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명의 수취인을 위해 편지를 배달하는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시)

단 한명의 수취인을 위해 편지를 배달하는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시) ⓒ 영화사 진진


황홀한 바다 풍경을 배경 삼아 어부의 고단한 삶이 비추는 현장. 석양이 지기 전에 작은 배들이 뭍으로 돌아오고, 뒤이어 낡은 그물을 정리하는 어부들의 소란스러움이 묻어나는 작은 마을이다. 해변 마을의 정취는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그곳이 터전인 이들에게는 바다만큼 지겨운 것도 없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어부의 삶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청년 마리오 루오폴로. 그에게 광활한 바다는 막막하기만 한 존재이다. 단조로운 일상을 이어가던 중, 우연히 '임시우편배달부' 모집공고를 보게 된 그는 단 한명의 수취인을 위한 우편배달부가 되어 자전거를 타고 해변마을을 달리게 된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작은 섬이 배경이 된 영화 <일 포스티노>는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파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원작이다. 원작을 모티브 삼아 1994년에 처음 관객을 만났는데 올해 약 20년 만에 재개봉했다. 빈티지한 영상은 편지라는 고전적 매개체, 이탈리아의 수려한 풍광과 어우러져 찬사를 자아낸다. 게다가 민중이 사랑할 수밖에 없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살았던 격동 어린 시대가 그 안에 있다.

'사랑' 그리고 '고통 받는 민중'들을 위한 시로 주목받던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시대의 변혁을 꿈꾸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가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던 시기는 그야말로 격동을 거스를 수 없던 때이다. 그 당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실제 머물기도 했던 이탈리아 나폴리의 작은 섬. 영화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섬을 배경삼아, 물들지 않은 새하얀 종이처럼 순박한 배달부 청년을 만들어냈다. 청년 마리오가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다가서는 소통의 과정은 진지하지만 꽤 코믹스럽다.

 "저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

"저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 ⓒ 영화사 진진


은유의 마법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시인 네루다가 궁금해진 섬 청년 마리오. 자연스레 네루다의 시가 그의 일상을 차지하게 된다. 여자에게 인기 많은 시인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품는 마리오에게 던지는 네루다의 해답은 명쾌하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주변을 산책하라'는 시인의 답은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의 다른 종류이기도 했다. 그저 지나치며 살던 주변을 깊숙이 탐닉하는 과정을 통해, 글에 문외한이던 사람이 언어의 물꼬를 트게 되는 변화는 가히 감동적이다.

"이상해요. 그러니까 이상한 느낌이 왔어요. 모르겠어요. 단어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요. 바다처럼. 뱃멀미하는 것처럼. 배가 단어들 사이에서 튕겨져 나오는 것 같았어요."

"그게 은유야."

표현하지 못한 무수한 감성들이 마음 속 출구에 응집되어 언어로 나타나게 되는 순간. 영감은 순간적으로 탄생한다. 시를 접하고, 그제야 자신이 속한 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한 마리오. 그 변화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름다운 곳으로 향할 수 있는 인간의 어떤 의지를 발견함에 있다. 아름다운 언어를 사랑하게 되면서 폭넓은 시야와 충만한 감성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 세상은, 마리오에게 온통 은유의 대상이었다, 그 첫 시작은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다.

 "저 사랑에 빠졌어요. 계속 아프고 싶어요."

"저 사랑에 빠졌어요. 계속 아프고 싶어요." ⓒ 영화사 진진


시로 인해 세상을 마주하다

베아트리체라는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마리오가 펼치는 구애작전은 시가 전부다.

"당신의 미소는 장미, 갑작스런 은빛 파도."

꽃 같은 언어가 쌓여 사랑의 결실로 이어지고, 마리오는 사랑에 뜬 눈을 다시 감지 않고 세상을 바라본다. 시인 네루다에게는 체포영장이 기각되어 조국 칠레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기쁜 소식이 날아온다. 얼마 후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작은 섬을 떠난 시인, 그리고 남겨진 청년 마리오의 달라진 삶. 시인 네루다가 주었던 빈 노트를 펼치며 드디어 시를 쓰기 시작한 남자는, 시인이 남기고 간 진짜 선물을 그제야 깨닫는다. 빈 노트에 적어 내려가는 은유, 그 것은 세상을 제대로 보고자 하는 자기의지로까지 확장된다.

"사람은 의지가 있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어."

선거가 코앞인 기간에만 공약을 주장하며 반짝 환심을 사는 정치인의 행태에 회의감을 품는 것. '가진 자'들의 착취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순진한 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고뇌에 빠지는 것. 투표를 통해 선거에 당선되자마자 마을 주민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수도공사를 전면중단 해버리는 비열한 정치인에게 분노하는 것.

파블로 네루다의 사회적 의지는 그가 두고 간 물건들과 함께 아름다운 섬을 떠나지 않았다.

고기를 획득하는 단순한 도구였던 그물은 서글픈 옷을 입는다.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크고 작은 파도의 움직임, 절벽을 내리꽂는 섬의 바람, 덤불에 이는 바람, 별빛이 반짝이는 섬의 밤하늘. 그리고 베아트리체의 뱃속에서 쿵쿵대는 아기의 심장소리까지…. 어느 것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감성으로 그에게 달려든다.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힘에서 시의 언어가 튀어 나온다. 언어가 그에게 온 순간, 세상도 그에게 왔다.

 "그 분은 제가 시인으로 아무 가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친구처럼 대해 주셨어요."

"그 분은 제가 시인으로 아무 가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친구처럼 대해 주셨어요." ⓒ 영화사 진진


민중이 사랑한 시인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파블로 네루다의 격렬한 삶은 이탈리아의 대자연과 언어의 아름다움에 묻혀 영화 내부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간과할 수 없는 실재임엔 틀림없다. 영화 중반, 인간의 투쟁에 관한 '모두의 노래'라는 시를 마리오에게 설명하며 잠시 처연했던 시인의 눈빛. 그것은 낮은 지붕의 이웃에게 품는 사랑이다. 조국 칠레의 탄광지역 로타에서 만났다는 노동자들의 땀과 모래로 범벅이 된 얼굴, 고생으로 찌든 굳은살을 가슴에 박고 산다는 시인.

"어딜 가시든지 우리의 고통을 알려주십시오."

고통 받는 민중의 당부는 시인의 언어로 비밀리에 재탄생하여 불티나게 팔렸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죽던 1973년, 피노체트의 주도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칠레는 한순간에 독재정권을 맞이했다. 무려 17년 동안이나 인권을 탄압하며 권력을 유지한 군부독재로 인해 고통 받았던 칠레의 민중. 하늘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통탄에 젖었을 시인의 심경이, 쓸쓸하고 충격적인 영화 막바지에도 전이된 느낌이다. 고통의 역사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전 세계를 흐른다. 먹먹한 가슴을 누를 길 없는 마음이 관객에게 가 닿는다.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 http://blog.naver.com/rnjstnswl3 중복게재
일 포스티노 파블로 네루다 마시모 트로이시 시가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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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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