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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결의'였다.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진원지이자 대안적 공동체 운동의 근거지로 '농촌'을 주목한 청년들이 무작정 귀농을 결행했다. 고령화, 과소화에 사회적 인프라가 열악한 작은 시골 마을을 선택했다. 나도 그 길에 올랐다.

애초에 길은 없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걸어가면 그것이 곳 길이 된다는 루쉰의 말처럼 척박한 동토를 희망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묵묵히 버텼다. 그렇게 10년이다. 책 <기적 아닌 날은 없다 : 공동체, 농촌 그리고 마을복지>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의 지역일체형 농촌복지공동체인 '여민동락공동체' 10년의 기록이다.

'꿈'을 묻는 복지, '꿈'을 꾸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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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 아닌 날은 없다> 표지 .
ⓒ 오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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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양극화와 불평등이 지배하는 곳. 공공성은 고사하고 시장이 제공하는 흔한 서비스마저도 접하기 어려운 곳. 단순한 생활의 불편함을 넘어서 당장의 생존조차 위협을 받을 수 있는 곳. 의료, 교육, 문화, 교통, 복지 등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는 곳. 거듭되는 인구유출과 고령화로 마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한 농촌은 전원의 로망 대신 생존의 치열한 사투가 일상화 된 곳이다.

"팔십 평생 살았어도 나한테 꿈을 물어봐 준 사람이 없었는지. 허기사 어디 꿈꾸고 사는 세월이었간디요. 살려고 살았제. 일제시대 태어나서 애기 때부터 먹고 살라고 일했고, 나이 든께 얼굴도 안 보고 시집왔제라우. 새끼들 키우느라 일했고, 일만 하다가 늙어부렀제잉. 근디 뭔 꿈이 있었겄소야. 지금 사는 것이 어디 사람 사는 것이라요. 사람이란 것이 지 손으로 일해서 지가 벌어먹고 살아야 사람이제. 죽을날만 기다림서 경로당하고 집만 왔다 갔다 하는지, 이게 말이 아니제라우." (78쪽)

여민동락의 진짜 역사는 어르신의 결정적인 한 마디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어르신이 꿈꾸는 노후란 그저 스스로 벌어 손주들에게 당당하게 용돈을 줄 수 있는 삶,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내 힘으로 살아내는 인격적인 삶이었다. 무심코 던진 질문에 돌아온 어르신의 대답은 여민동락이 복지-경제-마을이 결합하고 선순환하는 농촌마을 재생과 부흥의 설계도를 그리는데 상상력을 제공했다. 모싯잎 송편공장의 등장은 어르신들의 '꿈을 여쭙는 과정'에서 시작된 낯선 도모(78쪽)였다.

오늘날 농촌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이다. 빈곤율이 50%에 육박한 노인들의 삶은 어떤가. 존엄한 존재로 인정받고 예우받기보다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주변부로 계속 밀려나고 있다. 현실이 이러한대 농촌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의 삶은 오죽하랴. 공공성은 사라지고 복지가 곧 돈이 되는 세상에서 국가와 사회는 어르신들의 존엄한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 인생의 종반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겪는 삶의 위기는 곧 있으면 닥칠 미래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공동체의 관계와 원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마을살이를 통해 삶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할 수 있을까. 저자인 강위원 여민동락공동체 대표살림꾼은 "여민동락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는 돌봄 복지를, 건강한 어르신들에게는 스스로 생활이 가능할 수 있도록 행복 일자리를, 지역 주민들에게는 건강한 마을과 바른 이웃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응원하고 힘을 보탠다"며 "그것이 바로 마을 생태계의 원칙이자 복지의 정도라 판단했다"고(76쪽) 설명한다.

꿈을 묻는 복지, 마을의 자연력을 키우는 공동체 복지, 함께 꿈을 실현해나가는 마을공동체의 복원. 소규모 노인복지센터에서 출발한 여민동락이 모싯잎 송편 공장을 짓고, 어르신들의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고, 경로당을 마을학교로 꾸리는 등 '문어발'식(?) 확장을 단행한 이유다.  

자주, 자립, 공생의 마을공동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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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공동체의 꽃, 동락점빵사회적협동조합 .
ⓒ 오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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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파마머리 몽강마을 이맹임 할머니. 거동이 불편하여 울타리 밖으로는 거의 나가시지 않는 홀몸 어르신이다. 그런데 갑자기 음료수를 열 박스나 주문하셨다. 동네 사람들이 평소 당신을 잘 챙겨줘서 그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으니, 박스에 이름을 써서 몰래 옆집에 배달해 달라셨다. 누구는 허물어진 뒷담을 쌓아줬고, 누구는 비오는 날마다 음식을 해서 나눠줬고, 누구는 텃밭 흙을 갈아줬고, 누구는 뭘 해 줬고....마을이라 해봐야 열두어 가구 사는데 선물이 열 박스니 온 동네 사람들에게 답례를 하신 셈이다."(126쪽)

시골이 푸근한 이유, 아직은 사람 사는 정이 있기 때문이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 안부를 살피고 도와드린 건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마을주민들이었다.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웃이 이웃을 돌보는 관계 중심의 마을복지는 더불어 사는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여민동락은 시설 복지의 한계를 넘어 마을에서 주민들의 호혜적 연대망을 복원하고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복지공동체를 꿈꾼다.

이맹임 할머니 이야기는 42개 자연마을의 이동점빵인 '동락점빵사회적협동조합'의 에피소드다. 필요한 먹거리와 생필품들을 싣고 마을을 순회하는 동락점빵은 구멍가게 하나 없는 묘량면의 유일한 '이동슈퍼'인 셈이다. 점빵 차량은 단순히 물건만 팔지 않는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기도 하고, 복지 서비스가 필요한 어르신들의 연계를 도와주는 이동 복지상담소 역할도 한다. 마을 구석구석 안 가는 데가 없으니 자연스레 주민들 속사정도 듣게 된다. 묘량면에서 마을살이의 꽃인 동락점빵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뿌리가 튼튼하면 당연히 꽃은 핀다 해다. 동락점빵을 세우고 자리를 잡게 한 건 여민동락이지만, 이를 키우고 살려가는 힘은 주민에게서 나온다. 협동조합으로서의 전환은 동락점빵을 여민동락의 소유에서 마을의 공유로 바꾸는 걸 의미한다. 그게 협동조합 성장의 올바른 방향이자 바른 길이다. 사회적 경제의 튼튼한 바탕은 본래 농촌이다. 서로 손을 맞잡고 나눔과 공유의 가치를 높이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사람과 지역이 공생하는 세상! 우리들의 오래된 희망이자 도전이다. 지금 우리에게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는 실종됐다. 사회가 우울하다. 국민이 비탄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마을에서 마을사람과 함께 마을자치를 이뤄가며 우리들의 나라, 평민들의 공동체를 가꾸어야 한다. 동락점빵 협동조합의 길이 그렇다. 아주 작은 도전이지만, 농촌 주민들 스스로 이뤄가는 풀뿌리 자치의 텃밭이다. 마침내 이 텃밭은 협동하는 이웃과 함께 스스로 살피고 돕고 살리는 농촌마을공동체의 드넓은 평야로 확장돼 나갈 보물이다."(109~110쪽)

성장만이 미덕이던 시절에 '마을'은 소외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더불어 살기를 고민하기보다 남보다 앞서는 것에 열중했다. 그러나 서서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지배하는 세상이 곧 우리 모두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마을의 부상은 변방에서 중심으로 끊임없이 탈주를 거듭해왔던 역사법칙의 자연스러운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마을'은 시대의 화두다. 환경위기와 경제위기가 중첩된 미증유의 위기 앞에서 벼랑끝에 선 인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날마다 낮아지고 날마다 실패하며

경로당에서 열리는 마을학교
▲ 주민 스스로 배우고 익히며 경로당에서 열리는 마을학교
ⓒ 오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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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민동락 10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었다. 공동체 내부의 크고 작은 부침과 내홍도 있었다. 저자는 "대체로 전사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사람은 좋은데 함께 살기엔 부적격인 사람, 농촌엔 왔는데 도시인 껍질을 안 벗고 사는 사람, 민주주의를 말하는데 민주주의자는 아닌 사람, 입 주장은 센데 몸 실천은 약한 사람,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딴 곳을 기웃거리기 일쑤인 사람, 자신의 저력은 평범하면서 동료들이 일궈 온 역사를 쉽게 보는 사람, 침묵의 성실이 초년생 비법인데 논쟁과 판단이 실력인 줄 착각하는 사람. 결국 모두 실패한다"(6쪽)고 술회한다.

여민동락 구성원들은 농촌의 부흥과 재생을 위해서는 '독립군'이 필요했지만 뜻만 정의롭다고 저절로 되는 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사회적 실천 없는 개인적 실천은 자기 기만이 되기 쉽다. 반대로 개인적 실천 없는 사회적 실천은 자기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다. 개인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결합을 통한 삶의 변혁과 진보. 말이 쉽지 현실은 날마다 고통이고 전쟁이었다. 경영과 활동과 운영의 조화를 이루어야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초창기 세웠던 과제도 현재진행형이다.

저자는 "사람살이에 공식이란 없다. 뜻이 만나면 길을 열어갈 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맞춰 가는 것 말고 무슨 묘책이 있겠는가. 날마다 낮아지고 날마다 실패하며 나아가는 길이 공동체의 길"(6쪽)이라고 했다. 변방의 시골마을에서 살림살이의 진보와 마을공화국 완성을 꿈꾸는 여민동락공동체의 새로운 10년은 어떤 모습일까.

덧붙이는 글 | <기적 아닌 날은 없다>(강위원 지음 / 도서출판 오월숲 펴냄 / 2017.2 / 10,000원)
책 값은 1만원입니다. 널리 읽혀 공동체와 농촌, 그리고 마을복지의 확장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저자의 뜻에 따라 독자 여러분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습니다. 또한 기존의 출판유통망이 아닌 지역의 동네서점과 연대하고 농촌마을의 재생과 부흥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판매합니다. 주문전화 : 062-710-8536



기적 아닌 날은 없다 - 공동체, 농촌 그리고 마을복지

강위원 지음, 오월숲(2017)


태그:#여민동락공동체, #강위원, #마을공동체, #동락점빵사회적협동조합, #마을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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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 농촌에서 하루 하루 잘 살기 위해.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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