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은 기본적으로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잔소리하고 야단을 치기도 하면서, 자기 나름의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춘기 이후의 자녀들은 스스로 이미 한 사람의 성인이라는 의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으므로, 말로만 이래라저래라 해서는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잘못하는 게 뻔히 보여서 하는 말인데도, 자기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부모들은 더 안달복달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가짐에서 나가는 말들은 더욱 자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집니다.

이 부녀, 화해할 수 있을까

 <토니 에드만>의 한 장면. 루마니아에 위치한 경영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이네스(산드라 휠러)는 아버지 빈프리트(페터 시모니슈엑)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경계심을 표한다.

<토니 에드만>의 한 장면. 루마니아에 위치한 경영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이네스(산드라 휠러)는 아버지 빈프리트(페터 시모니슈엑)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경계심을 표한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이 영화 <토니 에드만>은 어느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통해, 부모 자식 관계가 품고 있는 애증의 감정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농담과 장난이 일상인 음악 교사인 빈프리트(페터 시모니슈엑)는 오랫동안 의지해 온 반려견이 죽자, 루마니아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는 이네스(산드라 휠러)를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거래처의 계약 연장을 위해 뛰고 있는 이네스는 빈프리트에게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거래처 CEO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그의 새 아내가 루마니아에서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죠. 이에 실망한 빈프리트는 짐을 싸서 이네스의 집을 나와 독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예고 없이 맞이한 아버지와 보낸 주말이 너무나도 끔찍했던 이네스는, 결국 재계약 건을 성사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간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구들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납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아버지가 평소 잘하는 이상한 분장을 한 채 자신을 '토니 에드만'이라 부르며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그때부터 어딜 가나 출몰하는 아버지 때문에 이네스는 복장이 터집니다.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는 초반 1시간 정도까지는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162분에 달합니다- 등장인물의 목표가 명확하게 제시돼 있고 심리 묘사도 구체적이어서 꽤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습니다. 딸이 아버지의 진심을 깨닫고 내적으로 성장하며 일에서도 성공하게 된다는 식의, 일반적인 할리우드 성장물처럼 전개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지요.

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그런 예상을 빗나갑니다. 우선 빈프리트의 밑도 끝도 없는 돌출행동은 이네스를 번번이 당황스럽게 만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는 관객도 불편하게 만듭니다. 장면에서 장면으로 넘어가는 논리도 이네스의 심리적 변화에 기초하기 때문에 느닷없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껄끄러운 아버지의 존재를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는 이네스의 변화 과정을 관객 역시 체험하게 만든다는 장점 또한 분명합니다.

주인공 이네스 역할을 맡은 샌드라 휠러의 연기는 흡인력이 대단합니다. 목표를 위해 가차 없이 돌진하는 독일 병정같이 차가운 모습에서, 사춘기 소녀처럼 번민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이네스의 다양한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녀의 감정 상태를 지속해서 추측하며 따라가야 하는 이 작품의 특성상, 다른 어떤 배우라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을 보여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닫힌 마음을 열다

 <토니 에드만>의 한 장면. 산드라 휠러는 주인공 이네스의 다양한 심경을 인상적으로 연기하며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

<토니 에드만>의 한 장면. 산드라 휠러는 주인공 이네스의 다양한 심경을 인상적으로 연기하며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분투하는 직장인의 삶은 과도한 스트레스로 얼룩지게 마련입니다. 늘 실패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하고, 긴장을 풀기 위한 소비 생활과 음주·가무는 자신의 삶을 점점 피폐하게 만들지요.

늘 성차별적 시선과 불평등한 대우에 시달려야 하는 여성 직장인의 경우는 더 심할 것입니다. EU에 가입한 이후 루마니아에서 지속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변화의 최전선에서 분투 중인 이네스의 하루하루는 그런 삶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그렇게 바쁜 자신의 삶에 무작정 뛰어든 엉뚱한 아버지가 귀찮고, 이해할 수조차 없었던 이네스는 나중에 가서야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세상이 정해 놓은 틀에 맞추느라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던 겁니다. 독일 대사임을 자처한 아버지와 함께 들어간 어느 공방에서 그녀가 부르는, 휘트니 휴스턴의 'Greatest Love of All'의 가사처럼요.

이네스의 닫힌 마음을 열고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게 한 것은, 갖은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꿋꿋하게 자기 갈 길을 간 아버지 빈프리트의 방식입니다. 만약 그가 다른 부모들처럼 뻔한 충고를 말로만 늘어놓았다면 어땠을까요? 이네스는 분명히 귓등으로 흘려 듣고 말았겠죠. 빈틈없이 단단하게 쌓아 올린 그녀의 인생관에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멀어진 자녀와의 관계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모들이 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조언이나 물질적인 지원이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거라는 '착각' 말입니다.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자녀들은 대부분 부모의 삶의 방식에 대해 실망하거나 오해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부모들에겐 자신의 인생이 자녀들의 본보기가 되지 못한 점은 무엇이고, 전달하지 못한 진심은 어떤 것인지 돌이켜보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진솔한 모습을 보여 줄 때야 비로소 자녀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의 이네스처럼요.

 <토니 에드만>의 포스터. 부모 자식간의 애증어린 관계를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 낸 수작이다.

<토니 에드만>의 포스터. 부모 자식간의 애증어린 관계를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 낸 수작이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토니 에드만 산드라 휠러 페터 시모니슈엑 마렌 아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