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니 모레티의 영화 <나의 즐거운 일기>(1993) 한 장면.

난니 모레티의 영화 <나의 즐거운 일기>(1993) 한 장면. ⓒ La Sept Cinema


한국의 예술 영화 애호가들에게 제54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들의 방>(2001), 재작년 개봉한 <나의 어머니>(2015)로 친숙한 난니 모레티는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들을 영화로 풀어내는 제작 방식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난니 모레티는 영화에서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만 풀어내지 않는다. 10대 시절부터 이탈리아 로마 거리 곳곳에서 벌어진 혁명의 기운을 느낀 모레티는 좌파적 성향을 가지게 되고, 이후 만들어진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당대 이탈리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설파하고 주지시킨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정치적 구호를 영화라는 방식으로 가장 근사하게 표현한 이는 단연 난니 모레티 감독이 아닐까. 난니 모레티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중에서 가장 알려진 작품은 1993년 만들어진 <나의 즐거운 일기>이다. 제47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나의 즐거운 일기>는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 <패배>(1973)부터 줄곧차게 이어진, 모레티의 자전적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든 흥미로운 영화다.

<나의 즐거운 일기>에서 모레티 감독은 이탈리아 로마에 살고 있는 영화 감독 '난니 모레티' 그 자체로 등장한다. 감독이 영화 전면에 등장해서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줄기차게 늘어놓는 터라 사적 다큐멘터리라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철저히 각본대로 진행되고, 계산된 콘티대로 움직이는 극영화이다.

<나의 즐거운 일기>는 크게 '베스파를 타고', '섬들', '의사들' 등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이야기인 '베스파를 타고'에서 모레티는 자신이 아끼는 스쿠터 베스파를 타고 로마 시내 곳곳을 돌아다닌다. 자기가 평소 좋아하는 동네와 건물들을 지나가고 바라보며, 갖가지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기도 하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엉뚱한 말을 건네며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극장 안으로 들어선 모레티는 비평가들은 엄청난 극찬을 보냈지만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본 결과 황당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었던 영화와 그 영화에 찬사를 보냈던 비평가들에게 유쾌한 복수를 꾀한다.

 난니 모레티의 영화 <나의 즐거운 일기>(1993) 포스터.

난니 모레티의 영화 <나의 즐거운 일기>(1993) 포스터. ⓒ La Sept Cinema


이어지는 '섬들' 에피소드에서, 신작 구상 차 친구 제랄도와 함께 시나리오 쓰기 좋은 조용한 섬들을 찾아 나서지만 그들의 여정은 실패로 끝난다. 비록 모레티가 원하던 대로 시나리오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모레티는 산업화 이후 급속도로 변해가는 이탈리아의 풍경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던 의미있는 계기로 삼는다.

마지막 이야기인 '의사들'은 실제 림프선 종양으로 수술을 받아야 했던 모레티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다. 수술을 받았던 당시 찍었던 영상을 자료화면으로 보여주던 모레티 감독은 그동안 의사들에게 받았던 처방전을 빠짐없이 모아놔 눈길을 끈다. 도대체 모레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극심한 가려움증 때문에 피부과를 찾았던 모레티는 의사에게 피부 가려움증을 완화시켜주는 약을 처방 받는다. 그럼에도 가려움증이 낫지 않자, 모레티는 같은 병원의 다른 의사에게 찾아간다. 그러자 그 의사는 동료 의사의 처방이 잘못 되었다면서, 다른 약을 준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모레티는 피부과로 유명한 의사를 어렵게 찾아간다. 평소 모레티의 팬이라고 밝힌 유명한 의사는 엄청난 양의 약을 처방해 주면서, 모리티에게는 특별히 약값을 깎아줬다고 귀띔까지 해준다. 의사의 말을 믿고 한꺼번에 많은 수의 약을 삼켰지만, 가려움은 더 심해지고 하다못한 모레티는 중의학 센터(한의원)에 찾아간다. 중의학 센터 또한 모레티의 가려움증을 해결해주진 못했지만 중의학 의사들의 친절함이 좋아 자주 찾아간 모레티. 어느날과 다름없이 치료를 받던 중, 현재 받고 있는 치료가 그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파악한 중의학 의사의 충고에 따라 엑스레이와 CT를 찍게 되고 가려움증의 원인이 피부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림프선 종양 때문이었음을 그제서야 알게된다.

<나의 즐거운 일기>에서는 확실한 주제와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전달하지는 않는다. 굳이 세 개의 에피소드로 점철된 <나의 즐거운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1990년대 초반 당시 모레티가 실제 겪고, 느낀 바에 대한 여정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모레티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생각들을 영화로 풀어 냈을 뿐이고, 이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영화를 만들 당시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자신의 경험담으로 녹여 표현하지만, 모레티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야기로 규정하고자 한다.

쉴틈없이 이탈리아의 사회적, 정치적 모순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 모레티는 그 자신 또한 그러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희화화한다. 이탈리아를 둘러싼 민감한 정치적, 사회적 소재를 논하는 모레티 영화를 별다른 부담없이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힘은 여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관객들이 모레티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려들든지 모레티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이탈리아의 현실을 비판해왔고,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정치적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난니 모레티를 비롯한 모레티 영화 속 모든 등장 인물들은 동시대의 이탈리아의 상황을 상징하는 풍자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난 12일부터 5월 2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이야기의 재건4'라는 테마 하에 난니 모레티의 <나의 즐거운 일기>를 비롯한 그의 초기작과 알랭 레네의 <스모킹/노스모킹>(1993), 최근 개봉한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비롯한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을 만날 수 있다. 삶과 이야기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한 질문이 곧 영화적 서사로 이어지는 영화들을 소개하는 '이야기의 재건4'에서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를 연구하고 재구성하는 감독들의 영화들을 통해 각자 인간의 욕망 또는 자아와 사회의 관계성에 대한 통찰의 결과물을 탐구하고자 한다.

<좋은 꿈>(1981), <빨간 비둘기>(1989), <4월>(1998) 등을 비롯한 난니 모레티의 초기작, 국내에서 볼 기회가 흔하지 않았던 알랭 레네의 <스모킹/노스모킹>, 홍상수의 최신작들까지 함께 큰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난니 모레티의 <나의 즐거운 일기>는 4월 27일, 5월 11일 두 차례 상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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