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우 전성민, '여자'가 되다 1986년생 배우 전성민. 그녀는 "배우하기 참 좋은 나이"라며 웃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색깔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그가 지난 8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미드나잇>의 '여자' 역할로 돌아왔다. 25일, 서울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배우 전성민, '여자'가 되다 1986년생 배우 전성민. 그녀는 "배우하기 참 좋은 나이"라며 웃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색깔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그가 지난 8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2월 26일에 커튼을 내리는 뮤지컬 <미드나잇>의 '여자' 역할로 돌아왔다. 25일, 서울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곽우신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심약한 아내."

뮤지컬 <미드나잇> 속 여자는 심약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심약하냐면 프로그램 북에도 '심약'하다고 적혀있을 정도이다. 18일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배우 전성민은 자신이 맡은 여자 역할을 '심약'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작 이 배우, '심약'이라는 말이 세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연극과 뮤지컬을 종횡무진으로 오가는 그녀. 2009년 <스프링 어웨이크닝> 이후로 여러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배우이지만, 많은 뮤지컬 팬은 그를 <넥스트 투 노멀>의 나탈리와 <명동 로망스>의 전혜린으로 기억한다. 평범 그 근처 어딘가에 가고 싶어 하면서, 자기만의 인생을 살고자 바라는 학생. 혹은 자기 안의 세상을 그리며 자기만의 글을 쓰고 싶었던 문인. 그랬던 배우가 공포에 시달리는 의존적 인물을 맡았다.

뮤지컬 <미드나잇>은 소비에트 연방의 간부이자 여자의 남편인 '남자', 그의 아내 '여자' 그리고 이 부부를 찾아온 '엔카베데'이자 방문객 '비지터'의 이야기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비밀경찰 '엔카베데'는 반혁명분자를 색출하겠다는 미명하에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한 뒤에는 죽였다. 이 안락한 가정만은 숙청의 칼날이 비껴가기를 기다리며 여자는 벌벌 떨고 있다. 1937년 12월 31일 오후 11시 30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남편이 일터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과연 이 부부는 온전하고 행복하게 1938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갑작스레 여자의 안에 있던 악마가 깨어나고, 그녀는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당당하고 주체적인 인물을 연기하고, 또 본인이 그런 사람이었던 전성민. 그는 왜 이런 작품 속의 이런 역할을 만났을까. 25일 오후 3시 30분, 서울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전성민을 만나 그의 고민을 솔직하게 들어보았다. 맥주 한 잔 나누면서.

배우로서의 양면성 그리고 광기


배우 전성민, '여자'가 되다 1986년생 배우 전성민. 그녀는 "배우하기 참 좋은 나이"라며 웃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색깔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그가 지난 8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미드나잇>의 '여자' 역할로 돌아왔다. 25일, 서울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득이 많은 공연 "<미드나잇>은 제게 득이 엄청 많은 공연 같아요. 지금의 역할만 생각했을 때 만족도가 높아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고요. 이 캐릭터가 품은 감정의 폭이 넓으니까, 그걸 표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요." ⓒ 곽우신


"대표와 처음 미팅을 했을 때 저와 되게 잘 어울린다는 말씀하셨고 그걸 믿었어요. 그 당시에는 작품을 제일 잘 알고 있는 분이셨으니까요. 저를 떠올리신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실제로 대본을 읽었을 때, 뮤지컬임에도 대사가 많다는 매력이 컸어요. 음악적으로 아쉬운 작품들이 꽤 있는데 이건 음악도 좋았고! 비록 라이선스 작품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처음 올리는 작품이기에 어떻게 보면 저에게 도전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죠."

지난 8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개막한 뮤지컬 <미드나잇>은 기괴한 작품이다. 스탈린의 독재와 대숙청 당시의 역사에 빗대어 사회현실을 풍자하는 이 작품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예컨대 갈등을 유발하는 비지터의 정체가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비밀경찰이라고는 하지만, 부부의 속마음과 과거까지 모두 알고 있는 그는 권력, 욕망, 타락, 내면의 악마를 상징하기도 한다. 히죽거리며 끊임없이 장난을 치지만, 부부에게 감정 이입된 관객은 마음껏 웃을 수가 없다. 권력을 가진 이의 농담은 쉬이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던 여자의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깨어난다. 비지터와 춤을 추는 와중에.

"비지터와 춤을 추긴 하지만, 춤에 이끌린다기보다는 그 노래 가사에 자극받는 거거든요. '누구나 악마죠, 때로는'처럼. 남편처럼 자신도 엔카베데 본부에 다녀왔다는 걸 여자는 계속 숨겨왔잖아요. 대사에서 '역겹다'고 하지만, 사실 이건 자기 스스로 하는 말이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여자는 의심하죠. 내 안에도 악마적 본성이 있지 않을까. 비지터가 그걸 너무 잘 읽고 얘기해주고 있죠. 그래서 거기에 따라가는 거죠.

이 캐릭터를 만들면서 욕심이 있었다면, 배우로서 제가 가지고 있는 광기를 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다른 작품들을 보면, 여성 캐릭터가 한정적인 경우가 많잖아요. 이거 아니면 저거, 이런 식으로 롤이 딱 정해져 있으니까. 그에 대한 갈증은 항상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자는 이 양면성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니까요. 제 안에도 이런 양면이 다 있다는 걸 배우로서 보여드리고 싶었죠. 미치광이 같은 모습부터 '여리여리'한 모습까지, 소녀 같은 모습부터 강하고 거침없는 여성의 모습까지 다 표현하고 싶었어요."

"스크루볼 코미디는 시대적으로 억눌린 여성상에 대비되는 좀 더 독립적이고, 진보적인 모습을 가진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 작품의 '여자'가 그런 인물이다. 인물의 잔혹한 면이 반전으로 드러났을 때, 놀랄 수도 있지만, 웃음이 날 수도 있다." - 뮤지컬 <미드나잇> 프로그램 북 'Director's Comment' 중에서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던 여자는, 비지터가 여자의 아버지를 거론하며 도발하자 참지 못하고 그를 공격한다. 남자가 아무 것도 못 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 비지터를 제압하고 손도끼를 들어 그를 해체하려고 하는 건 여자다. 비지터의 눈을 뽑겠다고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그다. 이토록 갑작스러운 반전이 다소 의아하기도 하다. 이 의아함을 풀 열쇳말은 '아버지'이다.

"여자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겠죠. 황제 치하 시절의 비밀경찰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안기부 간부 같은 사람이잖아요. 그가 혁명으로 인해서 숙청됐단 말이죠. 한순간에 아빠가 없어졌는데 그게 너무 어린 시절이라 상황을 몰랐던 거죠. 본인 입장에선 굉장히 억울하고, 청천벽력 같은 일이고, 아빠의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 치부를 건든 게 비지터잖아요. 힘든 시절을 살아왔던 만큼, 자신에게는 순수하게 남아 있는 좋은 추억을 건드렸을 때 숨겨져 있던 본성이 드러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요.

또, 인간에게는 어떤 일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감정이 숨겨져 있잖아요. 비지터가 그 전부터 툭툭 건드리는 그 질문들이 자극적이잖아요. 그 자극이 하나씩 쌓이고 쌓이다가 아버지 얘기에서 탁 터진 거죠."

우리 안의 악마

배우 전성민, '여자'가 되다 1986년생 배우 전성민. 그녀는 "배우하기 참 좋은 나이"라며 웃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색깔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그가 지난 8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미드나잇>의 '여자' 역할로 돌아왔다. 25일, 서울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음악과 드라마 배우 전성민에게 <미드나잇>에서 제일 좋은 점을 물었더니 주저없이 '음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잘 쓰여진 음악을 보면서, 작곡가의 의도나 연출의 의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볼 수 있었어요. 대사와 음악을 같이 두고 볼 때의 포인트랄까요. 간주에 이 대사가 왜 있고, 왜 여기서 노래를 해야 하는지, 여기서 어떤 멜로디가 쓰이는지 그 의도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 곽우신


"1937년 그곳의 겨울은 아마도 혹한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대기의 기운과는 상관없이 온 세상에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았을 테니까요. 마치 2016년의 어느 나라와 같습니다. 우린 100년 동안 무엇이 더 나아졌을까요?" - 뮤지컬 <미드나잇> 프로그램 북 '연출의 말' 중에서

"1937년 마지막의 날을 살았던 어떤 부부의 공포나 2016년의 마지막 날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의 삶에 파고든 공포가 이상스럽게도 어떤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무겁습니다." - 뮤지컬 <미드나잇> 프로그램 북 '작가의 말' 중에서

황제 치하 시절, 백성을 착취해 황제와 귀족의 뱃살만 찌던 제정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 끝장났다. 하지만 혁명은 또 다른 긴 밤을 불러왔다. 사람을 의심하고, 감시하고, 서로 싸우게 하는 압제는 다른 이름으로 계속됐다. 스탈린이라는 독재자 '각하'에 의해서. 자칫 우리에게 멀고도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멀지 않게 느껴지는 건 그 시대와 이 시대를 포괄하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초반에 연습할 때는 힘들었죠.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이 생소하기도 했고,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얘기하다 보니까 단어를 설명하는 것도 힘들었죠. 그래서 오랜 시간 테이블 리딩을 많이 했어요. 얘기도 서로 많이 하고요. 서서 대본을 놓고 연습한 기간보다 테이블에서 함께 대본 보면서 얘기했던 기간이 더 길 정도였으니까요.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이 작품이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우리는 명확하게 인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고, 선악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배경 설명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식으로 함께 결론을 내렸어요."

<미드나잇> 속 남자나 여자는 명백하게 죄를 지었다. 누군가를 신고하고, 투서하고, 거짓 증언을 해왔다. 그러나 처음부터 악의를 가지고 엔카베데에 협조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를 열심히 정당화하며 양심의 가책을 털려고 한다. 용서받으려고 한다. 이미 정해진 수사 결론이었고, 내가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증언했을 터이다. 어차피 그들은 죽은 목숨이니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 그런 상황이, 시대가, 사회가 이들을 타락하게 한다. 악마로 만든다. 여자는 처음 남자를 만났을 때 '천사'로 불리던 이이다. 이 여자의 안에는 천사의 씨앗과 악마의 씨앗이 다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발아할지 결정하는 건, 그 씨앗이 자랄 사회적 환경이다.

"지금의 시대를 떠올리면서 봤으면 좋겠다고 연출께서 얘기한 것도 있지만, 이 역할에 이름이 없잖아요. 여자고, 남자고, 비지터이죠. 캐릭터의 이름이 만약 전성민이라면, 전성민에 대해서만 표현하면 될 텐데…. 하지만 작가가 이름이 없도록 설정한 건 '내가 네가 될 수 있고, 네가 내가 될 수 있다'는 걸 표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사회 비판적인 작품이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사람이 어떻게 변할 수 있으며, 선한 만큼 또한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주는 거거든요.

관객들이 뭘 중점적으로 가지고 나가시면 좋을까. 저희끼리 얘기했을 때 나온 건 '물음표를 가지고 나가셨으면 좋겠다'였어요. 공연이 올라가고 나서, 제가 마지막 즈음에 도끼를 들었을 때 사람들이 웃거든요. 왜 웃을까. 웃겨서. 왜 웃겨? 어떻게 보면 잔인한 장면인데, '여기서 웃음이 나오는 이유가 뭘까'하고 관객분들 중 몇 분이라도 생각해보신다면 우리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또 다른 악의 본성은 아닐까. 아마 우리가 모두 그러지는 않을까."

독일 나치 전범이 그랬고, 친일 부역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대가 틔운 내면의 악에 대해 우리는 '정상 참작'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100% 용서받을 수는 없다. 마지막, 그 여자의 운명이 그랬듯이.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손으로 그런 시대와 맞서 싸우는 것, 그리고 더 나은 시대를 만드는 것 아닐까. 시대의 조류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쓸고 가버리기 전에.

배우로서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배우 전성민, '여자'가 되다 1986년생 배우 전성민. 그녀는 "배우하기 참 좋은 나이"라며 웃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색깔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그가 지난 8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미드나잇>의 '여자' 역할로 돌아왔다. 25일, 서울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계속 연기를 하는 이유 "다양한 일을 해본 건 아닌데, 유일하게 심장이 뛰는 일이라서요. 다른 일의 경우 하면 할수록 긴장감이 점점 줄어들고 익숙해지잖아요. 노련해지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 일은, 무대에 올라섰을 때마다 새로워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하는 게, 힘들고 스트레스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저를. 그리고 계속 공부하게 되잖아요. 뭐라도 하나씩 배울 수 있다는 것." ⓒ 곽우신


따른 맥주를 다 비울 때쯤, 조금은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미드나잇>은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 참여한 배우 전성민도 사회 참여적인 배우로 꼽히는 이 중 한 명이다. 진보정당의 진성당원으로 함께 하기도 했다. SNS를 통해서도 이슈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기사가 떴는데, 기사 안에 싹 다 명단이 적혀 있더라고요. '내 이름 있을 텐데'하고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있더라고요. 정말 아무렇지 않았어요. 이 명단이 100~200명이면, '어, 내 이름이 있어?', '내가 정말 정부에 반하는 무언가를 했나?' 할 텐데…. 거의 만 명 가까이잖아요. 있을 사람들 다 있는데 내 이름 있는 정도야. (웃음) 없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웃음) 이게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야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다 명단에 올라왔던 거잖아요."

문화예술계 전반에 가해진 정권의 탄압은 가혹하고 동시에 치졸했다. 야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 때문에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가는 세상이었다. 결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구속되고, 광화문 광장에는 빼앗긴 극장이 다시 세워졌다. 이런 시대에, 배우는 어떻게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걸까.

"예술하는 사람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예술인은 개인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해요. 그게 분명해야지만, 어떤 인물을 연기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믿어요. 예술인의 가장 기본정신은 '저항정신'이 아닐까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에 '신기한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세요'라는 말이 있어요. 모든 철학은 '왜?'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잖아요. 저희가 작품에 임할 때는 항상 '이 캐릭터는 왜 그랬을까' '이 상황은 왜 생긴 걸까'하면서 항상 '왜'라는 질문을 달고 산단 말이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도 항상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저항정신의 기본이고요. 예술인이라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의에요. 그래서 이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어요. 그래서 친구들하고는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나는 이런 이유로 정치적인, 사회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고.

제가 데뷔를 하면서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거든요. 작품을 하면서, 인간에 대한 생각과 질문을 계속하다 보니까 저항에 대한 그리고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더라고요. 평생 공주만 연기하고 사는 사람은 없잖아요. 저도 굉장히 평범한 역할부터 시작해서 훨씬 다양한 인간을 연기할 거고, 그러려면 사회적인 사건·사고·이슈, 내동댕이쳐지는 사람들, 국가의 폭력으로 인해 피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하고 활동도 하고 그랬죠."

말에 대한 고민

배우 전성민, '여자'가 되다 1986년생 배우 전성민. 그녀는 "배우하기 참 좋은 나이"라며 웃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색깔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그가 지난 8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미드나잇>의 '여자' 역할로 돌아왔다. 25일, 서울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무대를 오가면서 '역할'에 대한 제한도 있고, '기회' 자체가 적기도 하다. 아직 우리나라의 공연계는 여자 배우보다 남자 배우에게 더 넓고 깊은 무대가 허락되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꿋꿋하게 연기를 계속해 나가는 이들이 있다. 역할에 갇히지 않고, 기회도 개척하면서. 연극과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이 배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 곽우신


배우로서 그리고 자연인으로서 이 시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지내야 하는지 고심한 끝에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고 목소리를 내는 길을 택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권력의 폭력에 노출된 이들은 거리로 나서서 촛불을 들었다. 이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시민들의 외침도 광장에 모였다. 그 광장에 배우 전성민도 있었다. 분명, 누군가는 불편해할,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제가 노조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보고 나서, 어떤 분이 인터넷에 '극좌', '정치병에 걸린 뮤지컬 배우'라면서 '걔 작품은 정치적인 것 때문에 몰입이 안 돼서 못 보겠다'는 글을 썼어요. 거기에 동감하는 분들 댓글도 여러 개 달렸고요. 그걸 보고 나서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 끝에 결론은, '아, 앞으로 이런 얘기 하면 안 되나'라기 보다는 '열심히 해야겠다', '진짜 연기 잘해야겠다. 잘하면 이런 얘기 안 나오겠지'였어요. 그런 사람들도 제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정말 연기를 잘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때부터 책이랑 신문도 엄청 많이 읽었어요. 먼저 발언하거나 나서기보다 내공을 조금 더 쌓자는 생각에서요. 제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배우로서 써먹을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지금 '시민과 함께하는 뮤지컬 배우들' 참여하고 있는 배우들만 봐도 저와 친한 친구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친구 중에는 평소에 정치에 관심이 엄청 많지는 않았던 친구들도 있거든요. 그들도 관심을 가질 만큼 심각한 시국이라는 걸 되게 많이 느껴요."

뮤지컬 <미드나잇> 속 아제르바이잔이 그랬듯이, 지금의 우리도 우리가 생각하고, 믿고, 지지하고 혹은 반대하는 것에 대해 쉽게 말하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는 연예인, 배우, 탤런트 등이 그런 말을 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나선다'고 손가락질하기 바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촛불을 든 배우들이 거리로 나섰다. 미국에는 수많은 연예인이 핑크 모자를 쓴 채 여성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반트럼프 시위에 함께했다. 배우 전성민이 바라는 세상도, 그처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제 복인 것 중의 하나는, 여행을 통해서 혹은 워크숍을 통해서 외국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이나 공연계 친구들을 꽤 만들었다는 거예요. 영어는 잘 못 하지만, 어떤 관심사에 대해서 그 친구들과 술을 한잔하면서 얘기를 하면,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돌아가고 있는 사회적인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정말 스스럼없이 얘기하더라고요. 밥 먹으면서 다투기도 하고. 싸움을 통해서 문화예술인으로서 국가로부터 받아야 할 것을 받아내기도 하고요.

이 친구들 덕분에 확신을 하게 됐죠. '내가 틀린 게 아니구나!' 가끔은 '내가 너무 유별난 건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거든요. 한국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건 많이들 부담스러워하고, 꺼리죠. 그런데 사실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자연스러운 얘기잖아요."

허위자백을 위해 사실상 고문을 행하고, 증거를 조작하여 간첩을 억지로 만드는 정보기관. 투표에 미리 개입하여 여론을 선동하는 이들. 1937년 저 먼 북방의 이야기가 2017년 대한민국에 그대로 반영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그럴수록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더 외쳐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고민의 대열에 이 배우도 깊이 동참하고 있다. 그 고민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전성민이 연기하는 이 기묘한 블랙 코미디 <미드나잇>이 팬들의 마음에 더 와닿고 있는 것은 아닐지.

배우 전성민, '여자'가 되다 1986년생 배우 전성민. 그녀는 "배우하기 참 좋은 나이"라며 웃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색깔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그가 지난 8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미드나잇>의 '여자' 역할로 돌아왔다. 25일, 서울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대표 '트잉여' 전성민 비록 자물쇠가 잠겨 있기는 하지만, 배우 전성민은 자신의 트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이다. 다른 배우들에게 트위터 활용법을 가르쳐줄 정도로. 공감가는 글에 리트윗도 많이 하지만, 직접 트윗을 올리는 경우도 잦고 팬들의 반응에도 '답멘'을 보내는 편이다. ⓒ 곽우신


- 언젠가 꼭 도전해보고 싶은 역이 있나요?
"연극 <클로저> (설마 앨리스?) 네, 앨리스. (너무 치명적일 것 같은데) (웃음) 몇 년 전부터 어울린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기회가 없었죠. 영화도 너무 좋아하고요."

- 그럼 지금까지 했던 필모그래피 중에서, 꼭 다시 하고 싶은 작품을 꼽아 보자면요?
"연극 <반신>이요. 지금 하면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는 긴장도 많이 했고, 명동예술극장이라는 공연장의 분위기나 만났던 선배들이 너무 낯설어서 더 펼칠 수 있던 걸 못 펼친 것 같아요. 그리고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은 정말 좋은 작품이라, 제가 생각했을 때 '완벽한 작품'이에요.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는…. 다시 하실 생각은 있는 것 같은데 올해는 없으니….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웃음)."

- SNS 계정 이미지 절대 다수가 고양이입니다. '나만 없고 다 있는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로서의 삶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기본적으로 행복한데, 가끔 고양이한테 이용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웃음) 이름은 누아랑 난이에요. 원래 고양이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집에 누군가 반겨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또 고양이가 독립적이잖아요. 전 강아지보다는 고양이가 좋더라고요. 강아지는 외로움을 많이 타고, 의존하지만 고양이는 적당히 '밀당' 잘하잖아요. 그래서 이용당한다는 느낌이 들죠. (웃음) 3년 전에 데려온 까만 누아가 엄마이고, 난이는 아들이에요. 중성화 수술하기 전에 친구 고양이와 교배해서 다섯 마리를 낳았고요. 네 마리는 입양 보내고, 제일 못생긴 애가 남은 거예요."

- 고상호 배우에게 트위터 GIF 응용법을 알려줄 정도로 대표 '트잉여'인데, 트잉여로서의 삶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세요.
"제가 집에 TV가 없어요. TV를 안 보는데…. 원래 SNS를 엄청 열심히 하다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닫았어요. 그래도 인생의 재미는 하나 찾아야 하니까? 트위터 원래 가입은 되어 있었는데 잘 안 하다가 한 번 들어가니까 완전 중독이 된 거예요. '움짤'이런 것도 그렇고, 제가 동물 영상 많이 보는데 여긴 너무 많고…. 저한텐 진짜 유익한 거예요. 시간 때우기도 너무 좋고, 혼자서 심심할 때마다 보고 웃을 수 있는? 재미있는 사람들의 말투나 '드립' 보면 다들 천재 같아요. (웃음) 저도 그 안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웃음) 제 글이나 사진 서치도 합니다. 저 보라고 올린 게 아닌데도 제가 서치해서 마음 누르기도 하고…."

- 최근에 '열일'하는 것 같은데….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스타일인가요? 특별히 상반기 계획하고 있는 게 있다면?
"원래 안 그랬어요. 물 들어올 때 물가에 앉아서 '아, 언제 뛰어드는 게 제일 안전하고 좋을까'하면서 신중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웃음) 그 전에 작품이 들어왔을 땐, 제가 끌리는 것 위주로 했었거든요. 또 배우한테 제일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여유'라고도 생각했고요. 한 작품을 통해서 가지게 된 마음가짐은, 그 작품이 끝나고 쉬면서 전환을 시켜줘야지 새로운 역할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연달아서는 잘 안 했어요.

그런데 제 의도와 달리 조금 오해하는 분들도 계시고 그래서…. 이번 상반기는 <미드나잇> 끝나면 쉬려고요. 여행 갈 거에요. 다음 작품은 하반기쯤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트위터로 사진 많이 올릴게요!"

- 쉴 때는 주로 뭐하면서 쉬세요? 은근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 같으시던데요.
"진짜 하는 것 없는데…. 예전에는 더블 캐스팅이면, 이틀 쉬는 사이에 1박 2일로 여행도 가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서른 지나고 나니까…. (웃음) 30대가 되니까 약간 두렵더라고요. 지금은 커피 마시고, 신문이랑 책 읽고, 친구들 만나서 데이트하고…. 술 마시고…. 트위터하고…. (웃음) 아, 요리하는 거 좋아해요."

- 트위터에 김치전 해 먹는 거 봤어요. 요리 잘하시나요? 특별히 잘하는 음식이 있다면요.
"다양하게 다 잘하는데? (웃음) 웬만한 건 한 번 맛보면,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하고 해요. (빵 터짐) (검증이 안 되니까…. 믿겠습니다) (웃음) 아, 한식보다는 양식을 조금 더?"

- 자신이 출연했던 필모그래피 말고,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 있나요? 장르와 국적 불문하고요.
"제가 영화 진짜 좋아해요. (인생 영화를 꼽자면?) <친절한 금자씨>. 완전 광팬이에요. 진짜 많이 봤어요. 100번은 안 되지만, 거의 100번 가까이?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를 다 좋아하기는 하는데, 이걸 제일 좋아해요. 이번에 <미드나잇> 준비할 때도, 다시 보면서 캐릭터 만들 때 참고했어요."

- 발 사이즈가 궁금하다는 팬이 있습니다. '작고 소중한'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녀서 더 그런 거일 수도 있겠는데요.
"220에서 225요. 220 신을 때도 있고, 225 신을 때도 있는데…. (웃음)"

- 김유영에서 전성민으로 이름 바꾼 지 벌써 꽤 됐어요. 어떤가요? 바꾸고 나니까 훨씬 좋은가요.
"그런 것 같아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전 무신론자거든요. 부모님이 처음에 이름 바꾸자고 했을 때, 되게 싫었거든요. 전 제 이름 좋아하거든요. 별로 흔하지도 않고, 못 이겨서 했는데….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제 성격이랑도 중성적인 이름이 더 잘 맞는 것 같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졌어요. 이름 덕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닐 수도 있고. (웃음)"

- 그래도 별명은 계속 '융'(유영의 줄임말)이잖아요.
"그러게요. 그래서 전 제 별명 되게 좋아해요. (웃음)"

- 배우로서 혹은 인생의 선배로서 롤모델로 삼고 있는 이가 있나요?
"데뷔 때부터 닮고 싶은 선배, 존경하는 선배 묻는 말이 항상 어려웠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고, 저 사람처럼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선배는 분명 있고, 그래서 그런 분들의 이름을 말했지만요.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롤모델'이라고까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저는 저대로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 이어지는 질문입니다. 배우로서의 최종 목표 같은 게 있나요?
"공연만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배우요. (웃음) 너무 솔직하게 답했나요? 좀 멋진 대답을 하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웃음) 요즘 제 이슈 중 하나에요. 사치를 부릴 생각은 없어요. 그럴 성격도 아니고요. 다만, 공연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제가 정말 사랑하는 일만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그런 고민이 있어요."


전성민 김유영 미드나잇 융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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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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