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어쩌면 절망의 역치가 꽤 높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원래 그렇게 태어났든, 아니면 알리가 지금 누리는 삶을 보고 추측하건대 절망할 거리가 너무 많아 무의식적으로 절망의 역치 높이기 과정을 지나왔든, 어쨌든 알리는 지금 이런 삶이라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5년 만에 느닷없이 나타난 아들 샘에게 남이 먹던 음식을 먹여도, 가게에서 훔쳐온 조그마한 장난감을 아들 손에 쥐여 주어도, 알리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아니, 알리는 별로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지도.

절망의 끝에서 만난 사랑

 사고 이후 처음으로 밖으로 나온 스테파니. 그 옆의 알리는 그저 덤덤할 뿐이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밖으로 나온 스테파니. 그 옆의 알리는 그저 덤덤할 뿐이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알리는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고, 본능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격투기와 섹스를 한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연락처를 남기고, 여자가 오케이 하면 같이 잔다. 아들을 다룰 때도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작고 귀여운 아들에게 잘해주고도 싶지만, 한편 수가 틀리면 함부로 다룬다. 어떻게 보면 그는 꽤 폭력성이 짙은 사람인 듯 보이는데 (잘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는 폭력적이지 않다. 고고히 살아가는 짐승처럼 그는 관심이 있는 것에 달려들고, 화가 나면 몸부림을 치지만, 그곳엔 어떤 의도나 잔인한 목적 같은 건 없다.

'알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영화를 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이란 '잘 모르겠다'이거나 '무심하게 본다' 정도일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드러나지 않기에 우리는 아주 잠깐 스치는 표정의 변화나 행동만으로 그를 판단할 수 있다. 어찌 됐건 어떤 일이 닥치든 알리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제 삶에 닥친 일이든, 타인에게 닥친 일이든 그렇다. 우연히 한 번 만난 게 전부인 스테파니(마리옹 꼬띠아르)가 다리를 잃고 알리를 불렀을 때 알리는 조심스럽게 행동하지만 (스테파니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심스럽지는 않다. 1년 내내 울고 있는 사람에게 티슈를 건네주기는 하지만, 우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처럼. 왜 우냐, 울지 마라, 라고 말하는 대신 커튼을 치고 밖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밖에 나가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알리다.

그리고 알리의 이런 태도가 예기치 않게 스테파니를 절망에서 건져 올린다. 알리와 함께 밖에 나온 스테파니의 감정은 다리를 잃은 후 줄곧 느끼던 감정에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그런 스테파니에게 알리는 자기는 수영을 하겠다며 너도 하겠느냐고 묻는다. 대답이 없자 왜 그러느냐고 재차 묻는 알리에게 스테파니는 "몰라서 묻냐"라며 황당해하는데, 알리의 다음 말이 스테파니를 바다로 이끈다. "누가 보든 말든 어때요." 알리의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에 용기를 얻은 스테파니는 바지를 벗고 이어 브래지어까지 푼 후 바다 저 멀리까지 헤엄쳐 나아간다. 알리 등에 업혀 바다를 벗어나며 스테파니는 말한다. "이제야 살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부터 스테파니는 아주 조금씩 절망에서 빠져나온다.

단 한 줄기의 빛이 되어준 사람

 다소 투박해 보일 수 있는 캐릭터가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정제된 몸짓과 표정으로 다신 없을 캐릭터로 탄생했다

다소 투박해 보일 수 있는 캐릭터가 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정제된 몸짓과 표정으로 다신 없을 캐릭터로 탄생했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이 영화는 무심하고 투박한 듯한 남자가 지닌 선량한 마음에 사랑을 느끼는 여자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의 '그저 그런 삶'이 누군가에겐 '단 한 줄기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하는 이야기이다. 스테파니는 알리를 만나 다시금 삶의 의욕을 얻고, 알리는 스테파니를 만나 사랑을 배운다. 절망 끝에 서서 자신이 절망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남자와 절망 끝에 서서 절망을 한 몸으로 겪은 여자는 서로의 존재로 인해 달라진다. 절망한 사람에게 바로 이 '달라진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기적 같은 일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아들이 꽁꽁 언 호수에 빠지던 순간은 알리의 삶에서 처음으로 절망의 크기가 역치를 넘어가던 순간이었다. 아들이 사랑스럽긴 했지만, 그 소중함이 얼마만큼인지는 깨닫지 못했던 알리는 손가락뼈가 부러지도록 얼음을 두드려 아들을 건져 올리면서 자신이 아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와 자신에게도 '실은 소중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는다. 세 시간의 사투 끝에 의식이 돌아온 아들을 생각하며 흐느끼던 알리가 스테파니에게 나를 버리지 말라며 "사랑해"라고 말했던 건 '실은 소중했던 것'에 스테파니 역시 포함되어 있어서였다. 영화의 결말을 보자 알리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이렇게 정리되면 좋을 것 같았다. <러스트 앤 본>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해"라고 말한 남자 이야기라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러스트 앤 본 마리옹 꼬띠아르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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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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