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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 22분,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오마이뉴스>는 창간했습니다. 어느덧 창간한 지 17년이 지났고, 시민기자 수는 8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오랜 시간 꾸준히 활동해온 시민기자들의 창간 17주년 소감을 몇 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편집자말]
정체불명의 소포

어느 날, 물건을 찾고 싶으면 베를린 세관청으로 오라는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독일어로 깨알 같은 글씨의 법 조항들이 적혀있다. 덜컥 겁이 났다. 세관청에 도착하니 얼굴에서 무뚝뚝함이 뚝뚝 떨어지는 공무원이 소포 한 덩어리를 테이블에 던지듯 놓으며 묻는다.

"이거 뭡니까?"

순간 소포를 보낼 만한 지인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지만, 포장지와 테이프로 싸매진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수신인 주소를 확인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세관공무원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칼을 건네준다.

"풀어 보세요. 뭐가 들었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판매 목적으로 이 물건을 들여온 것이라면 관세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칼을 집어 들고 소포 포장지에 감긴 테이프를 잘라냈다. 그러자 짜잔- <오마이뉴스> 수첩 두 권과 내 이름이 적힌 명함 한 뭉텅이가 나왔다.

나는 영문으로 적힌 <오마이뉴스> 명함 한 장을 세관 공무원에서 보여주며 말했다. 마치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남녀주인공이 자랑스럽게 주민등록증을 내보이는 것처럼.

"저는 한국 언론사 <오마이뉴스>의 독일 해외통신원입니다. 이건 제 명함이고요."

"Correspondent, Ohmynews" (오마이뉴스 특파원)

세관 공무원이 소리를 내며 읽더니 <오마이뉴스> 명함과 수첩을 건네주며 관세는 내지 않아도 되니 잘 가란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수첩에 적힌 '시민기자 윤리강령과 규약'을 읽고 또 읽었다. 이것으로 나의 독일 해외통신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손에 들려있던 오마이뉴스 수첩이다. 수첩 뒤로 베를린 장벽이 보인다.
▲ 오마이뉴스 수첩 독일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손에 들려있던 오마이뉴스 수첩이다. 수첩 뒤로 베를린 장벽이 보인다.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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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삭제하세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몇 년 전 베를린에서 '위험에 처한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를 취재했을 때였다. 한국의 노조 탄압과 언론 탄압이 주요 화두였다. 토론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새벽 3시까지 기사를 쓰고 잠이 들었다. 그 뒤에 일어날 후폭풍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한국은 밤, 독일 시각으로는 오후가 되자 독일 교민들로부터 내가 작성한 기사를 삭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는 삭제요청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유는 이른바 '종북인사'가 이번 기사에 언급되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종북인사' 딱지를 붙여 비난하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기사를 아예 삭제해달라는 요청은 부당하게 느껴졌다.

냉전은 한참 전에 종결되었고, 이미 통일을 이룬 독일에 살면서도 한국인들이 종북으로 서로를 나누고, 종북이라고 비난받는 것이 두려워 자기 검열을 하는 상황이 답답하고 처참했다. 그때 깨달았다. 그곳이 어디든 한국 사람들 사이에는 아직 이데올로기적 '경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서로서로를 비난하는 댓글들과 답 댓글, 어디서부터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욕설들도 올라왔다. 한 기사에 200여 개가 넘게 달린 댓글들을 밤새 읽고 또 읽었다. 같은 기사에 어떤 이는 자발적 원고료를 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내 눈에는 비난의 댓글들만 콕콕 박혀 들어왔다. 갑자기 사람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갑작스러운 비판과 비난에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키보드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핸드폰을 들고 한국의 지인들 혹은 <오마이뉴스> 편집부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듣고 싶었지만 잠들어 있을 사람들에게 우는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독일과 한국 사이에 8시간의 시차가 존재하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그보다는 한국과 독일 사이에는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가 8시간이라는 시차보다 더 큰 간극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서로 모욕적인 말을 주고받으라고 쓴 기사가 아니었는데', '나 따위가 무슨 기사를 쓴다고...'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곤 했다.

<오마이뉴스>라는 '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 때는 가라앉는 세월호를 보며, 어떻게든 배를 들어 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울면서 <날으는 세월호>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써내려갔다.

독일 현지 시각으로 2014년 4월 16일 밤, 세월호 참사 뉴스를 보고 울면서 이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날으는 세월호 독일 현지 시각으로 2014년 4월 16일 밤, 세월호 참사 뉴스를 보고 울면서 이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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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해져만 하는 한국 상황을 바라보며, 독일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내가 무력하고 죄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오마이뉴스>에 '베를린에서 보내는 그림편지'를 띄워 보냈다.

"이번 기자님 그림 제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으로 했어요. 고맙습니다", "기자님 편지를 읽고 큰 힘이 되었습니다"라는 독자들의 메시지와 쪽지들을 받을 때마다 부끄러웠지만, 그 마음들이 기쁘고 고마워서 베를린 길거리에서 총총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에 절망하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한탄스러울 때마다 한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곤 했다. 독일 언론이 한국의 이번 촛불집회에 대해 감탄할 때 어서 빨리 이 소식을 고국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관련기사: "'촛불' 찬미한 독일 기자 기사에, 울컥했다" "세월호 서명운동에 버럭, 독일인이 남긴 한마디")

'당신은 잘하고 있다고, 촛불을 든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하지만 매번 <오마이뉴스>를 통해 위로를 받은 것은 정작 나였다.

의외로 한국 언론사 중에 나라별 해외통신원이 있는 곳은 많지가 않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에는 독일, 미국,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중국, 캄보디아 등 많은 해외통신원이 있다. 단언컨대, 세계 곳곳의 뉴스를 가장 생생히 담아내는 한국 언론이 바로 <오마이뉴스>라고 자부한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시민에게 나오듯, 모든 시민이 기자인 <오마이뉴스>이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때때로 내가, 나의 글이, 나의 그림이 별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질 때, 혹은 전문적이고 간결하면서도 멋진 다른 기사들을 보며 한없이 나를 자책할 때, 기사에 달린 댓글과 악플들이 가슴을 찌를 때, 그래서 더는 기사를 쓰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편집부의 최유진, 손지은 기자님 덕분에 다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얼굴 빨개질 만큼 실수투성이었던 나의 부족한 원고를 늘 '전문가의 따스한 손길'로 다듬어 주셨다. 말끔히 편집된 나의 그림편지가 <오마이뉴스>에 올라갈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오타를 수정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편집부 기자들의 뒷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특히 몇 년 전 기사 하나로 인해 잠 못 이루고 모니터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던 밤, "기자님, 10년차가 넘은 베테랑 기자들도 댓글과 악플을 보며 무너지곤 합니다... 힘내세요"라는 최유진 기자님의 응원이 없었다면 글쓰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나의 <베를린에서 보내는 그림편지>을 읽어준 바로 당신이 있었기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까지 수없이 망설였던 시간이 유의미해졌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태그:#오마이뉴스와_나, #해외통신원, #독일, #베를린,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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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시각예술가로 활동하다,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였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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