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빌리 엘리어트>에서 천재 신화의 기본 스토리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뭔가 좀 다르다. 무엇일까?

우리는 <빌리 엘리어트>에서 천재 신화의 기본 스토리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뭔가 좀 다르다. 무엇일까? ⓒ 팝엔터테인먼트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가 온갖 역경을 딛고 성공에 안착하는 이야기,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되풀이되는 이야기 구조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기 힘들기에, 일종의 대리만족이라 하겠다. 굳이 보지 않고도 대략을 알 수 있다.

그(또는 그녀)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정작 자신은 모른다. 우연히 눈을 뜨고 그를 이끄는 선생님이 나타난다.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끌려서 시작하고, 점점 더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래지 않아 역경이 닥친다. 태생적으로 불우한 환경, 주위 사람들의 반대, 스스로에 대한 믿음 철회.

어느새 다시 끌리고 결국엔 모든 역경을 이겨낸다. 결정적으로 그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가장 반대했던 주위 사람들이 가장 믿음직한 서포터가 된다. 모두의 기대와 믿음을 한 몸에 받고, 또 자신에 대한 믿음 또한 우뚝, 다시 찾아보기 힘든 성공을 쟁취한다. 우린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이 스토리 라인을 정확히 발견할 수 있다.

'천재'가 아닌 천재를 둘러싼 '환경'을 조명하다

 무수히 많은 천재 이야기들, 분명 거기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 그래서 계속 양산 되는 듯. 반면 이 영화는 천재가 아닌 천재의 환경에 집중했다. 그곳엔 무수한 이야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무수히 많은 천재 이야기들, 분명 거기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 그래서 계속 양산 되는 듯. 반면 이 영화는 천재가 아닌 천재의 환경에 집중했다. 그곳엔 무수한 이야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팝엔터테인먼트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고 심지어 누구라도 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 하지만 유독 이 영화에 수많은 사람이 열광했다. 그것엔 분명 다른 무엇이 있을 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 엘리어트가 아닌 빌리 엘리어트를 둘러싼 것들을 보아야 한다.

1984년 영국 탄광촌, 대규모 파업으로 동네는 마비 상태다. 아빠와 형 모두 광부인 빌리 엘리어트네도 마찬가지.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빌리는 춤을 좋아하는데, 아빠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 못해 권투를 배우러 다닌다.

어느 날 함께 체육관을 쓰게 된 발레수업단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곧 그의 눈은 그곳에 못 박혀 움직일 줄 모르고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발레 동작을 따라 한다. 선생님은 한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발레를 배울 것을 중용한다. 하지만 그에겐 상남자 아빠와 형이 있었고, 무엇보다 '남자가 발레를 하는 건 잘못된 거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당시다. 이후의 스토리는 누구나 익히 알 만할 듯. 빌리는 과연?

영화는 '천재'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 천재의 성장과 고민, 천재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형상화 시키는 요소들, 즉 춤과 행동과 음악들에 집중한다. 그렇게 감독은 지극히 식상한 스토리를 지극히 개념 있는 영화적 스토리로 탈바꿈시킨다. 덕분에 우리는 참으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를 만끽할 수 있다.

상승과 하강, 이 영화에서 보고 느껴야 하는 키워드

 이 영화의 빛나는 성취가 있다면, 상승과 하강의 기막힌 대비에서 보여지는 천재의 이면이다. 절대적 공감의 끝엔, 천재가 천재일 수 있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

이 영화의 빛나는 성취가 있다면, 상승과 하강의 기막힌 대비에서 보여지는 천재의 이면이다. 절대적 공감의 끝엔, 천재가 천재일 수 있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 ⓒ 팝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또 다른 중요 키워드는 다름 아닌 '파업'이다. 정확하게는 파업으로 대변되는 '현실'이겠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천재는 다분히 망상에 가까운, 희망이라는 말도 꺼내기 힘든 '이상'이 아니겠는가. 천재, 아니 한 아이의 성장 그 이면에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괴리가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능력을 입증하는 것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빌리의 점프 장면이 계속된다. 중반부쯤, 빌리가 멋도 모르게 발레 동작을 따라 할 때면 전에 없이 극렬해지는 파업 현장이 비친다. 마지막에 빌리의 점프 장면이 다시 나오는데, 그 직전엔 다시 땅굴로 내려가는 아빠와 형 그리고 엄청난 성공을 한 후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빌리의 모습이 대비된다.

시종일관 상승과 하강의 연속이다. 당연히 상승은 성공과 이상을 하강은 시련과 현실을 뜻하겠다. 빌리가 이상에 가까이 갈수록 아빠와 형은 현실로 향한다. 빌리의 기막힌 재능이라는 씨앗도 아빠와 형의 헌신이라는 거름 없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사실. 이토록 극렬한 대비를 이토록 유려하게 표현해내니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이자 보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와호장룡>에서 아름답고 슬프기까지 한 상승과 하강의 절묘한 대비를 볼 수 있다. 오로지 상승을 목표로 살아왔던 용, 하강이 갖는 부드러운 강함의 경지를 체득한 리무바이. 영화의 마지막, 용이 끝없는 안개 바다로 몸을 던지는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선사한다. <빌리 엘리어트>가 선사하는 바가 이만큼의 감동은 주지 못하지만, 충분히 빛나고 빛나는 성취다.

개천에서 용 안 나는 시대, 엘리어트 가를 응원한다

 빌리가 아닌 빌리 엘리어트 가족을 응원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식상하고 진부하고 고루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

빌리가 아닌 빌리 엘리어트 가족을 응원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식상하고 진부하고 고루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 ⓒ 팝엔터테인먼트


그래서 빌리가 아닌 빌리의 가족, 엘리어트 가를 응원한다. 그들에게서 우리 윗세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구어 '개천에서 용 난다'를 가문의 단 하나의 목표로 삼고 될 성싶은 잎 한 명을 골라 그만을 지원했다. 다른 이들은 현실의 무거운 짐을 일찌감치 지고 평생을 희생했다.

빌리의 아빠와 형은 파업으로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었지만, 빌리를 위해선 자신이 자신일 수 없었다. 그 소박한 이상조차 버리고 현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땅굴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주위에 수많은 사람이, 아니 윗세대에서 '용'이 된 사람들 대부분이 겪었을 이야기다.

이제는 희생으로라도 엮어낼 수 있는 이상적인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꿈도 꿀 수 없는 '천재'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꿈도 꿀 수 없는 '보통 사람'의 성공 이야기가 된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가 참조한 식상한 이야기는, 그래서 또 다른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더욱더 응원하게 된다. 식상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식상하더라도 좋으니 꼭 성공하라고 말이다. '천재'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성공 이야기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릴까 봐 두렵다. 부디 많은 이들이 '빌리 엘리어트'를 꿈꾸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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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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