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고분고분하면 국가가 버르장머리가 없어진다."

진중권의 투철한(?) 국가관을 잘 보여주는 한 문장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나치게 고분고분했다. 때문에 국가의 버르장머리는 지속적으로 나빠졌다. 상투를 잡힌 지 오래다. 대통령은 비리를 주도했고, 부정(不正)과 불법(不法)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꼭대기에서 세심히 관장했다. 참담한 상황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어진 국민들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지난 11월 12일부터 매주 100만 명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촛불을 들었다.

1987년 6월 10일, 전두환의 호헌(護憲)이라는 기만을 깨부수고, 직선제(直選制)를 쟁취했던 민주화 항쟁 이후 최대 인파가 광화문에 운집했다. 더욱 놀라웠던 점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바람'과는 달리 촛불이 지속적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놀란 김에 한번 더 놀라기로 하자. 100만 명 이상이 모인 시위와 집회가 '평화'로운 축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 됐다는 사실에 '세계'도 놀랐으니 말이다.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판타스틱한 케이스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만들기 위해 '평화'라는 '설정'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가수들은 노래를 부르고, 자발적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그 노래에 맞춰 흥겹게 몸을 흔들었다. 새로운 시위 문화의 이정표를 세웠는지도 모르겠다. 경찰 차벽을 넘거나 무너뜨리기보다 '꽃' 스티커를 붙이고, 심지어 청소하기 힘들까봐 손수 떼어주는 '평화'는 아름다우면서도 '강박적'이라 할 만했다. 좀더 강렬하게, 좀더 격정적으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외치는 군중의 태도는 오히려 공포스럽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 ⓒ 채널A 화면캡처


'질서있는 퇴진'

이 괴상한 언어가 누구의 입에서 비롯됐는지 알 수 없지만, 국가를 도탄으로 빠뜨린 '범죄자'를 대하는 태도라고 보긴 어렵다. 4% 지지율(한국갤럽 결과, 리얼미터의 경우에는 9.8%)짜리 대통령이 아닌가. 90% 이상의 국민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질서'를 논하는 상황이라니. 이보다 '엽기적'인 경우가 또 있을까. 분명 '촛불'은 위대했고,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또 한번 지나치게 '고분고분'했던 건 아닐까? 그 결과는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에 잘 나타났다.

"저는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국정의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주시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한 말뿐인 사과는 공허했고, 자신의 진퇴 문제를 국회로 떠넘긴 '꼼수'는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들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 믿고 추진했"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허탈감을 자아냈고, "개인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며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만 잘못이라는 그의 태도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정치권은 대통령의 언어를 '해석'하기에 급급했고, 주판알을 굴리며 셈법에 몰두했다. '무능'의 포커스를 국회로 향하게 한 대통령의 '함정'은 적중했다.

 김여진이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김여진이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 김여진 트위터 캡처


"질서 없고 불명예스럽고 빠른 퇴진 원합니다."

배우 김여진이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짧은 글이다. 명확하고 명쾌하다. 이보다 더 명징하게 현재 국민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생각을 표현한 말을 찾을 순 없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찌하여 '질서'가 필요한가. 어째서 '명예'를 지켜줘야 하며, 왜 '당장'이 아닐까. 90%(80%라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의 '대통합'된 여론이 뭉쳤고, 100만 명(지난 11월 26일에는 150만 명이라고 한다)이 토요일마다 모여 퇴진을 요구한다. 유례 없는 일이다. 이 뜨거운 힘을 몰아주고 있건만, 정치권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불찰?, 불차아아알? 지금 개헌은 얘기하는 자가 나의 적이다." (배우 김의성)
"우리는 횃불을 들고. 국회는 탄핵을 하고. 특검은 수사를 하고. 헌재는 심리를 하고. 당신은 즉각적 퇴진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열고. 촛불을 끄지 않고 횃불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더욱 명확해졌다. 누가 이기나 보자." (방송인 김제동)

이 와중에 국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고, 국민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건 여전히 배우 김의성, 가수 이승환, 방송인 김제동과 같은 연예인들의 몫이다. '촛불' 대신 '횃불'을 들자는 김제동의 말은 지칠 법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고 다잡는 역할을 한다. 물론 가수 윤복희씨는 '기도'라는 성스러운 행위를 참칭해 '빨갱이'와 '사탄의 세력'을 언급하는 부적절한 모습으로 뒷목을 잡게 만들기도 했지만. 더 분노하고, 더 격렬해야 할 정치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난장판에 '답'을 제시한 '스타'들

난장판에 '답'을 제시한 '스타'들


한편,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사실 탄핵이나 2일, 9일, 4월, 6월이 아니라 특검"이라는 내용의 글을 SNS에 게시한 허지웅은 그 누구보다 '핵심'을 정확히 짚어냈다. 탄핵안 발의 시기를 궁리하고, 대선을 언제 치를지를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범죄를 밝힐 특검을 제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또, 허지웅은 "우리가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다음 세대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절실함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광장의 우리들 안에서 확인한 건 그런 희망"이었다고 덧붙였다.

답은 나왔다. 방송인 김제동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각자가 해야 할 일들을 충실히 하면 된다. 그리고 '촛불을 끄지 않고 횃불이 돼야 하는 이유'는 허지웅이 말한 것처럼, '다음 세대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는 절실함'일 것이다. 그리고 배우 김여진의 말처럼,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극도의 모욕감을 받은 우리가 그 근원이자 원흉인 박 대통령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질서 없고 불명예스럽고 빠른 퇴진'뿐이다.

김여진 김제동 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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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길을 가라.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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