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자>에서 최영희 역으로 출연한 배우 김영애.

영화 <애자>에서 최영희 역으로 출연한 배우 김영애. ⓒ (주)시너지하우스


"죽음을 앞두고 아까운 건 연기뿐."

죽기 전, <연합뉴스>와 마지막으로 가진 인터뷰에서 배우 김영애는 그렇게 말했다. 죽는 순간에도 연기자였던 김영애. 김영애라는 인간의 삶에는 여러 차례의 굴곡이 있었지만, 그의 연기만큼은 굴곡 없이 항상 인상적이었다. 한 배우에게 그런 굴곡 없는 연기를 볼 수 있단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1971년 M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 마지막 작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을 마칠 때까지 김영애는 자신이 맡은 바를 뛰어넘어,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이 대중의 뇌리에 남는 연기를 펼쳐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삶은 배우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변화하라

 드라마 <로열패밀리> 속 김영애. 그녀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드라마 <로열패밀리> 속 김영애. 그녀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 MBC


"누구의 엄마보다는 배우 김영애로 보이는 역할이 많았고, 내 목소리를 내는 역할이 많았죠. 그것이 사실 배우로서는 복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 최나영 기자, OSEN, [Oh!쎈 탐구] "난 누구의 엄마보단 배우였다"... 故 김영애 대표작 5선(10일) 중에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배우의 역할은 '누군가의 엄마'로 한정되기 쉽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표현할 수 있는 배역이 줄어들고 한정되는 것은 배우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김영애 역시 '엄마'로서 해야 하는 역할을 줬지만, 김영애라는 배우는 '국민 엄마' 같은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다. 드라마 <로열패밀리>에서 그룹 최대 주주인 철의 여인으로 분할 때도, <황진이>에서 최고의 춤꾼 백무로 분할 때도, 영화 <카트>에서 비정규직의 현실을 처절하게 보여줄 때도 김영애는 '엄마'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그곳에 꼿꼿이 선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거기 있다고 소리칠 줄 아는 배우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엄마이기도 했다. 영화 <애자>나 <변호인>에서 김영애는 철저히 엄마로서의 모성애를 보여준다. 그러나 누군가의 엄마여도 그 애처로움과 슬픔을 처절하게 표현해 낼 줄 아는, 김영애는 엄마도 인간이라는 진리를 깨우쳐주며 단순한 배경이 아닌 이야기의 긴장감의 정점에 서 있었다. 백 편이 넘는 작품을 할 동안 김영애는 한 번도 규정된 적이 없었다. 어떤 역할을 맡겨도 완벽하게 표현해 낼 줄 아는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철저한 갑에서부터, 더는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그의 다양한 이미지의 변화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역할에 들어맞는 타고난 연기자였을 것 같지만, 그에게도 캐스팅 논란은 있었다.

"시대극 '형제의 강'이 1996년 작품인데, 내가 도회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미스 캐스팅이란 소리가 나왔어요. 나한테는 연기의 폭을 넓힌 작품입니다. 어머니상을 구축한 작품이고요. 작품도 좋았고 연기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 윤고은 기자, <연합뉴스>, [단독]김영애 마지막 인터뷰... "죽음 앞두고 아까운 건 연기뿐"①(10일) 중에서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김영애는 드라마 <형제의 강>에서 편견 섞인 시선에 직면했지만, 드라마가 끝날 때쯤엔 김영애는 가장 큰 감동을 준 배우 중 하나로 기억된다. '어머니'로서의 역할 역시 김영애에게 있어서는 나이 듦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또 다른 변신이었다.

정체되지 않고, 어느 역할이든, 어느 곳에서든 마다치 않은 연기의 열정이 그를 귀부인으로, 춤꾼으로 비정규직으로 그리고 국밥집 아줌마로, 또 엄마로 만들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배우의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정체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겸손하라

 드라마 <황진이>에서 백무 역으로 분했던 김영애. 당시 학춤 장면은 많은 시청자에게 각인된, 인상 깊은 명연기였다.

드라마 <황진이>에서 백무 역으로 분했던 김영애. 당시 학춤 장면은 많은 시청자에게 각인된, 인상 깊은 명연기였다. ⓒ KBS


"배우는 이미 한번 만들어진 것에 옷을 입히는 역할이에요. 그런데 작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배우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운 좋게 좋은 배역 만나서 명예를 얻는 거잖아요. 배우가 그리 잘났나? 아니에요. 좋은 배우, 좋은 역할은 모두가 같이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 늘 겸손해야 해요." - 윤고은 기자, <연합뉴스>, [단독]김영애 마지막 인터뷰... "죽음 앞두고 아까운 건 연기뿐"①(10일) 중에서

최고의 연기를 펼쳤던 작품 <황진이>에 대해 말하며 연기를 못할까 봐 두려웠다고 밝히며 김영애는 이렇게 말했다. 주인공 '황진이'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감을 보였던 연기자가 연기에 대한 자신감이 아닌 두려움으로 출발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항상 새로운 대본을 받고, 이전에 했던 타성에 젖은 연기가 아니라 새로운 연기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낮은 자리에서 노력하는 자세가 김영애의 완벽한 연기를 만들었다.

대배우라는 타이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잘났다고 교만하지 않고 모두와의 조화를 만드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놓은 김영애의 태도는 깊은 울림을 준다. 주목받는 연기를 펼친 것조차 자신이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게' 좋은 배역을 만나 명예를 얻은 것이라는 김영애. 성공을 거머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노력과 힘을 과신하기에 십상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사람의 도움과 행운이 있었음을 잊지 않는 것. 그런 겸손함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포기하지 말아라

 김영애의 마지막 작품이 된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그는 마지막까지 배우였다.

김영애의 마지막 작품이 된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그는 마지막까지 배우였다. ⓒ KBS


김영애가 마지막 작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을 찍을 당시에는 이미 췌장암이 재발하여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연기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김영애는 "연기만이 나를 살게 한다"고 말하며 <월계수> 출연을 강행했다. 사망 두 달 전인 2월까지도 촬영에 매진한 것이다.

이후 김영애는 2015년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황이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당시 췌장암이 재발해 <부탁해요 엄마> 출연을 포기한 것도, 3~4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고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애는 연기에 대한 집념과 열정으로 2년을 더 살아냈다. 이후에도 <닥터스> <마녀보감>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만 살아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던 그는, "몸부터 챙기라"는 주변의 걱정에도 "연기 안 할 때 아프고, 오히려 연기할 때는 몸이 좋다"며 웃어 보였다.

김영애의 후배 이정은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영애가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당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드라마 같진 않구나!' 전하기도 했다. 김영애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수차례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현실과 이야기 속의 죽음이 같을 수는 없다. 김영애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한 연기를 되돌아보았다.

이정은은 이어 "죽음을 앞에 두고도 선생님은 '내 연기가 부족했구나'라고 하셨다"며 김영애에게 "죽는 순간까지도 연기를 생각하셨다"고 말했다. 죽는 순간까지 연기자로서 삶을 마감한 김영애. 안타까운 것은 연기뿐이라는 그의 말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이 가진 것을 불사르는 모습에 신도 감동해 그에게 2년이라는 삶을 선물로 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배우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삶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우동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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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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