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 에드워드가 수잔에게 보내온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

전남편 에드워드가 수잔에게 보내온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소설을 읽을 때면 자연스레 주인공에 감정 이입하게 된다. 페이지를 쓱쓱 넘기며 주인공의 생각이나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그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되어, 나를 응원하듯 그를 응원한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끔 겪는 난처한 상황은 우리가 응원하는 인물이 결코 착하거나, 윤리적이거나, 완벽하거나, 멋지지 않다는 데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읽고 연쇄 살인마 그르누이에게 왠지 모를 정을 느낀 독자가 한두 명일까.

아무리 악인이어도, 현실에서 보면 1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이어도, 소설에서 만나면 공감하게 되는 마법. 이 마법의 원인에는 '많은 정보 제공'이 있다고 소설가 김연수는 말한다. 김연수는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독자가 감정 이입하는 대상은 다른 등장인물보다 더 구체적인 정보를 더 많이 보여주는 쪽이다. 더 구체적으로 더 많이 알게 되면,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라고 말했다.

 소설을 읽으며 점점 토니에게 빠져들어가는 수잔

소설을 읽으며 점점 토니에게 빠져들어가는 수잔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19년만에 전남편의 소설을 받다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수잔(에이미 아담스)이 전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가 쓴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의 주인공 토니(제이크 질렌할)에게 빠져드는 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토니에게 닥친 비극에 몸서리쳐가면서도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건 물론 이야기의 흡인력 때문이겠지만 토니를 응원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토니의 인생을 갈가리 찢어 놓은 살인자에게 합당한 응징이 내려지고, 토니가 이 시간을 견뎌내 미래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으면 좋겠는 마음.

하지만 소설은 수잔의 입장에서 보면 섬뜩한 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수잔이 서서히 깨달아갈 즈음 살인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전에 수잔이 에드워드에게 했던 말이다. "너는 나약해." 너는 로맨틱하고 섬세하지만 나약하기도 해서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를 떠날 수밖에 없다는 수잔의 말은 마치 소설 속 살인자가 토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에드워드의 삶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그러니까 에드워드는 지금 토니를 이용해 수잔에게 말을 걸고 있다. 네가 내 삶을 어떻게 해 놓았는지 똑바로 보라고. 제이크 질렌할이 에드워드와 토니를 함께 연기하는 이유도 그 둘이 같은 사람이어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우리와 소설을 읽는 수잔은 알게 된다. 토니가 살인자에게 행하는 응징이 바로 에드워드가 수잔에게 가하는 응징이라는 걸. 토니가 살인자를 총으로 쏘았다는 건, 제 아무리 상상으로 지어 올린 이야기 속일지라도 에드워드가 수잔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는 의미라는 걸. 20년 전 나를 상처 준 너에게 보내는 나의 복수. 영화 제목이기도 하고 에드워드가 쓴 소설 제목이기도 한 '녹터널 애니멀스(야행성 동물)'는 에드워드가 불면에 시달리는 수잔에게 붙인 별칭이었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수잔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상징으로 가득한 소설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책을 다 읽고 덮어도 도무지 그때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알 길이 없는 경우가 있다.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도 마찬가지다. <녹터널 애니멀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수잔은 왜 에드워드를 만나러 나간 걸까. 그것도 그렇게 설레는 표정을 하고서. 그리고 에드워드는 왜 약속까지 잡아 놓고 나오지 않은 걸까. 이 마지막 장면은 소설가인 에드워드와 수잔에게 버림받은 에드워드가 합심해 만든 복수의 하이라이트였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 저녁을 먹으며 서로 '네가 나의 첫사랑이야' 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의 기간은 짧았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 저녁을 먹으며 서로 '네가 나의 첫사랑이야' 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의 기간은 짧았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그대로 되갚아 주겠다 

수잔을 토니에게 감정 이입시켜 수잔으로 하여금 에드워드를 그리워하게 만든 동시에 그런 수잔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 한 마디로 농락하는 것, 에드워드는 오로지 자기가 당한 걸 그대로 수잔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에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러니 수잔이 소설을 제대로 읽어냈다면 레스토랑으로 에드워드를 만나러 나오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미 에드워드는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수잔이라면 소설에서 토니의 최후를 보고도 그 뜻을 읽어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토니의 최후가 의미하는 건, 수잔을 사랑하던 에드워드는 죽고 없다는 뜻이니까. 수잔이 레스토랑에 앉아 긴 시간 기다리는 모습을 혹시 밖에서 지켜봤다면 에드워드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녹터멀 애니멀스 제이크 질렌할 에이미 아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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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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