방극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 <시그널>이 사랑을 받은 후에 <도깨비> <푸른 바다의 전설> <터널> <내일 그대와> <시카고 타자기>가 쏟아졌다.

'시간물' 열풍에 대해 김지영 CJ E&M 홍보부장은 "책과 영화 등 문화계 전반에서 판타지 장르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이를 드라마에서 구현할 수 있는 스타일이 타임슬립이었던 것"(스포츠경향)이라고 진단한다. 또 권동현 경기대학교 애니메이션 영상학과 교수는 "시간이라는 절대적 제한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마치 인류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로망처럼 여겨져 왔다"(이코노믹리뷰)라고 분석한다.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판타지 장르의 부흥이 다양한 시간 여행을 촉발한 셈이다.

ⓒ (주) 라인필름


영화 <하루>는 이런 열기에서 태어났다. 작품이 선택한 스타일은 '타임 루프'. 특정한 시간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상황을 그리는 타임 루프는 같은 상황이 거듭되는 특성상 대부분 어두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복되는 상황에서 파국을 막지 못하는 주인공은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 <사랑의 블랙홀> <소스 코드> <엣지 오브 투모로우>가 대표적인 타임루프 작품이다. 근래엔 <7번째 내가 죽는 날>이 개봉했다.

반복되는 하루

의사 준영(김명민 분)이 딸 은정(조은형 분)을 만나러 약속장소로 향하던 중에 교통사고 현장에서 딸의 차가운 주검을 발견한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사고 2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이런 상황은 반복된다.

저 이야기가 전부였다면 진부하다는 혹평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영화는 장르의 익숙한 공식인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반복되는 하루'에 '지옥 같은 상황에 갇힌 두 남자'란 설정을 넣는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아내 미경(신혜선 분)을 잃는 순간을 반복하고 있던 사설 구급차 운전기사인 민철(변요환 분)이 같은 시간대에 갇힌 준영 앞에 나타나면서 영화는 새로운 형태의 타임루프로 태어난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시간을 다른 사람과 함께 돌며 사건을 푼다'는 <하루>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연출을 맡은 조선호 감독은 "반복되는 시간을 끝내고 싶으나 끝나지 않는 상황,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죽어가는 과정에서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다루고 싶었다"며 "거기에 누군가를 계속 죽여야만 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동시에 풀어보면 어떨까 싶었다"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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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과 미경의 죽음을 막고자 준영과 민철은 발버둥을 치지만 상황은 변하질 않는다. (감독의 말한) 준영과 민철처럼 시간 안에 갇혀서 계속 은정과 미경을 죽이는 제3의 인물 강식(유재명 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준영, 민철, 강식의 과거를 보여주며 진실의 실타래를 풀어간다. 그리고 반복되는 시간을 의미하는 제목 '하루' 외에 예상치 못한 비밀이 숨겨진 또 다른 '하루'를 묘사한다.

시간에 갇힌 인물이 한 명이 아닌, 세 명이라는 발상을 내세운 <하루>는 신선하다. <엣지 오브 타임>이 특정한 시간대에 머문 세 사람을 먼저 다룬 바 있으나 묘사하는 방식은 <하루>와 완전히 다르다. 같은 건 숫자 뿐이다.

개연성 측면에서 아쉬움 남겨

다만 영화 특유의 과장된 몸짓은 크나 개연성은 충분하질 않다. 요즘 개봉하는 영화론 드물게 90분이란 짧은 상영 시간을 가졌음에도 지루한 느낌도 든다. 과잉된 음악은 배우의 연기를 죽이고 몰입을 저하한다. 의식이 만든 뫼비우스의 띠에 빠진 남자가 나오는 <혼자>가 보여준 반복의 화법을 떠올리면 <하루>의 연출이 얼마나 빈곤한지 알 수 있다.

<하루>는 완성도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반면에 메시지는 의미심장한 구석이 많다. 영화는 준영, 민철, 강식이 충돌하는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며 자신에게, 또는 타인에게 죗값을 묻는다. 반복되는 죽음은 세 사람에게 시지프스의 돌처럼 형벌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 대해 강식 역할 맡았던 유재명 배우는 "가족을 잃는 것은 개인의 불행이지만 확장되면 사회적 불행이다. 우리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다"라고 부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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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아이를 잃는 상황, 그것을 막을 수 없는 <하루>의 장면 속엔 국가의 상흔으로 남은 세월호의 기억이 겹쳐진다. 매일 무참히 무너지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루를 바꿀 방법을 찾는 준영과 민철의 모습과 멈춰버린 영화 속 시간은 마치 2014년 4월 16일을 바꾸고 싶었던, 그러나 바꾸질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형상화한 느낌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흘리는 눈물엔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깃들어 있다. <하루>의 마지막 장면은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이 취할 태도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감독, 배우, 제작진, 나아가 영화가 꿈꾸는 대한민국의 내일이다.

영화, 드라마, 소설에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
1. 타임워프(Time Warp): 시간 왜곡을 의미하는 용어로 주인공이 자신의 목적에 따라 시간대를 넘나든다. 대표적인 작품은 조지 웰스의 소설 <타임머신>.

2. 타임슬립(Time Slip): 개인 혹은 집단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 여행을 하는 초자연적 현상을 일컫는 단어. 의도된 장치로 시간을 여행하는 타임머신과 성격이 다르다. <시간여행자의 아내> <어바웃 타임>이 여기에 해당한다.

3. 타임루프(Time Loop): 특정한 시간이 계속 반복되는 개념을 말한다. <사랑의 블랙홀>이 유명하다.

4. 타임리프(Time Leap); 과거로 가서 변화를 주어 현재의 결과를 바꾸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떠올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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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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