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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명.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의 청남대에서 찍은 사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명.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의 청남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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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통령선거 1년 전인 2006년 10월. 대통령 출마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꽤 바쁠 때였다. 이런 시기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갑자기 유럽 여행에 나섰다. 그는 당시엔 '전 서울시장'이었다.

주변의 만류가 있었다. 이렇게 바쁠 때에 무슨 해외여행이냐는 것이었다. 회고록인 <대통령의 시간>에 따르면 그는 "대통령 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되고 나서 할 일을 준비하는 것이 몇 배는 더 중요해요"라며 만류를 뿌리쳤다. 대통령 된 뒤에 할 일을 미리 점검해야 한다면서 그는 그렇게 유럽으로 날아갔다.

그가 말한 '대통령 되고 나서 할 일'이란 것은 다름 아닌 대운하 사업이다. 이 사업에 대한 확신을 보강하고자, 예전에 본 적 있는 RMD 운하를 다시 돌아보려 했던 것이다. RMD운하는 라인 강(R)·마인 강(M)·도나우 강(D)을 연결함으로써 독일 북쪽 대서양과 루마니아 동쪽 흑해를 잇는 물길이다.

이 운하를 돌아보면서 그가 보고 느낀 것들이 <대통령의 시간>에 정리되어 있다. 이 회고록은 대통령 퇴임 뒤인 2015년에 발간됐다. 한반도 대운하 계획과 이것의 대체물로 평가되는 4대강 사업으로 인해 그가 국민들로부터 욕을 흠씬 먹은 뒤에 나온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고록을 정리하면서 그는 유럽 여행 부분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내놓은 대운하 구상이, 유럽 여행으로 보강된 확고한 신념에 기초한 것임을 보여주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대운하 사업에 대한 그의 확신을 이룬 밑바탕들이 회고록에 모두 적혔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대운하 구상을 정당화하고 국민적 비판을 누그러뜨릴 목적으로 썼으니, 자신의 신념을 이룬 근거들을 회고록에 최대한 많이 쏟아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회고록 제9장에 있는 유럽 여행과 대운하 이야기는 그가 가진 철학적 밑바탕을 거의 다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RMD 운하를 답사하면서 그가 받은 느낌은 '유럽 통합은 운하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지도를 펴봤더니 유럽 전역에 수로망이 바둑판처럼 연결되어 있었다"면서 "유럽 통합은 운하로 연결된 수로망 덕분이었다는 말이 실감 났다"고 그는 말했다. 

이명박, 유럽여행에서 운하에 대한 확신을 얻다

독일 뉘른베르크를 지나는 RMD 운하.
 독일 뉘른베르크를 지나는 RMD 운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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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그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물류비용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지적한 다음, 우리나라에도 RMD 운하 같은 게 생기면 유럽통합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경부 운하가 건설되면 물류비용이 절감되어 우리 상품의 국제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수자원 확보와 관광산업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어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통합된 유럽이 운하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한국에서도 운하가 생기면 경제적 효과가 클 것이라는 확신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느낌이 현실적으로 타당한지를 충분히 따져보지 않았다.

그는 유럽 통합이 운하망 덕분이라고 말했다. 운하가 유럽을 묶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럽 통합을 가능케 한 근원적 밑바탕은 따로 있다. 그는 그런 점은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간과했던 유럽의 역사

서기 800년대부터 서유럽은 형식적으로나마 이미 하나였다. 로마교황청과 로마제국 후계자의 제휴 하에 서유럽은 제한적이나마 역내 통합을 이루었다. 그 이후로 유럽에서는 로마제국 계승자(주로 신성로마제국)만이 교황의 후원하에 황제 칭호를 독점했다. 그 외의 나라들은 황제 칭호를 피하고 왕이나 대공·공 같은 제후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교황청과 로마제국 계승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동아시아에서는 누구나 힘만 있으면 황제 칭호를 썼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교황에 의해 로마제국 계승자로 인정한 자만이 그 칭호를 사용했다. 이런 정치적 기초 위에 서유럽은 여타 지역에 비해 공고한 경제적 단결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런 유럽의 전통을 깬 것이 나폴레옹의 등장이다. 로마제국 황실을 계승하지 않은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도 아닌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고 그 여파로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면서 유럽의 단결은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천년을 넘는 단결의 전통이 있었기에 1991년에 서유럽은 유럽연합으로 다시 뭉칠 수 있었다. 이처럼 유럽 통합의 근간에는 물길이 아니라 가톨릭과 로마제국의 전통이 흐르고 있다. 이명박은 이런 점은 고려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무시해버렸다.

이명박은 RMD 운하가 서유럽 문명의 퇴조가 명확해진 뒤인 20세기 후반에 개통됐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독일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쓴 <서유럽의 몰락>이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나와 세계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럽인들은 이미 20세기 전반에 유럽 문명의 몰락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명박, 산으로 올라가는 배를 보다

그런데도 이명박은 20세기 후반에 개통된 RMD 운하를 보고 유럽 문명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운하가 경이로운 교통 체계라는 확신까지 갖게 되었다. 라인 강에서 스위스 알프스를 향해 위로 올라가는 운하의 모습을 근거로, 그는 운하가 충격적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우리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정말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봤으니, 그 충격이 어떠했겠는가."

그의 충격은, 저런 경이로운 광경을 한국 땅에서도 연출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옮겨갔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는 조령 즉 경북 문경새재로 물길을 끌어올려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자는 발상으로 이어졌다.

"대운하 계획이란 것은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해 배가 다닐 수 있는 수로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업의 핵심은 조령에서 두 수로를 연결하는 인공 수로를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RMD 운하에서 얻은 영감을 기초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는 문경새재로 물길을 끌어올릴 구상까지 이끌어냈다. 그만큼 운하를 위대한 교통 체계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세운 경인운하(경인아라뱃길)의 서쪽 갑문. 서해와 경인운하를 잇는 갑문이다. 경인항 인천터미널의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이다. 전망대 유리창 너머로 찍어서 좀 뿌옇다.
 이명박 정권이 세운 경인운하(경인아라뱃길)의 서쪽 갑문. 서해와 경인운하를 잇는 갑문이다. 경인항 인천터미널의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이다. 전망대 유리창 너머로 찍어서 좀 뿌옇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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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평가는 교통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시대에 상당히 뒤떨어진 것이다. 세계사에서 운하의 시대는 이미 한물간 시대다. 유럽에서 마찬가지다. 유럽인들은 기차를 개발한 뒤로는 운하보다 기차 철로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이것은 이미 3백 년 전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역사학계뿐 아니라 물류학계에서도 하고 있다. 인천대학교 여기태 교수가 쓴 <물류의 역사> 제2장에도 "1830년대부터 운하는 중요성을 잃어가는데, 이는 철도를 통한 운송이 선호되면서부터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렇게 이미 오래전에 한물간 운하를 갖고 이명박은 대한민국을 새롭게 변모시킬 계획을 품었던 것이다.

'허술한 확신'이 부른 비극... 4대강 사업

유럽 여행에서 이명박은 또 다른 확신을 얻었다. 운하가 환경친화적이기까지 하다는 확신이었다. 그런 확신을 얻은 곳은 RMD 운하 주변의 어느 마을이다.

"식당이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흐르는 강물과 우거진 나무, 지저귀는 새들 그리고 평화로이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 일행도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 마을을 둘러보고 나니 환경친화적 개발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운하 주변 마을에서 나무와 새 그리고 여유로운 사람들을 보면서 운하 사업이 친환경적이라는 점을 다시금 실감했다는 것이다. 확신의 근거가 너무 취약하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이명박은 유럽 여행을 통해, 운하는 경이로운 교통 체계이며 사회통합 및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인간과 환경의 조화까지 돕는 것이라는 확신을 강화했다. 이런 확신은 그가 한동안 대운하 사업을 추진하고 그 사업의 대체물로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는 동력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확신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 충분히 따져보지 않았다. 자신의 확신이 유럽 통합의 역사나 교통의 역사에 비춰볼 때 얼마나 허술한가를 따져보지 않았다. 그런 허약한 확신을 근거로 대한민국을 그렇게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의 확신을 검토하고 따져볼 목적으로 유럽 여행을 간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과 믿고 싶은 것만을 확인하고자 유럽으로 떠났을 수도 있다. 보기 싫고 듣기 싫고 믿기 싫은 것은 의도적으로 피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그 여행은 처음부터 하나 마나 한 여행이었다.


태그:#이명박, #4대강, #대운하, #RMD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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