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많은 이들이 인용하거나 좌우명으로 삼는 문장이다. 특히 사유나 지식 습득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발견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문구를 애용하곤 한다. 사실 문장의 원래 의미와는 조금 동떨어진 사용 방식이긴 하다. 성경에서 예수는 저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면'이라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 문장 속 '진리'는 신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매우 종교적인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이 문구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주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제는 신을 경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실을 마주하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 말이다. 나만 해도 대학 시절 저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다.

그러나 점점 공부를 이어나갈수록 나는 저 문구에 의구심을 가졌다. 진리는, 그리고 진실은 정말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나? 물론 깨우침의 과정이 주는 지적인 즐거움은 있었다. 하지만 때로 어떤 진실은 너무 끔찍해서, 이런 걸 알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듯 살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을 들게 하곤 했다. 배움을 통해 마주한 세상의 부조리는 너무 깊고 막연해서 도무지 이겨낼 수 없다는 망연자실함이 느껴지는 때도 잦았다. 자유? 벗어나는 게 애초에 가능은 한가?

사실 알면 알수록 힘이 된다는 것은 보편적인 명제가 아니다. 어떤 경우 그것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거나 미치게 만드는 일이다. 가령 역사 속 선구적인 여성 지식인들을 보자. 올랭프 드 구주나 슐리미스 파이어스톤 같은 사람들 말이다. 한 사람은 진실을 발설한 죄로 단두대에 올랐고, 한 사람은 직면의 대가로 정신병을 얻었다. 앎이 자원이 되는 경우는 오직 특정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한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진실이 사회화 불화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한나 아렌트가 마주한 반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많은 걸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많은 걸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 Heimat Film


영화 <한나 아렌트>의 주인공 한나 아렌트는 진리를 탐구하고자 한 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독일계 유대인인 그녀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고, 이후 미국으로 도피해 <전체주의의 기원>과 같은 불세출의 저작을 남겼다. 아렌트는 파시즘처럼 인간이 극단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과 그것의 작동 방식을 전 생애 걸쳐 탐구했었다.

아마 그중에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개념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등장하는 '악의 평범성'일 것이다. 이 영화는 그녀가 이스라엘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 참여하고 그 책을 작성하는 과정을 다룬다. 물론 이렇게만 들으면 단순히 아렌트의 지적 황금기를 다룬 영화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정 반대다. 그녀는 원고를 발표한 후 거센 반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악에 대한 탁월한 연구서로 평가받는 지금이기에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아렌트가 그 글을 썼던 시기는 아직도 전쟁과 학살의 책임자들을 한창 처벌하고 책임을 묻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끔찍한 일은 아렌트가 속했던 세대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히만이 엄청난 악마가 아니라 단지 사유와 공감 능력이 떨어졌던 나태한 공무원이라는 주장은 격양된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만다. 심지어 그녀의 글에는 나치에 부역해 같은 민족을 팔아넘겼던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까지도 등장한다. 이는 아렌트의 가까운 동료들의 감정까지도 건드리고 만다. 그것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불편한 진실'이 가져오는 것들

 진실은, 때로 불편하다.

진실은, 때로 불편하다. ⓒ Heimat Film


즉 진리는 그것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만 말하는 이에게 자원이 된다. 물론 나는 보편적인 원칙으로 굳어져 사회에 쉽게 수용되는 사유의 가치를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종류의 진실은 불화와 배제를 예감하게 만들기에, 그것을 알게 된 순간 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아렌트는 이야기하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라고 보았고, 또 다른 파국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있던 공간이 말 때문에 삶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어땠을까. 또 아렌트가 만약 영화에서 본 것처럼 강인한 인물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혹은 무너지거나,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렌트나 그 이전 시기의 여성 사상가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령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여성이나 소수자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긴 시간 동안 그들이 일상에서 겪고 부딪힌 현실을 이야기해 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누군가 세상에 몸을 부대끼며 알게 된 너무나 직접적인 삶의 진실들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들은 얼마나 부정되길 반복됐는가. 여성이 겪는 차별은 소수나 겪는 일탈이고 이들이 이미 상위인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말 앞에서, 소수자들은 이미 너무도 충분히 대접을 받는데 오히려 다수가 괴롭다는 반응을 두고 과연 그들이 아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 속에서 발견한 진실은 정말 자유를 가져다주었나? 오히려 외로움과 절망, 더 큰 고통이 찾아오지는 않았나?

모든 삶의 진실에는 평등한 반응이 필요하다

 모르는 건 결코 약이 아니다.

모르는 건 결코 약이 아니다. ⓒ Heimat Film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외면이 결코 그 사람의 삶에 평온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게 때문이다. 다만 나는 모든 앎과 그것을 말하기가 동등한 대우를 받지 않으며, 그것이 항상 개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음을 말하고 싶다. 마치 영화 속 한나 아렌트가 글을 발표한 순간 끔찍한 협박 편지를 발견하고 친구의 외면을 받게 된 것처럼 말이다.

또한, 누군가의 진실이 차별적인 반응을 마주할 때, 그것은 통념과 선입견의 결과물이 아닌지 숙고해보길 권하고 싶다. 사유를 멈춤으로써 결국 악을 행하고 말았다는 아렌트의 비판은 결코 아이히만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불편한 진실에서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묵살시키는 순간 또 다른 부정은 발생한다.

언급한 것처럼 한나 아렌트는 반발에 직면한 순간에도 학자로서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그녀는 정직했고 용감했으며 강건했다. 그리고 영화의 가장 눈부신 순간들에서 그런 아렌트의 성격이 부각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강의실에서 자신에게 던져진 비난에 반격할 때. 남편에게 이 모든 일이 벌어질 것을 알았다고 해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담대하게 말할 때.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내 머리에 가장 깊게 남은 아렌트의 모습은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그녀가 피로에 젖은 얼굴로 소파에 누워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세상이 환영하지 않을 진실을 알게 된 사람의 민얼굴이 아니었을까. 나는 내가 지금껏 마주했던 주변 사람들의 그런 표정들이 이제는 달라지기를 기원해본다.

한나 아렌트 진실 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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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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