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마시는 술이 대세다. 술자리라 하면 대부분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음식과 감정과 대화의 과잉이 오고 가는 곳이지만 혼자 마시는 술자리는 다르다. 오감의 중심은 오롯이 내 가 되고, 이왕이면 그 오감에게 좋은 걸 먹이고, 보여주고, 듣게 하고 느끼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감정의 사치'를 혼술이라는 의식으로 치러내고 싶을 때 적격인 영화가 있다. 마이크 피기스의 1995년작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Mike Figgis, 1995)다.

 영화 <라스 베가스를 떠나며> 포스터

영화 <라스 베가스를 떠나며> 포스터. 보고 나면 술을 마시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혼술이 생각날 땐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밥줄 삼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한 운명적이고 기특한 영화다. 2000년대 초반생일 즈음, 이 영화를 비디오가게에서 대여해서 보고는 한걸음에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생일에 받은 돈을 다 털어 OST CD와 소장용 VHS를 샀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눈을 부릅뜨고 볼 영화라기보다는 관조하는 것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회화 한편을 바라보듯 보고 있으면 화수분처럼 뿜어 나오는 우아한 폐수(廢水)와 몽롱함에 잠식된다. 술에 취하는지, 영화에 취해 가는지 가늠하기 힘들어진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성매매 여성'인 사라와 알코올 중독자인 벤의 사랑 이야기 이다. 할리우드에서 스크린 라이터로 일하는 벤은 극심한 알코올중독으로 해고된 상태.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자금 삼아 술로 자살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베이거스에 도착한다. 사라는 거리에서 일하는 성매매 여성이다. 둘은 이 지극히 인공적이고 신기루 같은 공간,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나 벤의 남은 수명만큼이나 짧은 사랑을 하게 된다. 둘은 연인 관계를 시작하면서 서로에게 약속을 하나씩 교환하는데 사라는 벤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는 말을 하지 말 것이고 벤은 사라에게 몸 파는 직업을 가진 것에 대한 불만을 느끼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는 사랑하는 벤이 술에 찌들어 죽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고 이를 종용하기에 이른다. 벤 역시 몸을 파는 사라의 직업에 대한 반감이 늘어만 간다. 서로에 대한 금기 사항을 깨버린 두 사람은 헤어지기에 이르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쓸쓸히 죽음을 맞는 벤 옆을 사라가 지키며 영화는 끝난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의 주연은 이 두 사람이기 이전에 라스베이거스 라는 공간이다. 도시는 이들에게 젖과 꿀이 있는 유토피아임과 동시에 금기가 깨어지는 에덴으로서 다층적 알레고리들이 혼재하는 공간으로 전시된다.

죽음 앞둔 알코올 중독 남자와 성매매여성의 사랑
베이거스는 시간이 멈춘 공간이기도 하다. 아침저녁이라는 시간적 분리가 무색하게도 도시는 24시간 동안 깨어 있고, 사람들은 카지노에서, 바에서, 사창가에서 밤낮을 지우며 육체를 소모한다. 베이거스라는 공간은 반은 죽어있고 반은 살아있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아닌 24시간을 살 수 있는 마법 같은 공간이다. 따라서 벤이 베이거스로 오는 것은 인생을 끝내기 위함이라기보다, 현실에서 이미 죽어버린 자신에게 벌어주는 새로운 인생이고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로 기능한다. 이러한 도시에서 사라가 몸을 팔며 '먹고' 살아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베이가스가 죽음이나 타락이 아닌 이들에게 생명이고 밥줄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섭리를 거역한 아담과 이브가 원죄(original sin)라는 굴레에 쓰이듯, 술을 위해서 생명의 분계를 저울질한 아담과 욕망을 담보로 육체를 매매한 이브는 형벌을 받는다. 아담은 죽음으로 이브는 종속과 상처로. 술에 취하고 값싼 오르가슴을 토해내는 벤과 사라의 시선에서의 베이거스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흔들리는 카메라와 이미지가 녹은 듯 보이는 아웃 포커싱을 통해 관찰된다.

또한, 이를 전달하는 컬러 톤은 도시의 네온들이 뿜어내는 알록달록한 총 천연의 향연이 아니다. 이 공간이 마치 기억에서만 존재하듯, 오랜 흑백 사진에서나 보이는 닳고 바래버린 옅은 브라운 빛이다.

 영화 <라스 베가스를 떠나며>

두 사람의 사랑은 슬프다. 두 사람의 처지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이 영화를 자꾸 보게 되는 이유

마이크 피기스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그려내는 '라스베이거스'라는 공간은 최승자 시인의 "개 같은 가을이"의 한 구절처럼, 술과 욕망에 썩어난 "기억의 폐수"가 봇물 넘치듯 쏟아지는 공간이지만, 대부분의 문학작품에서 그렇듯, 아름답지 않은 곳에서의 남녀의 사랑은 더더욱 아름답고 성스럽게만 느껴진다.

특히 성매매 여성 역의 엘리자베스 슈는 이런 감성을 뛰어나게 캐치해낸다. 그녀는 기존의 영화들에서 등장했던 그 어떤 클리셰도 사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껌을 씹거나, 남부 사투리를 쓰거나, 값싼 시선으로 남자 손님을 꾀어낸다거나 하는 등 우리가 보아 왔던 성매매 여성의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철저히 탈피한다. 대신, 그녀는 성매매 여성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상처에 집중한다. 그녀가 (벤을 제외한) 남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람들과의 충돌이 있는 순간에서는 억울함과 서러움이 얼굴 가득 묻어난다. 이 작품에서의 그녀의 목소리는 늘 하이톤으로 발랄한 여성을 연기했던 전작들 (주로 코미디 영화들의 조연으로 출연했다, <칵테일> <백 투 더 퓨처 2·3>)과는 다른, 흡사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곤충 소리 같다.

 영화 <라스 베가스를 떠나며>

서로를 만나면서, 서로의 일상은 바뀌었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며 변화한다.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부러질 듯한 가지처럼 살던 그녀가 벤을 만나면서 일상이 바뀐다. 그녀가 사랑하게 된 이 남자에게 플라스크(휴대용 술 컨테이너)를 선물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영화 등장 후 처음으로 생기 넘치는 표정과 상기된 목소리로 선물을 뜯어보는 벤의 반응을 살핀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서 슈의 연기가 뛰어난 것은 슬픈 연기를 슬프게 하고 기쁜 연기를 기쁘게 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슈의 연기는 리트머스 종이처럼 극단의 레인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 좁은 범위 안에서의 섬세함으로 빛난다. 연기론이 더 우월해서라기보다는 이 작품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 즉 포주에게 노예같이 살며 학대와 상처가 일상이 되어버린 여성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한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이 작품의 엄청난 성공 이후, 니컬러스 케이지가 액션 영화 몇 편으로 이름을 좀 날렸을 뿐, 감독 마이크 피기스도, 엘리자베스 슈도 이만한 성공작을 내지 못했다. 현재로써는 이 세 명의 마이너 아티스트들에게 빛이 되어준 작품임과 마지막 성공작이 된 셈이다.

그러한 씁쓸함이 작용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늘 보는 이들에게 서럽고 우울한 감정을 갖게 한다. 그 서러움과 우울함이 그리워져 또 영화를 보게 하고, 또 술을 찾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그니쳐 곡인 돈 헨리 버전의 'Come Rain or Come Shine' 을 볼륨을 키워 듣고 있자면, 라스베이거스의 구석 벤치에 앉아 도시의 나약함과 얄팍한 쾌락에 취해가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혼술 술 영화 니콜라스 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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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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