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다. 그러나 승리는 당연히 주어지지 않는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사악한 힘이 거짓을 편들고 있다면 참은 거짓을 이기기 힘들다. 더구나 거짓은 성실하기까지 하다. 거짓을 이기려면 거짓보다 더 성실해야 한다.

믹 잭슨 감독이 연출하고 레이첼 와이즈, 앤드류 스콧 등이 출연하는 법정 드라마 <나는 부정한다(Denial)>는 거짓과의 싸움이 당연한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치밀한 전략과 때론 가슴이 찢어지는 자기 부정이 있어야 '겨우'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히틀러를 신봉하는 자칭 비주류 역사학자 데이빗 어빙(티모시 스폴)은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이 날조됐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미국 에모리 대학의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는 그를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치는 자와 상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어빙은 일부러 싸움을 걸어온다. 그녀의 강연장에 난입해 증거를 가져오라고 다그치는 한편, 그녀의 저술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소송을 걸어온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그와의 소송에서 이기려면 홀로코스트가 실제로 자행됐음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립스타트는 고심 끝에 소송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일단 자신의 연구성과가 어빙과 맞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하다는 자신감이 있어서다. 또 다시는 허위 주장을 못 하도록 법적으로 못 박을 필요도 있었다. 이에 립스타트는 경우에 따라선 직접 증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책임변호사인 앤서니 줄리어스(앤드류 스캇)는 그 어떤 증언도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법정 변론을 맡은 리처드 햄프턴(톰 윌킨슨) 변호사 역시 같은 입장이다. 이 대목에서 영국 사법체계의 특징이 엿보인다.

영국 법은 책임 변호사와 법정 변론을 맡은 변호사가 다르다. 그리고 명예훼손 소송의 경우 영국 법은 피고소인에게 입증 책임을 지운다. 어빙이 미국 학자 립스타트를 상대로 영국 법원에 명예훼손 소송을 건 것도 이 같은 영국 법의 특징 때문이다. 즉, 입증 책임을 립스타트에게 지우기 위한 책략이었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판사가 변호사가 전통을 고집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영국 사법체계의 특징을 보는 건 이 영화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악보다 성실해야 악을 이긴다

 <나는 부정한다> 포스터. 원제는 'Denial'이다.

<나는 부정한다> 포스터. 원제는 'Denial'이다. ⓒ 티캐스트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변호인단은 립스타트는 물론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 기회마저 매몰차게 차단한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왜 변호인단이 의뢰인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막았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어빙이란 자의 인간됨을 살펴봐야 한다.

어빙은 히틀러 신봉자다. 8살부터 히틀러에게 심취했고, 독학으로 독일어를 배웠다. 그는 이렇게 익힌 독일어로 신나치 앞에서 히틀러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주문을 왼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 있다. 이 시기는 독일 통일 이후 신나치가 발호한 시기와 맞물린다. 어빙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자. 전 생애에 걸쳐 히틀러를 신봉해온 어빙에게 이 시기는 주류로 입성할 절호의 기회였다.

어빙으로선 홀로코스트가 실제 벌어졌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히틀러는 절대적 무오류의 존재다. 어빙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건 그만큼 히틀러를 향한 신심이 깊다는 방증이다. 이런 이유로 사실 왜곡을 일삼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짓된 신념으로 뭉친 자에게 사실을 들이 밀어봐야 소용없다. 그는 자신 앞에 주어진 사실을 또다시 왜곡할 것이니 말이다. 암만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해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제 어빙은 생존자를 모욕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줄리어스 변호사나 램프턴 변호사가 립스타트의 법정 증언을 막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자칫 법정 공방 와중에서 물타기 될 수 있음을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이다.

변호인단은 아주 전략적으로 움직인다. 우선 배심원들을 배제한다. 어빙이 배심원들을 상대로 선동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이어 법정에서 어빙을 철저하게 고립시킨 뒤 왜곡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로 포위하려 한다. 램프턴 변호사는 이를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다녀왔다. 또 법정 변론 시엔 의도적으로 어빙과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은 물론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에서다.

립스타트는 처음엔 변호인단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램프턴 변호사의 변론을 지켜보며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모든 주장을 동등하게 대우해선 안 된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데보라 립스타트의 법정 투쟁을 통해 진실을 날조하려는 세력과의 싸움이 쉽지만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데보라 립스타트의 법정 투쟁을 통해 진실을 날조하려는 세력과의 싸움이 쉽지만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 티캐스트


분명, 어빙은 악이다. 나치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를 아예 부정한다. 그러나 그는 영악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생존자의 증언 가운데 허점을 찾아 한껏 부풀리곤 생존자들을 모욕하는 데 명수다. 그뿐만 아니다. 법정 변론에서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었던 가스실의 존재마저 의심케 만든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이때 어빙은 영악하게도 취재진의 기사 마감이 임박한 시점에 이 같은 주장을 내놓는다. 어빙의 간계는 성공했다. 다음 날 신문 지면은 어빙의 주장으로 도배된 것이다. 이자의 주장을 접한 대중은 '홀로코스트에 관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진실이 있는 건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립스타트의 변호인단은 이 같은 사태전개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립스타트나 다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법정 증언을 원천 봉쇄한 것이다. 변호인단은 우선 사실들을 수집해 어빙의 주장을 하나하나 무력화시켜 나간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 '팩트폭행'을 가한 것이다. 이어 그가 비뚤어진 확신의 소유자임을 입증하는 데 주력한다.

립스타트는 법정에서조차 장광설을 늘어놓는 어빙이 미웠고, 그래서 곧장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오히려 어빙이 더욱 기세등등해질 것이 분명했다. 사실 어빙이 원하는 게 바로 이런 일이었다. 이에 립스타트는 한편으로는 괴로워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자기부정을 통해 변호인단과 뜻을 맞춘다. (이 영화의 원제는 'Denial'이다. 우리나라에선 '나는 부정한다'로 소개됐지만, 영화의 흐름을 보건데 '나를 부정한다'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실 우리는 립스타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특히 그렇다. 아직 피해 할머니들이 생존하고, 위안부의 존재를 입증할 기록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가해자인 일본 정부는 모르쇠다. 이 와중에 한일 양국의 극우세력은 피해 할머니를 욕보이는 발언으로 2차 가해를 가한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를 피로 물들인 가해자 전두환씨도 마찬가지다. 전씨는 태연하게 그날의 진실을 외면하면서 희생자들 앞에 흰소리를 일삼는다. 이 자들과 싸우러 승리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재판이 끝난 뒤 립스타트는 비로소 발언권을 얻는다. 그녀는 몰려든 취재진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주장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선 안 된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존재한다."

누구나 주장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존재한다. 지구는 둥글고,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으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여성을 성노예로 삼았고, 전두환씨는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진실은 이토록 분명하지만 이를 왜곡하는 자들은 시대마다 끊임없이 고개를 든다.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선 먹잇감을 던져주면 안 된다. 그보다 계속된 연구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꾸준히 확보해 나가는 한편, 촘촘한 그물망을 짜서 거짓된 세력의 숨통을 틀어막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거짓과 싸움에서 매번 승리할 수는 없다. 때론 고통스러운 패배도 감수해야 한다. 거짓과의 싸움은 그래서 쉽지 않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주 한인매체 <뉴스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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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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