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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는 친척 집 정수기에 유난히 호기심을 보였다. 레버를 누르면 물이 나오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친척 집에만 가면 매번 정수기부터 확인하곤 했다. 냉수는 몇 번 눌러 보게 도와줬지만, 온수는 절대 손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랬는데도 아이는 어른들이 잠깐 한눈판 사이에 결국 온수 레버를 누르고야 말았다.

아이의 비명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해 얼른 찬물에 씻었지만 상처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응급실로 이동했고, 2도 화상 진단을 받았다. 그 조그맣고 여린 팔뚝에 붕대를 친친 감고 돌아오자니 속상해서, 아이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엄마아빠가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마. 그러니까 이렇게 다쳤잖아."

말하고 나니 어딘가 아찔했다. 지금이야 뜨거운 것을 뜨겁다, 차가운 것을 차갑다고 알려주는 정도지만 나중에도 부모가 늘 정답을 말하는 건 아닐 테니 그건 틀린 말이었다. 나도 아이가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는 아이로 크길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그렇게 자랐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표지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표지
ⓒ 북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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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다 보니, 성인이 된 지금조차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선뜻 욕심을 낼 수 없었다. 부모님이 반대하실 일이 먼저 떠올랐고, 그것을 설득하고 돌파해야 하는 과정이 너무나 멀고 힘겹게 느껴졌다. 그래서 서점에서 우연히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를 발견했을 때, 바로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여겼다.

이 책에는 가상의 커리어우먼 루이와 그녀를 늘 못마땅하게 여기는 루이의 엄마가 등장한다. 루이는 직장에서 꽤 잘 나가는 축에 속하는데도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늘 어딘가 부족하다고 여긴다.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의 계약을 따냈을 때도 루이는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자랑스레 이야기하지 못했다.

직장에서 잘 나갈수록 남자 만나기가 힘들다는 엄마의 지론 때문이다. 루이의 엄마는 늘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루이를 괴롭힌다. 외모나 의상 지적을 일삼고, 루이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말들을 서슴없이 뱉는다.

"서른세 살이나 되었는데 아직 미혼이라니, 내가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30쪽), "사키는 이제 곧 엄마가 되는데 너는 왜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사니? 내가 기껏 정성을 들여 키워놨더니 엄마한테 반항이나 하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51쪽)

엄마가 타박하는 주제는 대개 루이의 결혼 문제다. 말만 들어서는 당장에라도 울컥 분노가 솟구치지만, 그 말의 발화자가 자신을 키워준 '엄마'라는 사실 때문에 루이는 제대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결혼보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려 하면 엄마는 "일, 일, 주제 넘은 소리에 잘난 척이나 하고 대체 뭐하는 거니!"(53쪽) 하는 꾸지람으로 맞대응한다.

부모와의 대화는 논리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풀리지 않는다. 책에서 제시하는 해법은 '거리 두기'다. 설득이 어렵다면, 설득하지 말라고 한다. 이미 성인이 된 사람에게 부모는 '조언자'지, '결정권자'가 아니다. 

이 책에서는 부모를 설득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설득되지 않으면 그냥 적당히 자리를 뜨라고 권고한다. 책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루이와 루이 엄마와의 관계가 아니라 루이 그녀 자신이기 때문이다.

책에는 루이 외에도 부모와 연을 끊은 싱글맘 유리, 매사에 늘 긍정적인 남성 동기 하루 등 다양한 동료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부모와 맺고 있는 관계의 양상을 다각도로 들여다보면서 책은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다 할 정답이 없다는 걸 독자들에게 주지시킨다.

딸은 태어난 성별 하나만으로 '다정다감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인 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성별이라는 태생적 굴레 때문에 삶 전체가 부모에게 저당 잡히는 건 누구에게나 너무나 고되고 힘든 일이다.

"이제 다정다감한 딸은 필요 없습니다. 상냥한 딸은 벗어던지고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157쪽)

이 책의 결론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적으로 튼튼하고 견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부모와의 굴레를 벗어 던져야 한다. 이 굴레는 특히 부모-자식 각각의 손으로 맞잡혀 있어서, 무엇보다도 자식인 내가 놓지 않으면 부모 역시 놓을 수 없다. 좋은 자식이 되려는 강박에서 해방될 때 부모와의 관계 또한 조금 더 먼 발치에서 객관적으로 정립할 수 있다.

엄마 아빠의 딸이기도 하지만 내 딸의 엄마이기도 하므로, 부모와 자식 양쪽의 입장에서 읽고 싶어서 나는 이 책을 두세 번 다시 정독했다. 읽다보니 내가 딸을 임신했을 때 주변에서 건넨 말들이 떠올랐다. "요샌 딸이 최고야. 아들은 장가가면 끝이지만 딸은 계속 부모 옆에서 알뜰살뜰 챙겨준다고." 지인들 입장에서는 물론 축하해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건 딸에게 태어나기도 전부터 많은 의무를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딸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나 먼저 행복해지자.' 부모와의 관계 속에 트러블을 겪는 나 먼저 이 관계를 극복해냈을 때, 딸에게 이러한 관계를 똑같이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다. 착한 딸 콤플렉스를 끊자고 단호하게 마음을 먹어도 다시 부모님의 얼굴을 보면 그런 결심이 쏙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두 번 세 번 곱씹어 읽어야 한다. 자꾸 부모 앞에서 움츠러들어 '나'를 포기하려 할 때 다시 일어나고, 목구멍에 달랑거리는 거절의 말을 힘겹게나마 다시 꺼내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결정권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게 될까? 장시간의 투쟁이 필요한 일이다. 천천히 싸우고, 끝내 행복해지자.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 벼랑 끝을 달리는 엄마와 딸을 위한 관계 심리학

아사쿠라 마유미 & 노부타 사요코 지음, 김윤경 옮김, 북라이프(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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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에디터만 아는 TMI'를 연재합니다.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 2019년 성교육 전문가와 함께 하는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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