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아가멤논' 공연 사진 지난 12월 13일, 서울 대학로 홍익대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진행된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프레스콜 사진. 총 3부작으로 구성된 <벙커 트릴로지>의 두 번째 작품은, 동명의 희랍 희곡을 원전으로 삼은 '아가멤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독일 저격수와 망명 온 영국 여자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이 비극은 누구의 탓인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독일 저격수와 망명 온 영국 여자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이 비극은 누구의 탓인가. ⓒ 곽우신


제1차 세계대전을 조망한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두 번째 에피소드 '아가멤논'. 이 에피소드의 가장 큰 아쉬움은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기 위해 '여성 참정권'이라는 소재를 너무 대놓고 차용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다소 붕뜨는 차용이기는 하다. 하지만 극 중 여성 캐릭터에게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우는 페미니스트'라는 롤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설정이 단순히 소비되지 않고 극에서 제대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아가멤논'도 분명 의의가 크다.

'아가멤논'은 동명희곡 <아가멤논>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악녀로 설정되있던 '클리템네스트라'를 제1차 세계대전 독일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재구성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서프러제트)에 참여했던 영국인 크리스틴은 독일인 알베르트를 만난다. 처음 알베르트는 "총은 쏠 줄 아냐"라는 질문부터 "여자가 그래도 되요?"라는 질문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크리스틴은 남성이라면 당연히 누렸을 재산 상속, 투표권 등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어야 하는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참으로 달랐던 둘은 이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군인인 알베르트는 크리스틴을 떠난다. 그 사이 둘의 삶은 너무도 변한다. 알베르트는 '크리스틴이 사랑하던 얼굴'이 아닌 모습으로 바뀐다. 크리스틴도 전쟁통의 낯선 땅에서 홀로 육아를 책임지는 데 지쳐간다.

그러다 크리스틴의 아이가 죽는다. 한 독일인의 짓이었다. 크리스틴이 영국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인은 크리스틴의 아이를 그녀가 보는 눈앞에서 살해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죽인 독일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전쟁은 죽이지 못한다. 삶은 피폐해진다.

그래서 그녀는 요한에게 의존한다. 의존적인 삶 속에서, 그녀는 문득,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다. 일방적으로 미워할 수만은 없는 남편을 위해, 마지막 기회를 준다. 한 번도 답장이 없었던 편지를 남편에게 또 보낸다. 그리고 편지 속에 자신의 계획을 밝힌다. 적어도 남편이 자신의 편지를 읽는다면, 휴가를 나오더라도 이 집에 오지 않을 것이리라.

하지만 남편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며 집에 돌아온다. 알베르트와의 대화 속에서, 그녀는 알베르트가 전혀 편지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게 그녀는 클리템네스트라가 되어, 전쟁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을 상대한다.

남성 중심적인 세계와 그 속에서 여성의 선택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아가멤논' 공연 사진 지난 12월 13일, 서울 대학로 홍익대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진행된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프레스콜 사진. 총 3부작으로 구성된 <벙커 트릴로지>의 두 번째 작품은, 동명의 희랍 희곡을 원전으로 삼은 '아가멤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독일 저격수와 망명 온 영국 여자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이 비극은 누구의 탓인가.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하더라도 '여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전쟁은 남성들의 것이었다. 인류 역사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전쟁이 죽이는 건 남자만이 아니다. ⓒ 곽우신


'아가멤논' 에피소드는 크리스틴의 삶이 어떻게 변모해가는지 잘 보여준다. 괜찮은 집안의 막내딸이었던 크리스틴은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우다 죽은 에밀리 데이비슨의 이야기를 꺼낸다. 에밀리 데이비슨의 죽음 이후,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그저 한 미친 여자의 죽음처럼 이야기하는 여론을 본 이후, 그녀는 서프러제트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던 도중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녀는 독일로 피신온다. 그리고 알베르트를 만난다.

알베르트와의 결혼을 통해, 이성애 가부장제에 편입되며 그녀는 '평범한 여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아내이자 어머니가 된다. 남편은 전쟁터에 있다. 홀로 아이를 키워야하는 상황 속에서, 숲 속에서 장총을 들고 사슴을 쏘던 크리스틴은 없었다. 그런 크리스틴의 모습은, 이성애 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한 여성의 몸을 지닌 사람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혹자는 그런 '여성'으로서의 삶이 하나의 선택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선택'이라는 명목은 논점을 흐리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한 여성이 자신의 남자 친구에게 희생 하며 '개념녀'가 되는 것을 그녀의 '선택'으로 포장하고, 한 여성이 자신의 남편과 가족, 가사 노동을 위해 경력 단절 여성이 되는 것을 '선택'으로 포장한다.

우리 삶 속에서 자주 일어나던 이 현상은, 무대 위 서사 속에서도 꽤 빈번하게 등장했다. 남성 인물을 위해 희생하며 일종의 유사 모성애를 보여주며 헌신하는 성녀 유형의 여성 캐릭터가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그 선택을 온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정말 그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욕망하고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그 희생이 '정말로 그녀가 원한 것'인지 혹은 '사회적으로 강요된 것'인지 겉으로만 봐서는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이를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적어도 그 결정이 온전한 한 여성의 '선택'이 되려면, 그 여성을 억압하는 상황부터 제거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 테면 '여성 혐오' 같은.

크리스틴의 삶 속에서는 많은 선택이 있었다. 알베르트를 선택한 일도 있었고, 서프러제트 운동을 선택한 일도 있었으며, 끝끝내 알베르트를 죽이고 클리템네스트라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녀의 선택들과 삶은, 관객들에게 여성의 신체를 한 개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선택에 대해서 다시금 질문할 기회를 준다.

소수자 간의 연대, 그리고 그 필요성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아가멤논' 공연 사진 지난 12월 13일, 서울 대학로 홍익대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진행된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프레스콜 사진. 총 3부작으로 구성된 <벙커 트릴로지>의 두 번째 작품은, 동명의 희랍 희곡을 원전으로 삼은 '아가멤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독일 저격수와 망명 온 영국 여자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이 비극은 누구의 탓인가.

장애인이자 유태인인 요한. 여성이자 영국인인 크리스틴. 각자 사회적 '비주류' 혹은 '소수자'라는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연대한다. ⓒ 곽우신


<아가멤논>은 요한과 크리스틴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소수자 간의 연대를 보여줬다. 비록 그 근저에는 크리스틴을 향한 요한의 짝사랑이 있었지만, 둘은 분명 생존코자 연대했다. 요한은 독일에서 살아가는 '장애를 가진' '유태인' 남성이었다. 크리스틴은 독일에서 살아가는 '영국인' '여성'이었다. 요한의 말처럼, 둘은 이방인이었다. 알베르트가 떠난 자리에서 요한은 비슷한 이방인 처지의 크리스틴을 도왔다. 일종의 연대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소수자간의 연대를 강요할 수는 없다. 각자 다른 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서로 연대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연대의 필요성은 있다. 소수자에 대한 개별적인 억압들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특히 전쟁 같은, 죽음과 폭력이 남발되는 극한의 상황에선 더더욱 그러하다. 사회적 상황이 악화될수록, 약자에 대한 억압은 동시다발적으로 함께 작동한다.

전쟁과 역사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아가멤논' 공연 사진 지난 12월 13일, 서울 대학로 홍익대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진행된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프레스콜 사진. 총 3부작으로 구성된 <벙커 트릴로지>의 두 번째 작품은, 동명의 희랍 희곡을 원전으로 삼은 '아가멤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독일 저격수와 망명 온 영국 여자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이 비극은 누구의 탓인가.

전쟁의 광기는 모두를 괴물로 만든다. 크리스틴은 전쟁 속에서 망가지고 피폐해진다. 그녀가 사랑했던 알베르트의 얼굴은 없다. 알베르트 역시 일그러진다. 그런 알베르트가 목숨 걸고 구한 다른 목숨은, 더 수많은 목숨을 뺏는 괴물이 된다. ⓒ 곽우신


인류 역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은 배제됐다. 오죽하면 역사를 뜻하는 영단어 'History'가 'His story'라는 이야기도 있겠는가. (그 반대의 개념 Her Story는 여기에서 나왔다) 주류 역사에서 여성은 교묘히 지워져왔다.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전쟁과 역사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게 됐다. 그들이 여자의 얼굴을 할 때는 오로지 박제된 여성성으로서 기능할 때뿐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리 퀴리를 퀴리 부인으로 배운다. 그녀를 어느 한 남성에게 종속된 이름으로 호명했다. 우리는 헬렌 켈러를 설리번 선생님과 함께 장애를 극복한 천사 같은 소녀로만 기억하지만, 사실 그녀는 환경 운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진보 운동에 가담했던 투사였다. 우리의 역사는 독립 운동가로 유관순 '언니'만을 강조할 뿐, 그 외의 수많은 여성 독립 운동가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는다.

전쟁 속에서 여성은 마치 '무임승차자'처럼 그려진다. 그들이 전쟁 속에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평가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편지를 보내기 전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몸이 전쟁터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 전쟁에 동참했다. 그녀의 삶은 전쟁에 참여하는 과정 속에서 망가졌다. 크리스틴 뿐 아니라 많은 여성들은 전쟁에 참여'되'고 동시에 그나마 존재하던 자신의 삶을 잃었다. 알베르트의 총구가 겨눈 크리스틴처럼.

분명 크리스틴이 전쟁에서 세운 업적은 어마무시하다. 그녀는 독일군 최고의 저격수를 죽였다. 하지만 그녀 같은 삶이 과연 기록됐을까. 아마 그녀의 이름은, 전쟁이 지워버린 천만개의 진실 중에서도, 꽤 먼저 지워진 진실일 것이다. 설사 이 상황이 전쟁이라는 최악의 경우가 아니고, 그녀의 이름이 어떤 방식으로든 남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모든 상황적인 맥락을 배제하고, 겨우 악녀로 기록되어 박제된 클리템네스트라처럼 말이다.

극 중 크리스틴은, 자신이 남편을 죽이고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 한 여성으로서, 군인으로서 이름을 남길 수 있으리라 말한다. 실제 역사는 어떠했나. 그녀 같은 여성의 삶은 채 기록되지 못했다. 기록된다 할지라도 '성녀' 혹은 '악녀'라는 식의 이름으로만 기록됐다. 이를 너무도 잘 아는 관객들에게는 <아가멤논> 에피소드는 꽤 씁쓸하게 남는다.

'한 국가를 위한 숭고한 애국심' 따위의 생각이 극대화 됐을 때, 어떻게 인간이 괴물이 될 수 있는지는 덤이다. 예를 들면, 미술을 공부하다가 위대한 아리아인의 영광을 위해 전쟁에 참여한, 알베르트 덕분에 목숨을 구한 '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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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페미니즘 벙커트릴로지 아가멤논 맥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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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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