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스페셜

ⓒ SBS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대한민국, 당연히 우리의 문맹률이 0%일 거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OECD 가입국 문서 해독 능력 비교에서 꼴찌를 차지했다. 전 국민의 75% 이상이 새로운 정보나 기술을 배울 수 없을 정도로 일상 문서 해독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 결과 나타나고 있다. (2014년 3월 7일 <국민일보> 참조)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글을 읽을 수는 있을 정도인데, 65세 이상 노인 연령층으로 가면 상태는 더 심각해진다. 65세 노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면 문맹률은 절반에 가깝고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어르신들이 30%에나 달한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 어르신들의 '봉건적 사고'의 잔재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기회조차 놓친 '어르신들 문맹'의 소산일 지도 모를 일이다.

시집 세 편의 어엿한 시인, 칠곡군 할머니들

ⓒ SBS


그래서 다수의 지방 자치 단체는 고령화 시대 이런 심각한 어르신들의 문맹률로 인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노인 복지 회관, 마을 회관, 경로당을 중심으로 한글 인문학 수업을 늘려가고 있다. 그런 인문학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글'을 배우는 것을 넘어, 그것이 '작품'으로 빛을 발한 기적의 사례가 있다. 바로 경북 칠곡군 할머니들이다.

대구와 구미 사이의, 유명 농산물도, 유명 관광지도 없는 이곳, 주변 사람들이 아니면 그 지명조차 낯선 이곳 22개 마을의 할머니들은 2013년부터 '문해 교육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를 통해 할머니들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써볼 수 있게 되었고, 꾸깃꾸깃한 그 옛날 자신에게 보내온 연애편지에서부터, 자식들의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할머니들이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여전히 '한글'이 어렵다는 할머니들, 그러나 할머니들은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을 넘어 '작품'을 창작해 냈다. 사투리로, 맞춤법이 틀린 한글, 하지만 그 속에 인생이 담긴 '시(詩)'가 바로 그것이다.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
공부 시간이라 일도 놓고 헛둥지둥 나왔는데 시를 쓰라하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
- 소화자, '시가 뭐고?' 중에서

2015년 그런 할머니들의 작품이 <시가 뭐고?>로 출간되었다. 출판 기념회도 했고, 북 콘서트도 했다. 그 여세를 몰아 1년 뒤 119명 할머니의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가 연이어 발표되었고, 81명 할머니의 87편의 시가 <작대기가 꼬꼬장 꼬꼬장해>로 지난 3월 23일 세 번째 출간됐다. 이제는 어엿한 세 번째 시집을 가진 시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 SBS 스페셜 >이 다뤘다.

다큐멘터리의 시작은 '시'에 대한 질문이다. 광화문 거리에 만들어진 간이 천막, 들른 사람들은 자기 앞에 펼쳐진 백지에 시를 쓰라 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시, 그건 너무 어렵단다. 화면이 바뀌고, 한낮의 볕이 바른 양지, 칠곡군 할머니들이 앉아계시고, 시를 묻자, 할머니들 입에서 흥타령처럼 시가 흘러나온다. 쉽게 쓰인, 아니 불린 시?

여전히 한글 맞춤법이 너무 어렵다고 하시는 할머니들, 그런데 시는 참 술술 잘도 나온다. 타고난 시인이셨나? 하지만 할머니들이 쓴 시를 보면 느껴진다. 그들의 지난 80년 삶이 그대로 시가 되어 흘러나왔음을. 자신을 표현할 길 없던 그 몇십 년의 세월이 뒤늦게 한글을 배워 물꼬가 터지고, 그 인생인 '시'라는 매개를 얻어 응축되어 표현된다.

젊은 때는 집에 있는 것보다 주막에 있는 시간이 드 만낫다
호호백발 할배 대니 갈 곳이 없어 집박계 모르네 이재사 할마이가 제일 좋다 하네
- 칠곡시인 조덕자 할머니, '영감' 중에서

철이 들기도 전에 결혼하고 어려운 살림살이 허리 한번 못 펴보고 산 세월, 이제 남편이 있어도 바람처럼 돌아다닐 여력도 없이 병든 동반자, 자식들 다 여의고 이제야 여유가 생긴 할머니들은 '신이 나서', 늦게 분 '시' 바람에 수저만 놓으면 마을 회관으로 달려가신다.

인생, 시가 되다

ⓒ SBS


할머니들이 쓰는 시,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詩>이다. 경기도 인근의 작은 도시에 사는 미자 할머니, 그 나이에도 여전히 중학생인 손자를 부양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못 할 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지만, 화사한 색감의 옷과 머리의 꽃장식처럼 소녀 감성을 잃지 않았다. 그런 미자 할머니가 '시' 강좌를 듣고, 시를 쓰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며, 영화는 미자 할머니가 만난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 목도한 아름답지 않은 현실의 이야기를 담는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의 시이야기란 이창동 감독의 술회처럼, 영화 속 미자 할머니는 결국 자신의 몸으로 시대를 울리는 시가 되는 슬픈 마무리를 한다.

자야자야 네 나이가 몇 살이냐 올해도 여전히 연분홍 작약이 아름답게 피였네
나는 나는 시집온 지 육십 오년 되었구나
그래서 내 나이는 팔십육세란다 꼬부랑 할머니가 되옃다네
- 칠곡시인 이쇠건 할머니, 작약꽃

하지만 그렇게 시대를, 자신이 결국 눈감아버릴 수 없는 삶을 '시'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했던 영화와 달리, 할매 시(詩)트콤 속 할머니들의 삶은 마치 온갖 세월의 풍파를 겪고 의연해진 거목과도 같다. 잦은 바람 따윈 거뜬히 품어 버리는. 젊어 주막을 들락거리는 남편도, 농사일보다 바깥일에 더 정신 팔렸던 남정네도,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자식도, 삶은 고단했지만, 그 고단한 삶을 결코 한 시도 허투루 살지 않은, 온몸으로 생을 짊어온 낙천성과 여유로움, 그리고 인생에 대해 그 어떤 철학자도 따라갈 수 없는 해탈이 이 칠곡 할머니들의 시엔 담겨있다. 그런 할머니들의 시처럼, 다큐멘터리 역시 시(詩)트콤이라며 그런 늙었지만 여유로운 노년의 삶을 밝게 그려내려 애쓴다.

동네 청년이랑 몰래 동구 밖 나무 아래서 연애를 하던 갈래머리 소녀는 이제 자식들 거둬 먹이려 농사일을 하며 한평생을 보내느라 나무 막대기처럼 굵직해진 손으로, 그런데도 여전히 놓치지 않은 사랑을 노래한다. 먼저 보낸 자식의 무덤 앞에서 허물어지는 엄마는 하지만 여전히 건사해야 할 식구들은 물론 외지인에게조차 밥 한 끼를 걱정하며 미소를 보낸다. 어쩌면 할머니들이 이룬 기적은 '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되돌아보면 한 줄의 시로 마치기엔 '고생'보따리였던 인생, 하지만 여전히 할머니들은 그 '신산스러운' 삶의 무게 대신, 또박또박 시랑 씨름하는 열정으로 오늘을 채워간다. 할머니들의 삶은 과거형이 아니라, 네 번째 시집을 기대하기에 충분할 현재, 혹은 미래형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SBS스페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