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킹>에서 박태수 검사 역을 맡은 조인성.

영화 <더 킹>에서 조인성은 박태수 검사를 맡았다. 교내 일진 출신으로 온갖 말썽을 부리다 우연한 순간 검사의 힘을 실감하고 그것을 향해 직진하는 캐릭터다. ⓒ 아이오케이컴퍼니


많은 이들이 9년 만의 등장이라며 그 의미를 새삼 강조했을 때 조인성은 꿋꿋했다. "드라마로 꾸준히 대중을 만나고 있었다"며 태연한 듯했지만 분명 영화 <더 킹>의 의미는 남다르다. 영화로 치면 정말 그 정도의 시간 동안 조인성은 관객과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지만 부끄럽진 않을 것 같다"는 말에서 짐작해보자.

그는 멈춰 있던 게 아니고 끊임없이 채우고 있었고, 깊어지고 있었다. <더 킹>은 어쩌면 배우 조인성이 그간 들이마셨던 공기를 세상에 내뿜는 날숨과도 같은 작품인지도 모른다. 16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조인성의 변곡점 

공교롭게도 <더 킹>이 묘사한 세계가 현실과 판박이다. "권력의 속성을 제대로 알기 위해 그 권력자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던 한재림 감독의 변에서 알 수 있듯 <더 킹>은 세 검사가 대한민국을 농락하며 점점 힘을 갖는 과정을 농밀하게 그렸다. 그렇다고 무게감 가득한 드라마는 아니다. 1980년대를 지내며 우연히 검사가 되자는 마음을 먹은 태수(조인성 분)의 시선을 따라가며 때로는 가볍게 비꼬기도, 대놓고 조롱하기도 한다. 정우성은 그런 태수의 롤모델이었던 한강식 부장검사를, 배성우는 선배검사 양동철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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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독일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시나리오를 읽은 조인성은 귀국 후 단숨에 한재림 감독과 만남을 청했고, 그렇게 출연이 성사됐다.

"비행기 안이라 좋아 보인 걸까. (웃음) 보통의 드라마에선 다룰 수 없는 소재라 선택한 게 크다. 영화는 영화다운 미덕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드라마처럼 나오는 영화도 있고, 그게 나쁜 건 아니다. <더 킹>은 영화에서만 다룰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지. 한 인물이 본 세상이 재밌었다. 재치 있게 무겁지 않게 사회를 풍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내레이션도 하고 너무 많이 등장해 객관적으로 보긴 힘들지만, 적어도 이 작품이 부끄럽진 않을 것 같다.

(내가 해석한) 태수는 착한 친구다. 특별히 정치검사를 하려는 마음이 아니었고, 어쨌든 그가 속한 작은 사회에서 일종의 자기 위치를 찾으려 했던 인물이다. 권력욕만 있었다면 영화가 이렇게 흐르진 않았겠지. 먹고 살기 위해 가정에 돈을 대기 위해 일해 온 인물이다. 그래서 내레이션에 태수를 샐러리맨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준비하면서 실제 검사를 만나진 않았다. 만날 이유도 없었지. 검사 역할이긴 했지만, 검찰을 묘사하려는 건 아니고, 사람 태수를 표현하는 게 주였다. 그래서 태수가 비호감이면 관객이 못 따라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 세밀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감독님과 많은 얘길 했다."

 <더 킹>의 한장면

<더 킹>의 한 장면. 지방 검사로 나름 약자를 돕던 그가 한강식(정우성 분)을 만나며 노골적으로 더 강한 권력을 추종하기 시작한다. ⓒ NEW


사회 풍자로 답하다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실은 그 역사가 강자의 역사니 권력 옆에 딱 붙으라는 한강식의 말을 태수는 진리처럼 받아들인다. 정권에 부역하며 필요하면 기획수사도 마다치 않고, 무고한 이를 곤란하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주요한 선택의 순간,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는 한강식 검사 일행의 모습은 최근 국정농단 주역들의 모습과 겹쳐지며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설정들로) 이 영화를 무겁게 보거나 가볍게 보는 분들 모두 존재한다"며 조인성은 "결국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작품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우연히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고, 우연한 계기에 의해 검사가 되고 기획수사에 가담하는 태수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어떤 기회든, 순간이든 우린 선택한다. 인터뷰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단어를 선택하고 있잖나. 어떤 선택들을 해서 지금의 내가 있고, 이런 사람이 됐는지를 말하는 영화가 <더 킹>이다. 태수가 깨끗한 인생을 살진 않았다. 근데 이 세상에서 선악 구분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 구분이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최악이 눈앞에 보인다면 차악을 택해야지. 그 한 발이 중요하다. 거창하고 대단한 게 아닌 약간의 변화인데 그 작은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런 순간들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 영화에도 나오지만, 세상을 야바위라고 말하지 않나. 야바위가 없는 세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정의가 악을 이겼다고 말하는 영화도 아니다. 일단 이런 문제에 관심 갖는 게 중요하고 차악을 택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지금 국민분들 모두 비슷한 마음일 거다. 촛불집회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동시에 집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내 마음속에도 누군가 손대면 뜨거워질 무언가가 있다."

 영화 <더 킹>에서 박태수 검사 역을 맡은 조인성.

인터뷰 내내 조인성은 여러 단어를 고심했다. 그만큼 생각을 더 섬세하기 표현하기 위함이다. ⓒ 아이오케이컴퍼니


영화가 노린 일종의 사회 풍자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조인성의 현실 인식에까지 이어졌다. 조인성은 "중요한 순간에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사람들이 판단 자체를 샤머니즘에 맡기고 사리사욕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게 너무 우스꽝스러웠다"고 새삼 강조했다. 동시에 그는 "그런 차원에서 영화에 풍자 개념이 들어가 있다"며 "실제 세상이 정말로 그렇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일부 사람들이 우아함을 떨면서 추악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라 설명했다.

조인성의 선택들

<썰전> <그것이 알고 싶다> 등 "시사 프로를 즐겨본다"던 그는 "어떤 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 나도 잘 몰랐기 때문에 TV프로를 통해서라도 배우려 하는 것"이라 말했다. 이 역시 보다 나은 선택을 위한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이쯤에서 그의 과거 선택을 돌아보기로 했다.

앞서 말한 대로 유독 그는 영화와 인연이 없었다. 박광현 감독과 <권법>을 찍기로 하고 군 제대 직전인 2011년 초부터 4년여를 기다리기도 했으나 끝내 불발됐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2004) 직후엔 배우 생활의 위기를 느끼기도 했다. 스타성에선 최고였던 그가 속으로 앓아왔던 기간이 이처럼 길고, 생각보다 아픔이 깊었다는 건데 사실 의아한 지점이다. 조인성이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이었다.

 영화 <더 킹>에서 박태수 검사 역을 맡은 조인성.

ⓒ 아이오케이컴퍼니


"다들 영화를 오래간만에 한다며 너무 오래 쉰 거 아니냐고 해주시니 뭉클하긴 한데 그렇다고 대충 타협을 보고 싶진 않았다. 다른 배우들이 쉽게 타협한다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기준점에서 타협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앞서 말했듯 드라마로 할 수 있는 건 드라마로 하면 되는 거니까. 또 그땐 드라마가 재밌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9년이 지난 거다.

<발리에서 생긴 일> 그때 위기감을 많이 느꼈다. 더 이상 작품을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작품이 더 이상 내게 안 들어올 수도 있겠다는…. 다른 분들이 볼 때 꽤 괜찮은 인생이라 말씀하실 수도 있다. 근데 오늘의 사건, 내일의 사건이 모여 내가 되는 거잖나. <발리> 직전까지 찍었던 영화 <마들렌> <클래식> <남남북녀>가 연달아 (흥행이) 안 됐었다. 1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대중에 선보인 건 <별을 쏘다>가 먼저였지만 떨어지는 게 한순간이더라. 생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발리>를 했고, 그 이후 <비열한 거리> <쌍화점>으로 사랑받긴 했지만, 작품을 어렵게 해 나갔었다. 팬분들 입장에서 꼭 그런 역할까지 했어야 하나 생각하는 분도 많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 <권법>을 몇 년 기다리다 보니 주위에서 위기설이 나오고, 물론 주변에서 그렇게 보는 걸 수도 있지만 나 역시 나약한 사람이다 보니 흔들리기도 했지. 그래서 생존이라는 표현을 쓴 거다. 내가 활동을 안 한다면 과연 집이 버틸 수 있는 상황인가도 생각했던 거고."

애써 어려웠던 집안 형편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가 연예계의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배우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조인성은 "힘들었지만 그런데도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고, 그래서 <더 킹>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흔들릴 때 곁에서 힘이 돼준 차태현, 고현정 등에게 각별할 수밖에 없는 그다.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에 출연한 정우성을 보고 배우의 꿈을 갖게 된 중학생이 이젠 그 정우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한 작품을 끌어가는 이가 됐다. 이 모든 게 놀라운 인연의 힘이다. "우성이 형은 분명 내가 가야 할 길"이라던 조인성은 "작은 역할이라도 작품에 잘 녹아들고 존재감을 증명할 수 있으면 선택의 제약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더 킹>에 10대에서 40대를 지나는 조인성의 모습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정우성의 모습과 연결지어 보면 이 역시 영화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다.

꿈을 키워왔던 까까머리 시절을 지내 온 그가 어느새 자신의 인장을 강하게 찍기 시작했다.

 영화 <더 킹>에서 박태수 검사 역을 맡은 조인성.

조급하지 않으면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법을 안 그다. 그의 진짜 변곡점이 이제부터가 아닐까. ⓒ 아이오케이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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