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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잡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마주하곤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질서있게 타고 내리는 것이 가능함에도 굳이 사람들을 비집고 움직이는 이들을."
 "혼잡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마주하곤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질서있게 타고 내리는 것이 가능함에도 굳이 사람들을 비집고 움직이는 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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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하철에서 겪은 일. 당시 열차는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기 때문에 역에 도착하자 나는 내리는 사람들을 위해 타는 줄로 나와 비켜서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채 모두 내리기도 전에, 누군가 나를 밀치며 지하철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나는 그런 행동 자체도 언짢기 그지없었지만, 낯선 이가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게 불쾌해 획 돌아서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랬더니 한 나이 든 여성분이 또다시 나를 밀치며 들어가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리고 타는 게 원칙일 뿐더러 어차피 나도 다시 탈 텐데 줄에 섰으면 순서를 지켜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퇴근길이었다. 실랑이까지 하기엔 너무나 피곤했다.

아마 이 같은 일을 겪는 게 나 뿐은 아닐 것이다. 혼잡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마주하곤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질서 있게 타고 내리는 것이 가능함에도 굳이 사람들을 비집고 움직이는 이들을. 가령 내 지인은 열차가 아직 역에 도착하지도 않았음에도 자신을 밀치며 문으로 향하는 한 남성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 역시도 나의 경우처럼 나이가 든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실 잘 이야기하진 않지만, 내게 앞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불편함을 준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다. 그리고 이는 내게 큰 딜레마였는데 '대중교통에서 사람들을 밀치며 타고 내리는 이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라는 말은 사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편견을 덧씌울 수 있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경험적으로 이는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했다. 그래서 이 문제는 한동안 나에게 난감하고 꽤나 조심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었다.

비가시화 된 노년 인구의 대중교통 경험

마거릿 크룩섕크의 책 <나이듦을 배우다>
 마거릿 크룩섕크의 책 <나이듦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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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 문제를 다시 떠올린 것은 <나이듦을 배우다>라는 책을 읽으면서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80세 이상의 여성이 신호등이 바뀌기 전 길을 절반 정도 밖에 건너지 못한다는 연구를 인용하며 이런 주장을 한다. 교통 신호등이 늙은 여성이 서둘러 가도록 조작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간으로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지금껏 내가 누락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왜 나이 든 사람이 대중교통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질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고령의 노인들에게 붐비는 지하철이나 버스가 어떤 공간으로 다가올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곳에서 그분들이 과연 나와 똑같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가령 서두에서 언급한 일을 생각해보자. 책이 언급하듯 낙상은 나이 든 사람들에게 큰 공포다. 고령이 아닌 사람들에 비해 노인들은 한 번 넘어지면 골절을 입기가 쉽고 회복은 비교적 더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친 몸은 안 그래도 느려진 거동 탓에 불편한 이동을 더욱 힘들게 만들 것이다. 흔들리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선 종종 나조차도 중심을 잡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안전하게 앉아서 갈 자리나 단단하게 붙들고 설 고정물이 절실하다. 그런데 그 위치까지 다다르는 일을 발 디딜 틈도 없는 공간에서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마쳐야 한다? 당연히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을 밀치며 급하게 대중교통을 타고 내리는 행위 뒤에는 두려움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혹은 안전하게 내려야 할 곳에서 하차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나는 참담함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우리는 더욱 느려질 필요가 있다

다른 모든 사회적 구성물들이 그렇듯 공간 역시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개개인의 몸 상태에 따라, 특정 공간에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일상을 영위하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가의 수준은 판이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껏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문제 제기가 줄곧 이어져 왔지만, 사안의 중대함에 비하면 이 이슈가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는 나이 든 사람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익히 알려져 있듯 한국은 노년 인구의 큰 증가를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들의 대중교통과 도시 공간 경험에 주목하지 않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혹은 횡단보도 앞에서 두려움에 떨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이미 그러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일 나이 든 사람들의 걸음걸이 패턴이나 일상생활 주기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어떤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노인들의 이동 속도와 방식, 거동에 있어 의존하는 도구의 유무와 종류, 대중교통을 사용하는 주 시간대와 이유를 안다면. 어쩌면 우리는 버스와 지하철의 운행 속도를 노인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준으로 조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관공서와 보건 시설의 운영 방식을 정비해 비교적 대중교통이 한산한 시간대에 고령인 사람들이 이를 이용하도록 장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횡단보도의 신호등 불바뀜 속도는 노인들이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도록 재조정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 사회의 속도가 전반적으로 느려짐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잃는 것과 얻는 것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아마 '전에는 겪지 않던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대안이 절실하다

얼마 전 나의 지인은 버스에서 본 한 노인 남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 그는 벌떡 일어나 자신이 다음에 내려야 한다고 기사에게 큰 소리로 알려주었다고 한다. 알겠다는 답변이 돌아왔지만 그는 또 한 번 자신의 하차 사실을 알리고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해하던 동료는 그 노인이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 느린 걸음으로 출구로 가 조심스레 철재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곤 알게 되었다고 한다. 비교적 느리고 부상을 입기 쉬우며 잘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 몸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원하는 위치에 안전하게 하차하기 위해선 그 같은 행동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가 만일 나이 든 사람들의 걸음걸이 패턴이나 일상 생활 주기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어떤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우리가 만일 나이 든 사람들의 걸음걸이 패턴이나 일상 생활 주기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어떤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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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의 깊은 관찰력이 없는 사람에게 그 노인의 행동은 고작해야 알 수 없는 '유별남' 정도로 여겨질지 모른다. 혹은 누군가는 '나이 든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지나치게 시끄럽게 군다'는 스스로의 편견을 강화시켰을 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별다른 계기가 없었다면 '지하철에서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았다'는 식의 생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두려움에서 촉발된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짜증 나는 것만으로 여겨지는 간극이 존재하고, 이것이 특정 인구 집단에 대한 낙인을 강화시키는 상황이 과연 올바르다고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문제와 관련한 깊은 고민과 심층적인 연구, 대안 도출은 무척이나 절실하다.


태그:#대중교통, #노인, #나이듦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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