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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57년 전 5월 29일 일요일, 김포공항이었다. 기상청 데이터에 따르면, 이날 서울과 부근 지역의 아침 최저기온은 13.1도. 낮 최고기온은 23.4도였다. 그 이전 이틀과 비교하면 아침 기온은 낮고 낮 기온은 높았다. 아침에서 정오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따스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튿날 나온 1960년 5월 30일 자 <동아일보> 조간 1면 헤드라인 기사에 따르면, 5월 29일 오전 9시 이전 김포공항에 은밀히 등장한 남자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86세였고, 또 한 명은 65세였다. 86세 된 남자는 중죄를 짓고 해외로 도주하는 중이었다. 65세는 그의 도주를 돕는 중이었다.

86세는 무사히 비행기에 올라타 도주에 성공했다. 추적하는 경찰은 없었다. 경찰을 지휘하는 최종 권한이 바로 옆의 65세한테 있었기 때문이다. 65세의 도움으로 86세는 미국 하와이로 날아가 대한민국의 사법적 처벌을 피했고, 도망자가 아닌 망명가로 멋지게 포장될 수 있었다.

12년간 헌법을 마음대로 바꿔가며 국민의 생계와 자유를 억압하고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것도 모자라서, 그 해 4·19 혁명 때는 국민 186명을 죽이고 6230명을 다치게 한 이승만 전 대통령(86세). 오전에서 정오로 갈수록 따스하게 느껴지는 5월 29일 일요일 오전의 날씨를 느끼며 그는 자택인 이화장을 빠져나와 허정 대통령권한대행(65세)의 도움으로 망명이란 이름의 도주에 성공했다.

그렇게 처벌을 피한 이 전 대통령은 여생을 감옥이 아닌 하와이에서 보내고 일부 국민들한테서 국부로까지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죄인을 죄인으로 부르지 못하고, 죄인이 국부로까지 불리는 일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승만이 1960년 5월 29일 아침에 김포공항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는 수감 번호가 찍힌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찬 채 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여생을 보냈다면, 오늘날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이승만의 이미지가 우리 뇌리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죄를 짓고 처벌받은 죄수의 이미지가 이승만과 겹친 채로 입력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됐다면, 그를 국부로 기억하고 추앙하는 사람도 훨씬 더 적어졌을 것이다.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에서 찍은 이승만.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에서 찍은 이승만.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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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기사에 보도된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들의 전언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올해 3월 9일 파면 선고를 받기 직전까지도, 또 3월 31일 구속되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설마 나한테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가 지금 상황으로 추락한 데는 그런 안이한 상황 판단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만약 박근혜도 이승만처럼 일찌감치 상황을 파악해 해외 망명을 결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망명이 성공해서, 교도소에서 제공한 옷이 아니라 최순실이 마련해준 옷을 입고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덜 올린 머리와 약간 부은 얼굴로 수감번호 찍힌 죄수복에 수갑을 찬 모습으로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승만처럼 됐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괜찮은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의 경우에는 해외망명이 성사되기 힘든 결정적 장애물이 있었다. 박근혜가 상황을 안이하게 예측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망명을 도와줄 외부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 보다 더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에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이승만의 망명에 적극 협조했다. 위의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해 5월 중순부터 2주 동안 월터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가 허정 권한대행과 함께 이승만 망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망명 전날인 5월 28일 토요일에는 이승만의 망명 절차를 밟느라고 미국대사관이 온종일 분주했다.

이 기간에 월터는 이승만 부부와 비밀 회동도 했다. 또 용산에 있는 미 8군 병원에 이승만이 방문하는 장면도 언론에 포착됐다. 그래서 이승만이 비행기에 올라타기 몇 시간 전에 배포된 5월 29일 자 <동아일보> 조간에는 이승만이 조만간 미국의 협조 속에 망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까지 실렸다.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사진 속의 말풍선은 필자가 삽입한 것.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사진 속의 말풍선은 필자가 삽입한 것.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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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간섭을 받는 나라에서 미국의 지원으로 대통령 생활을 한 사람이 미국으로 망명하려면 미국의 승인과 협조를 받는 게 당연했다. 이승만은 그런 상황 속에서 미국에 망명하고 처벌을 피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말로는 당장에라도 전 세계를 어떻게 할 것 같지만, 미국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한국에 경제원조까지 했던 나라가 이제는 한 푼이라도 더 받아가려 애쓰는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미국은 예전처럼 한국을 돕거나 마음대로 조종하기가 힘들다. 한국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대통령을 마음대로 조종하기도, 그 신병을 뜻대로 다루기도 힘들다. 

만약 미국의 힘이 예전 같아서 한국 대통령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2008년 5월에 그의 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을 데리고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를 찾아가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 깊이 친미·친일이니까 그의 시각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며 미국 정부를 안심시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수도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의 힘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여전히 미국은 무시할 수 없는 대상이다. 하지만, 한국과 한국 대통령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민 대다수의 성토를 받는 한국 대통령을 자국에 망명시키는 것은 미국 스스로 한미관계를 악화시키는 자충수가 된다. 그랬다가는 한미일 삼각 동맹을 통해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고 이를 통해 태평양에서의 자국의 권익을 지키고자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태평양 전략에 차질만 생길 뿐이다. 그래서 지금의 미국은 1960년의 미국처럼 한국 대통령을 보호해줄 이유가 별로 없다. 그럴 힘도 없다.

거기다가 박근혜가 탄핵정국에 갇혀 있을 때 미국 대통령이 된 트럼프의 개성도 한국 대통령의 망명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친박세력이 주최한 탄핵반대 집회에서 성조기가 날리고 미군의 개입을 희망하는 분위기가 연출되는데도, 트럼프는 사드 배치나 주한미군 방위비 문제로 이문을 남길 궁리만 하고 있었다.

"사드 배치 비용은 우리가 댈 테니 한국은 땅만 제공하라"던 미국 정부는 지난 3월 6일부터 사드 장비를 한국에 이동시켰다. 이날 밤, 미군 C-17 항공기가 발사대 2기를 포함한 일부 장비를 오산 미군기지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해서 사드 장비를 한국 땅에 들여놓고 난 뒤인 4월 27일과 28일에 트럼프는 "사드 비용을 한국이 부담해야 한다"며 종전의 미국 입장을 뒤집었다. 무료 경품이라며 상품을 일단 맡긴 뒤 대금을 청구하는 방식을 구사한 것이다.

그러다 한국이 반발하자 4월 30일에는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을 내세워 "동맹국들의 비용분담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여망을 염두에 두고 나온 말"이라면서 초점을 사드 비용에서 주한미군 방위비 쪽으로 돌렸다. 소파협정을 위반한 방위비 특별협정에 근거해서 한국이 부담하는 방위비를 한국에 더 많이 떠넘길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떻게든 돈을 빼낼 궁리만 하는 트럼프한테서, 과거의 아이젠하워처럼 한국 대통령을 미국으로 빼낼 발상이 나올 리는 없을 것이다.

한미관계가 변한 데에다가 트럼프 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됐으니, 범죄를 범한 한국 대통령이 미국 정부의 도움으로 망명에 성공해서 위신을 보존할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별로 없다. 박근혜가 이승만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는 데는 이런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다가 허정 같은 권한대행을 두지 못한 것도 박근혜한테는 불리했다. 권한대행이 된 허정은 국민적 이목이 자신한테 집중된 상황에서도 이승만을 보호하고 해외로 빼돌렸다. 5월 29일에는 김포공항에까지 마중을 갔다.

거기다가 허정은 '선(先) 선거, 후 개헌'이 됨으로써 차기 선거가 4·19 열풍 속에 치러지는 것을 막고자 자기 권한을 최대한 이용해 '선 개헌, 후 선거'가 관철되도록 함으로써 이승만과 자유당을 조금은 더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1896년 부산에서 출생한 허정은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다녔다. 이때 방과 후 학습을 위해 YMCA에 나가 영어 등을 공부했다. 이때 그를 지도한 교사 중 하나가 바로 이승만이었다. 이런 제자를 1960년에 권한대행으로 둔 것도 이승만한테는 행운이었다.

만약 한미관계가 예전 같고 박근혜가 충성스러운 권한대행까지 뒀다면, 5·29 망명 같은 일이 박근혜한테도 생겼을 수 있다. 그랬다면, 박근혜도 사법적 처벌을 피하고 위신을 어느 정도 유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우리 국민은 죄인을 죄인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또 제2의 박근혜가 출현하기 힘든 정치환경을 만드는 일에도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태그:#이승만 망명,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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