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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가 지난해 11월 창사특집 대기획으로 내보낸 3부작 다큐멘터리 3부, <수저와 사다리>.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국회의원 등 8명의 참가자들이 부루수저란 보드게임을 하는 과정을 통해 양극화된 한국의 현실과 기본소득제의 가능성을 흥미롭게 비췄다.
▲ 수저와 사다리 SBS가 지난해 11월 창사특집 대기획으로 내보낸 3부작 다큐멘터리 3부, <수저와 사다리>.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국회의원 등 8명의 참가자들이 부루수저란 보드게임을 하는 과정을 통해 양극화된 한국의 현실과 기본소득제의 가능성을 흥미롭게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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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참가자가 보드게임을 한다. 부루마블을 본 딴 '부루수저'란 게임으로 규칙이 유사하다. 본래 부루마블은 지구 전체를 무대로 토지를 사는 등 자산을 불리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를 파산시키는 걸 목표로 한다. 참가자는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수만큼 전진하는데 상대의 땅에 도달하면 통행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부가 이전한다.

부루수저 게임은 부루마블과 조금은 다른 형식으로 진행된다. 참가자 모두는 추첨에 따라 금수저와 은수저, 동수저 가운데 하나의 계급을 부여받는다. 신분에 따라 자산 역시 차등 지급된다. 이후 참가자들은 자신의 자산을 늘리고 상대를 파산시키기 위한 게임에 돌입한다. 1시간 뒤 이들이 가진 자산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상은 SBS가 지난해 11월 창사특집으로 기획한 다큐멘터리 '수저와 사다리' 편의 개요다. 국회의원 표창원을 비롯해 사업가와 변호사, 학원강사, 대학생 등으로 이뤄진 8명의 참가자가 부루수저 게임에 임한다.

전반전 1시간이 경과한 뒤 중간평가가 이뤄졌다. 1000만원을 갖고 게임을 시작한 금수저는 316만원이 늘어난 1316만원을 가졌다. 500만원으로 출발한 은수저들은 각 650만원, 445만원, 386만원으로 전반을 마쳤다. 100만원으로 시작한 흙수저들의 상황은 참담했다. 이들 가운데 두 명은 41만원, 16만원으로 초기자본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돈만 갖고 있었고 다른 두 명은 5만원과 92만원의 빚까지 졌다. 흙수저 모두와 은수저 일부의 자산이 금수저와 은행으로 이동한 꼴이다.

세금을 걷고 공평하게 나눴더니 확 바뀐 후반전

다큐는 매장된 지하자원을 통해 얻은 수입을 배당의 성격으로 구성원들과 나누는 미국 알래스카주가 미국에서 가장 평등한 주라고 소개한다.
▲ 수저와 사다리 다큐는 매장된 지하자원을 통해 얻은 수입을 배당의 성격으로 구성원들과 나누는 미국 알래스카주가 미국에서 가장 평등한 주라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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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양상은 후반전에 돌입하며 완전히 뒤바뀐다. 게임을 지배하는 사회자가 참가자 모두의 자산과 소득에 세금을 매기면서다. 이렇게 걷은 세금은 정해진 시기마다 참가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배분된다.

이쯤되면 다큐멘터리의 목적이 명확해진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이슈화되며 터져나온 기본소득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적극적 과세와 기본소득 지급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사회의 지속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란 입장을 취하는 듯하다. 전반 이후 바뀐 규칙이 부의 양극화를 완화하고 취약계층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게임의 끝에서 금수저와 은수저의 부엔 크게 변동이 없지만 흙수저의 빚은 크게 줄어든다. 빚이 줄어드니 의욕이 없던 흙수저 참가자들이 게임에 관심을 보인다. 전체 판에 활기가 돈다. 게임은 부익부 빈익빈의 구도에서 지속가능하고 완만한 발전상으로 옮겨간다. 사라지는 건 흙수저들에게 빚을 내주었던 금융권의 영향력이고 늘어나는 건 흙수저 계층의 재정 자립도다.

기본소득제는 정부가 사회적 자산을 구성원 모두에게 화폐로 지급하는 제도를 말한다. 알래스카와 같이 지하자원에 대한 배당 형식으로 기본소득제를 정착시킨 곳이 있는가 하면 핀란드는 올 1월 1일부터 국가단위로는 유럽 최초로 기본소득제 실험을 시작했다.

스위스에선 지난해 기본소득제 도입을 놓고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성인에게 월 300만 원, 미성년제에게 월 78만 원을 매달 지급하겠단 것으로 포퓰리즘이란 비판 속에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됐으나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석유와 같은 지하자원의 지원 없이 기본소득제가 정착한 곳은 지구상에 아직 없다. 하지만 노동자의 설 곳이 위협받는 오늘날 기본소득제 논의가 상당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93년 전 나온 책이 보여준 통찰

책 표지
▲ 사회신용 책 표지
ⓒ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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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은 노동자의 자리를 위태롭게 한다. 단순 노무직은 물론 의사와 회계사, 기자 등 고도의 지식과 책임의식을 필요로 하는 직종 역시 기계에 의해 대체될 것이란 분석도 많다.

장기적으로 기계가 노동자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면 기업의 대척점엔 노동하지 않는 소비자만 존재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노동의 몰락이 소비자의 몰락으로 이어질 경우 기업, 나아가 자본주의 전체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기본소득제는 피부로 와 닿는 위협 가운데 꺼내들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다. 얼핏 좌파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처럼 여겨지지만 오랜 역사와 철학적, 경제적 근거가 있는 주장임이 분명하다. 역사비평사가 지난해 4월 펴낸 <사회신용>이 그 근거 가운데 하나를 세밀히 보여준다.

책은 '왜 기본소득이 필요한가'란 부제를 표지에 크게 박고 나왔다. 역사비평사는 이 책이 '단지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빚에 기대어 우리를 억압하는 은행신용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회신용론의 창시자 클리포드 H. 더글러스의 역작'이라며 '기본소득의 철학적 토대를 이뤘다'고 한껏 띄웠다.

물론 기본소득이란 개념은 더글러스에 앞서 18세기 미국 정치인 토마스 페인이나 19세기 샤를 푸리에와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상가의 글에서 수차례 등장한 개념이다. 16세기 초 토마스 모어가 불세출의 고전 <유토피아>에서 "생계형 절도범들에게 끔찍한 처벌을 가하는 대신 모두에게 약간의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고 적은 것도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더글러스의 이 책은 빚을 통해 부재한 수요를 창출해내고 그로부터 사회구성원들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금융의 이면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더글러스는 빛나는 통찰력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과다한 빚을 지게 만드는 은행의 영향력을 해체하고 기본소득제를 통한 부족한 수요를 만회해야 한다는 구성을 밝힌다. 이 책이 나온 게 무려 90년도 더 전인 1924년이니 이 책에 대해 기본소득의 철학적 토대라 평하는 것도 그리 과도한 해석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심도 깊은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수저와 사다리>는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 가운데 하나인 가로수길 토지 100곳 가운데 증여와 상속된 곳이 무려 42곳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 수저와 사다리 <수저와 사다리>는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 가운데 하나인 가로수길 토지 100곳 가운데 증여와 상속된 곳이 무려 42곳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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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세계경제를 바라본 더글러스의 착상은 매우 단순하다. 기업이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임금과 각종 배당을 모두 합쳐도 기업이 생산한 제품의 총가격에 도달하지 못하므로 경제실패가 이뤄진다는 것. 더글러스는 당시 시장이 구매력과 상품의 총량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식민지를 통해 수요를 창출하고 금융권이 내주는 빚을 통해 메우는 방식으로 몸집을 불리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같은 방식이 금융의 영향력을 과대하게 키울 뿐 아니라 다수 대중이 은행신용에 억눌리는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안으로 국민배당과 같은 방식을 통해 소비자들의 구매능력을 키워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궁극적인 기술발달에 따라 인간 노동력이 자연에너지를 쓰는 기계에 의해 대체될 수 있고 그 경우에도 국민배당과 같은 방식은 효과적인 대안이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책은 출판사 측의 홍보와 달리 기본소득제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보다는 사회신용을 통해 소비와 생산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당시의 경제체제가 필연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빠른 해법이 필요하다는 경고의 목적에 충실한 저작이다. 그리고 이 같은 주장 대부분은 고도화된 현대 경제이론에 의해 파훼됐거나 이미 상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어서 독서의 의의가 그리 크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이 언뜻 내비친 기본소득과 관련된 주장은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문제제기와 깊이 닿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회신용 / 역사비평사 / 클리포드 H. 더글러스 지음 / 2016. 04. / 12800원>



사회신용 - 왜 기본소득이 필요한가

클리포드 H. 더글러스 지음, 이승현 옮김, 역사비평사(2016)


태그:#사회신용, #클리포드 H. 더글러스, #역사비평사, #수저와 사다리,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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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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