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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역정에서 지우고 싶은 기간




"청춘은 희망에 살고 백발은 추억에 산다"고 한다. 이즈음 나는 지난 삶을 반추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성능 좋은 지우개로 내 인생역정의 일부를 지울 수 있다면 1975년 3월 1일부터 1976년 8월 20일까지 1년 6개월은 말끔히 지우고 싶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는 어느 일정 기간만 떼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중동고 교사신분증
 중동고 교사신분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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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력서상 그 기간은 1975년 3월 1일 오산중학교 교사에서 중동고등학교 교사로 전근했고, 그 이듬해인 1976년 3월 1일 중동고등학교 교사에서 다시 오산중학교 교사로 전근했으며, 그해 8월 21일부터 오산중학교 교사에서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교사로 전근했다.




그때 나를 오산중학교에서 이대부중으로 인도한 이대부고 임무정 선배 선생님은 이력서 작성 때 중동고등학교로 갔던 1년은 쓰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로 해마다 학교를 옮기게 된 사실은 제3자에게는 얼른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별난 사람, 모난 사람으로 비쳤을 것이다.



"국적은 바꿀 수 있으나 모교는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자기 모교, 특히 고교는 인격 형성에 소중한 시기로, 장래의 길을 정하는 제1차 요람지이기도 하다.




지난 12월 9일 오후 5시 30분 서울 강남의 한 밥집에서 2016년 중동고 58회 정기총회 및 송년회가 있었다. 나는 이날까지 동창들에게 늘 받기만 하고 준 것이 없어 이 참에 내가 쓴 산문집을 50권 기증키로 했다. 그런데 동창회 총무가 70명 정도는 올 것 같다고 하였지만, 그날은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는 역사적인 순간 직후인 데다가 졸업 51년이 넘은 일흔 노인들이 원거리에서 뭘 그렇게 오겠느냐는 내 나름의 판단으로 50권도 많을 거라고, 책이 남아 나돌면 보기 싫기에 그의 제안을 묵살했다.




그런데 그날 현장에 도착하자 60여 명의 동창이 제주에서, 대구에서, 심지어 캐나다에서도 날아왔다. 정말 중동 동창들의 모교사랑과 그 응집력은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대한민국에서 응집력이 강한 집단으로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 고대교우회를 드는데, 아마도 중동고교 동문회도 거기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전국 어디를 가나 중소도시 이상은 중동고교 동문지부가 있고, 해외에도 웬만한 나라나 도시에도 지부가 있을 만큼, 중동 동문들의 응집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중동 동창들의 그런 애교심과 응집력은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특히 시골 출신의 만학도들이 서울의 다른 학교는 자격 미달로 응시도 못한 채 중동학교의 본과(5년제)나 예과(3년제)나 속성과(2년제), 보습과(1년제) 등에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칭 '국보'라고 칭했던 국문학자 무애 양주동(梁柱東) 박사는 황해도 산골에서 서울로 와서 이 학교에 입학했고,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李秉喆) 회장도 경남 의령에서 상경하여 중동학교 속성과에서 수학한 뒤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진학했다. 이런 촌놈정신, 서민정신이 하나의 교풍으로 애교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남다른 응집력을 가져왔을 것이다.




나와 중동고교




나는 고향 경북 구미에서 구미초등학교와 구미중학교를 다녔다. 구미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고향에서 당시 야당인 민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입후보해 낙선한 데다가 경영하던 사업마저 쫄딱 망해 하루아침에 파산했다. 그래서 살던 집도 빚쟁이들에게 빼앗기고 가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때 나는 큰고모님 댁에서, 나중에는 할머니와 단둘이 남의 집 행랑채에 살았다. 나는 구미중학교를 다니면서 외가의 도움으로 학비를 냈기에 고교진학은 불투명했다.



 
 중동고2학년 재학시절 교정에서(1963. 12.)
 중동고2학년 재학시절 교정에서(1963. 1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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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구미중학교에서 공부 꽤나 하거나 집안 형편이 괜찮은 친구들은 대구의 경북고나 계성고교, 대구상고, 대구공고 등지로 진학했는데 나는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 구미농업고등학교에나 진학할 심산이었다.




그래서 별로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학교가 끝나면 꼴을 뜯으려 다니거나 금오산 기슭에 가서 할머니가 해놓은 나무를 져다 나르면서 중학교 시절을 그렁저렁 보냈다. 




중3때 4·19혁명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동안 서울에서 혼자 은거했던 아버지는 중3 가을 무렵 고향에 와서 나에게 서울에 있는 고교로 진학하라면서 공부 열심히 할 것을 당부했다.




나는 그때부터 전국고교입시문제집을 사서 입시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구미에서 서울 고교 진학은 좀처럼 드문 때였다. 그래서 어느 학교가 좋은 학교인지도 몰랐다. 국사 교과서에 이승만 대통령이 배재학당을 다녔다고 하여, 배재고등학교가 가장 좋은 학교인 줄 알았다. 




그때 서울과 구미는 대단히 먼 거리로 열차는 완행열차가 하루에 낮과 밤 두 차례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입시철이 되자 아버지는 전기고 2학교(용산고·배재고), 후기고 2학교(중동고·숭문고) 등 모두 네 학교 입시원서를 우편으로 보냈다. 나는 그 네 학교 원서를 모두 쓴 다음, 졸업식을 마친 다음날 곧장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할머니는 이불 봇짐에 찹쌀과 팥을 한 되 넣은 뒤 새끼로 멜빵을 만들어줬다. 나는 그걸 짊어지고 책가방에는 입시참고서와 원서를 넣고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네 곳 학교의 입학원서를 써왔지만 전기교 한 곳, 후기교 한 곳만 지원할 수 있기에 전기는 용산고등학교, 후기는 중동고등학교에 접수했다. 나는 그때 서울 지리를 전혀 몰라 혼자 헤매면서 찾아다녔다. 용산고교를 갈 때는 머리털 난 뒤 처음으로 전차를 타고 갔다.




전기고 입시에서는 내 실력 부족으로 낙방했다. 그런데 그 당시 이른바 명문이라는 대부분 서울의 고교에서는 타교, 특히 시골 출신 진학생들에게는 대단히 불공정한 입시였다. 신문에 공표되기는 경쟁률이 4~5:1이었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높았다.




그 내막인즉, 동교 출신자(예를 들면 용산중 졸업자가 용산고교를 지원할 때)는 낙제점수가 아닐 정도의 학생은 죄다 합격시키고, 타교 학생들은 한 학급 정도만 뽑았기에 그 경쟁률은 매우 높았다. 나는 그런 사실을 나중에야 용산고교 학생들의 "동계 우선 진학제를 철폐하라"고 시위한 신문 보도로 알게 되었다.




후기 중동학교는 안국동 로터리에서 가까운 조계사 옆 수송동에 있었다. 전기에서 떨어진 수험생들이 중동고교로 몰려들자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 중동 학교에서도 동계진학 학생들에게는 우선권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전기에 다른 학교로 지원해서 시험을 본 학생들에게는 그 우선권을 박탈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동계진학 110명을 제외한 250명을 뽑았는데 그나마 문이 조금 넓어 정말 운 좋게 합격했다.




내가 중동고에 합격할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입시 과목 때문이었다. 대부분 전기 명문고에서는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예체능 등 6개 과목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동고교에서는 예체능 과목을 제외한 5개 과목만 치르게 했다. 당시 시골 학교에서는 예체능 교과의 이론수업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에 약점이 있었고, 나는 특히 영어 성적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전기 용산고등학교에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입학금 미납으로 등교치 못하다




중동고교에 어렵게 합격했으나 그 기쁨도 잠시뿐, 등록마감 날까지 입학금을 마련치 못했다. 입학식 날에도 등교치 못하고 방안에서 지냈다. 그때 아버지와 나는 가회동 한 한옥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았다. 그런데 주인집 아들도 전기 중학교에 떨어지고 후기인 중동중학교에 합격하여, 그 학생 모자가 입학식을 치르고 오면서 내가 방안에 머물고 있는 딱한 사정을 알았다. 그 며칠 후 주인집 아주머니는 나의 입학금을 융통해 주었다.




[관련 기사] 목마른 이 물을 주어 급수공덕하였느냐 /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아버지와 나는 입학식 1주일이 지난 뒤 학교로 갔다. 아버지는 교감선생님에게 입학 허가를 사정하자 학적계 선생님에게 우리 부자를 인계했다. 그분이 바로 나의 고1 학급 담임선생님인 이종우 선생님이었다.




"입학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등록치 않아 제적 처리치 않았습니다."



 
 1961년 고1때 짝이었던 양철웅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 친구는 나의 장편소설 <제비꽃>의 주인공이다).
 1961년 고1때 짝이었던 양철웅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 친구는 나의 장편소설 <제비꽃>의 주인공이다).
ⓒ 이용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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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제가(齊家)부터 하라'고 따끔하게 나무라셨다. 그날 나는 서무실에 등록 후 교실로 갔다.






"옆자리가 빈 학생 손들어 봐!"

"선생님, 여기예요."




한 학생이 손 번쩍 들었다. 나는 그 자리로 갔다. 그 시간부터 수업을 받으라고 했다. 나는 그날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학교에 갔기에 옆의 학생(양철웅)이 연습장과 연필도 주고 교과서도 보여 주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60명 정원인 교실에는 80명의 학생이 몰려 있었다. 20명은 보결생이었다.




그 무렵 다른 공사립 중고교에서도 보결생들이 많았다. 그때는 그렇게 하여 학교재정을 충당하거나 교사들이 보너스를 나눠가졌다. 그러다가 군사정부가 들어선 이듬해부터 연합고사제로 고교 입시의 공정성이 그나마 회복되었다.




그날 나는 방과 후 신신백화점 교복코너에서 교복과 가방은 샀지만 돈이 모자라서 모자는 사지 못했다. 이튿날 짝 양철웅은 내 낡은 모자를 보고는 자기가 중학교 때 쓰던 걸 다음날 갖다 주는 후의를 베풀었다. 그때 내가 썼던 모자는 구미중학교에서 3년 동안이나 썼던, 담요에 검정 물을 들인 것으로, 빛깔이 바래져서 누렇게 탈색해서 보기에도 몹시 흉했다.




집안사정으로 휴학하다




어떻게 등록은 해서 학교에 다녔지만 나는 절대 빈곤으로 도무지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스케치북이니, 백지도니, 학급비니, 물감이니, 돈 드는 일이 지천으로 많았는데 용돈이 없어 일일이 살 수가 없었다. 그런 형편인 줄도 모르고 선생님들은 수업준비 불량이라고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다.




그해 5월 16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며칠 후 아버지는 교도소에 가시고, 뒤늦게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는 막내를 업고서 낯선 거리를 물어가면서 면회 다녔다. 나는 도저히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어 혼자서 그만 다니기로 결단을 내렸다. 휴학계를 써서 주인 집 아들 편에 보낸 후 나는 매일 어떻게 죽어야 고통도 없이 죽을까만을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죽은 셈 치고 다시 살기로 결심한 뒤, 그때부터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그때는 신문이 하루에 두 번 발행하는 조석간제였는데, 석간배달시간은 꼭 하교시간이라 학교 동급생들과 부딪치는 게 싫어 일부러 지름길인 학교를 돌아서 다녔다.




이듬해(1962년) 3월(그해부터 학기가 3월에 시작했음) 나는 중동고교에 복학하여 1965년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남달리 중동고교를 57회에 입학해 58회로 졸업한 셈으로 4년을 다닌 셈이었다. 그런 졸업생이 모교 교사로 가서 1년 만에 뛰쳐나와 하필이면 전임교인 오산중학교로 다시 가자 모교에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내 처사에 매우 괘씸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서울 시내에서 사립학교 간 이동 때는 동의서를 첨부해야 했는데 모교에서 나의 동의서를 발급치 않아 한동안 그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인생이란 지나놓고 보면 별일이 아닐지라도 그 당시 젊은 나이에 저지른 나의 모난 소행으로 몹시 힘들었다.




아마도 그때 모교에서는 재정적으로 매우 힘들어 궁여지책으로 고호봉 교사들의 봉급을 동결하고 그밖에 긴축재정으로 학교살림을 꾸려갔을 테다. 다른 이도 아닌 모교 출신이 그런 학교운영에 불만을 품고 그것도 전임교로 간 처사는 지금 생각해도 결코 내가 잘한 일은 아니었다(그 후 중동중고교 재단이사회는 재정난을 감당치 못해 1994년 삼성그룹으로 운영권을 넘겼다).



 
 중동고 시절 소풍지에서 제자들과(1975. 10.)
 중동고 시절 소풍지에서 제자들과(1975. 10.)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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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의 충고




다시 찾아간 오산중학교에 근무하면서 나는 매우 침울해졌다. 일부 선생님들은 내가 모교에서 1년 만에 전임교로 다시 온 것을 못마땅해 하거나 교장 심복인 줄 알고 말조심을 했다. 나는 그런 게 견딜 수가 없었다.




그해 결혼을 했다. 내 결혼식에 사회를 봤던 당시 선린상고 교사였던 민병기(현 창원대 명예교수) 친구가 나의 처사를 크게 나무랐다. 그러면서 그는 제3의 학교로 가라고 권유했다.




그가 그해 여름방학 중, 1급 정교사 강습을 받으면서 같이 교육을 받던 선배로부터 교사 초빙교섭을 받았는데 나를 추천한 모양이었다. 그 선배가 근무하는 학교는 이대부중고등학교였다. 




며칠 후 그 친구의 소개로 대학선배인 임무정 선생님을 만났다. 내 이야기를 경청한 선배는 내 이력서를 보고 모교로 간 부분은 빼고 다시 쓰라고 충고했다. 그 선배는 당신 학교의 여러 장점을 말하는데 교사들은 학생들의 등록금 문제는 일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학교 분위기가 매우 자유스럽다는 말에 꿈같은 얘기로 들렸다. 사실 그 시절 예사 사립학교에서는 교사, 특히 담임들은 세리처럼 학생들의 등록금 납부를 들볶지 않았던가. 나는 그 점이 교사로서 가장 힘들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다가 우선 제3의 학교로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그 선배의 말을 따라 그 자리에서 이력서를 다시 쓴 뒤 이대부중으로 갔다.



 
 당시 이대부속중고교(현 이대부중) 교사
 당시 이대부속중고교(현 이대부중) 교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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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전부터 이대부중고교 얘기는 더러 들었지만 직접 찾기는 처음이었다. 이대 후문 한쪽편에 중고교가 한 교사(校舍)를 쓰는, 아주 자그마한 학교였다. 아마도 당시 서울 시내에서 가장 소규모 학교로 교장선생님도, 교감선생님도 한 분이 중고교를 겸임하고 있었다.




내가 선배의 소개로 이대부중고 전병진 교감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이력서를 드렸다. 그러자 그분은 이력서를 훑으면서 만년필 글씨가 달필이라고 칭찬한 뒤 교장선생님과 상의 후 채용 여부를 일주일 안으로 알려주겠다는 말씀을 듣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나는 북한산 기슭 구기동 산동네에서 살았는데, 비탈길을 오르면서 왠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래서 대문 앞에서 발길을 다시 돌렸다.




그 길로 곧장 이대부중고로 찾아갔다. 전병진 교감선생님이 눈을 둥그렇게 뜨시며 맞았다. 나는 이력서를 고쳐 쓴 얘기를 솔직히 말씀드리고, 이미 제출한 이력서를 반환 받은 뒤 그 자리에서 새 이력서 용지에다 사실 그대로 쓴 다음 드렸다. 차라리 나의 허물로 그 학교에 가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이력서를 변조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더욱 수렁에 빠질 것이며, 양심을 속인 파렴치한 교사가 될 것 같은 예감으로 도저히 내 도덕율이 허락지 않았다.

      

단점을 장점으로 봐주시다




닷새 후 이대부중에서 연락이 왔다. 그 이튿날 학교로 가자 전병진 교감선생님이 굳게 내 손을 잡았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 중에 만났습니다. 앞으로 우리 학교에서 열심히 근무해 주십시오. 김영숙 교장 선생님께서 박 선생님의 이력서를 보시고 중동중학교에 있는 이대 출신의 제자를 통해 알아보신 걸로 압니다.




그리고 오산중학교에 다시 간 사실을 매우 좋게 보셨습니다. 명문 오산학교에서 한 번 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 모시는 일은 아무에게나 그러지 않을 겁니다."

"네에!"




나는 그 말에 귀를 의심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의 처사를 별난 사람, 모난 사람으로 경계할 사유를 오히려 긍정으로 보는 그 안목에 나는 감읍했다. 그 김영숙 교장선생님은 나를 채용한 다음 해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돼 한 학기만에 헤어지게 됐다.




그 후 김 교장선생님은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장으로 재임하다가 퇴임했다. 피차 현직에서 떠난 이후 지금까지 10여 년간 늘그막에 서로 안부를 자주 묻는 사이로, 김 교장선생님은 무명 작가의 후원자로 여태 모난 인생길을 이끌어 주시고 계신다.




인생을 정리하는 이 시점에서 지난날을 회고해 보니 나의 모난 처사는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감정을 절제치 못하고 학교를 이곳 저곳 옮겨다녔지만 그런 줄 모르고 따랐던 중동고 제자들과 다시 옮겨간 오산중 3-10반 제자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죄송스럽다.




중동고 제자들은 수업시간이면 반장의 경례라는 말이 떨어지면 전원이 "국수!"라고 합창할 만큼 선배 선생님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표시했고, 오산중 3-10반 학생들에게는 아무튼 학기 중 떠났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이 사죄드린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박도 지음 실록소설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이 시중 서점에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허형식 장군은 내 고향 구미 임은동 출신인 바,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앞 마을사람으로 만주에서 서로 다른 인생길을 걸었습니다(눈빛출판사 /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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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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