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보강: 23일 오후 7시 13분]

 22일 방영된 MBC <PD수첩>의 한 장면. 가해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구성, 의도가 무엇일까.

22일 방영된 MBC 의 한 장면. 가해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구성, 의도가 무엇일까. ⓒ MBC


"이게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실 보도와 이런 명분은 충분히 공감하는데요. SNS 익명의 폭로들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보도하는 일부 신문들도 저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저 같은 경우, 최초 보도 00 일보 기자의 경우 저에게 어떠한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기사를 내보냈어요. 그리고 제가 제출한 자료, 저의 주장도 기사에 반영이 안 됐어요."

22일 방영된 MBC <PD수첩> '문화예술계 성추문 파문, 폭로는 시작됐다' 편에 등장한 가해 당사자 D 시인의 인터뷰 중 일부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는 사람의 목소리치고는 무척이나 당당했다. 심지어, '익명의 폭로' 운운하며 언론으로부터 자신이 당한 피해를 읍소하기까지 했다.

사과만큼이나 이 반대 주장이 더 두드러지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탐사보도가 갖춰야 할 균형이나 총체성은커녕 '성폭력'이나 '성추문'이란 선정성을 머리에 두고 취재를 시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더욱이 D 시인은 이미 지난 17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00 일보 기자의 실명과 실제 오간 메신저 사진까지 공개하며 '공개서한'을 보냈고, 당사자인 00 일보 기자 역시 장문의 반박 글을 올린 상태다. 그런 와중에 <PD수첩>은 일방적으로 D 시인의 주장만을 내보낸 것이다. 시청자들 역시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 PD수첩이 말하고 싶었던 건 뭐지? 인터뷰한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변명과 자기 합리화와 억울함을 대변해준 것 같다. 그래서 불쾌하다." (‏@mi*****) 

"오늘 PD수첩은 그야말로 안이함과 게으름의 결과물이다. 가해자들은 어떻게든 자기 말 더 떠들고 싶어 하니 당연히 흔쾌히 응했겠지. 피해자들은 자기가 노출되는 일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하니 당연히 섭외가 어려웠겠지. 그렇다고 분량 확보된 대로 막 내보내?" (‏@di*****) 

"피해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무얼 포기해가며 공론화를 하고 또 어떤 두려움을 무릅쓰고 인터뷰 카메라 앞에 앉았는가 생각하면 PD수첩에 너무 빡이 친다. 필요 없이 긴 가해자 구구절절 인터뷰/ 자극적인 상황 재현/ 언론계 성폭력 외면하고 제3자인 척." (@ap*********) 

박범신 찾아 간 <PD수첩>의 민망함

 22일 방영된 MBC <PD수첩>의 한 장면. 박범신 작가를 갑자기 찾아가 카메라를 들이민 것은 무엇을 위한 그림이었을까.

22일 방영된 MBC 의 한 장면. 박범신 작가를 갑자기 찾아가 카메라를 들이민 것은 무엇을 위한 그림이었을까. ⓒ MBC


소설가 박범신씨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갑작스럽게 집으로 찾아온 방송 카메라와 PD를 발견하고는 "드릴 말씀이 없다"면서도 "(앞서) 사과한 건 사실에 대한 건 아니고" 라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냥 나로 인해서 마음을 다친 분이 있다면 미안하다는 보편적, 포괄적 사과였고요. (성희롱 및 성추행에 관한) 그 사실 자체는 사실이 아니에요. 저도 저를 어떻게 변호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제가 지금 TV에 나가서 그걸 새삼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텍스트만 읽으면 정식 인터뷰를 한 듯 보일지 모른다. 아니다. <PD수첩> 제작진은 불쑥 박 작가의 집으로 찾아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제대로 된 답변이 나올 리 만무하다. 심지어 카메라를 등진 담당 PD조차 박 작가에게 미안함과 무안함을 표시하고 있었다.

제작진은 도대체 무얼 원했던 건가. 그저 이번 '문화예술계 성추문 파문' 당사자 중 가장 유명한 박범신 작가의 얼굴이라도 찍고 싶었던 건가. <PD수첩>은 박 작가의 이렇다 할 사과는 물론 추가적인 해명 역시 얻어내지 못했다. 무조건 '들이대기'식 취재가 탐사보도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시청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더 나쁜 건 이 날 방송의 패턴이었다.

피해자, 피해자들은 노출을 무릅쓰고 인터뷰에 나선다. 제작진은 그 피해 사례를 굳이 재구성해 재연 화면으로 내보낸다. 아마도 사려 깊지 못한 제작진은 이러한 재연 화면이 누군가에게는 2차 폭력이 될 거라는 점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섭외가 된 가해 당사자들만이 사과나 해명 인터뷰를 가진다. 중간중간 업계 종사자의 증언이 이어지고, 사건 진행 상황이 나열된다. 변호사나 사회학 교수 같은 전문가 집단이 사안을 평가한다.

성폭력·여성혐오에 집중한 <PD수첩>, 그러나   

 22일 방영된 MBC <PD수첩>의 한 장면. 오히려 피해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제작진이 고려하지 못한 걸까.

22일 방영된 MBC 의 한 장면. 오히려 피해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제작진이 고려하지 못한 걸까. ⓒ MBC


1091회 학교 전담 경찰관,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
1090회 그 성폭행범은 왜 전자발찌를 잘랐나
1089회 박유천 성폭행 의혹 논란
1086회 치안 강국 대한민국, 여성은 왜 범죄의 표적이 되었나?
1067회 데이트 폭력, 괴물이 된 남자들
1051회 선생님! 저를 만지지 마세요
1049회 2030 남성보고서 그 남자, 왜 그녀에게 등을 돌렸는가
1048회 직장 상사가 당신을 성추행한다면?
1047회 보복성 포르노 피해자, 나는 문란한 여자가 아닙니다
1042회 죽음 부르는 데이트 폭력

지난 2015년 1월 <PD수첩>이 다뤄온 성폭력, 여성범죄, 여성혐오 관련 주제들이다. 이 정도면, 그 일관성과 탐사 정신에 박수를 보낼 법도 하다. 느슨하게 연결된 주제까지 확장하면, <PD수첩>의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러한 방송들이 그 피해자인 여성 시청자들에게도 딱히 환영을 받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순간적인 분노나 공분은 불러일으킬 수 있을망정, 탐사보도 본연의 사안에 대한 심층탐구나 사회 전체를 꿰뚫는 심도 깊은 시각이 부재한 것은 아니냐는 의견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탐사보도 보다 재연 화면을 비롯한 소재의 선정성, 예고의 휘발성 등에 기댄 흔적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번 '문화예술계 성추문 파문' 편과 같이 사안을 정리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 만연한 성추문과 성폭력 사례들이 한국사회의 남성중심주의와 권력편향에서 비롯된 현재진행형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 또한 이미 지적돼왔다.

단편적이거나 선정적이기보다 좀 더 심층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까지 파고들기는 어려웠던 걸까. 이를 대신한 것은 방송 말미, 전문가들의 짤막한 인터뷰 발언들이었다.

"문화예술계가 왜 폭로가 시작됐냐 하면 다른 방법이 없는 거죠. 해결 기구도 없고요. 해결의 주체도 없는 거죠. 그래서 폭로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고 게다가 이게 오랫동안 이렇게 꾹꾹 참고 있다가 한 명이 용기를 딱 내니까 '아 나도, 나도' 하면서 이렇게 터져 나온 거고요. 또 스스로 좀 돌아볼 필요가 있죠. 성범죄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 왜 문화예술계가 이렇게 관대한지 그런데 왜 방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얘기를 좀 해야 하는 거죠." (이선경 변호사)

"이게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 얼마나 젊은 학생들을 착취해 왔는가를 느끼지 못하고 '젊은 애들이 너무 지금 과하게 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지금 전체적인 어떤 변화가 없으면 한국 문단은 독자들한테 신뢰를 잃을 거라고 생각해요." (익명의 현직 소설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던 어떤 성폭력 사건 중의 일부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고요. 그렇다고 하면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이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하고 법과 제도를 활용해서 적절하게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을 많은 시민이 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거죠."

시청자들의 비난 새겨들어야

 22일 방영된 MBC <PD수첩>의 한 장면. 마지막 멘트는 강했다. 하지만 그 강한 멘트에서 별다른 힘이나 진정성이 느껴지지는 못했다.

22일 방영된 MBC 의 한 장면. 마지막 멘트는 강했다. 하지만 그 강한 멘트에서 별다른 힘이나 진정성이 느껴지지는 못했다. ⓒ MBC


<PD수첩>은 문화예술계라는 범주를 어디까지 잡아야 할지, 또 그 비판의 수위를 어디까지 가져다 대야 할지도 헷갈려 하는 듯보였다. 더욱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한국사회의 대혼란을 고작 지난주 1회만 다루는 MBC 보도국에 대한 시청자들의 비판이 쇄도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청자들의 거센 비판 역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PD수첩이 얼마나 거지같이 보도를 했으면 소위 '가해자'라는 사람이 저러고 있나. 방송을 보고 느낀 것이 고작 저 따위 것이라면 이건 PD수첩의 잘못이다..." (@1h*********)

"PD수첩에 화나는 부분 : 선정적인 재연 / 피해호소인들에게 가명 붙이기, 가해지목인들에게 이니셜 붙여주기 / 피해호소인 카페에 불러서 토크쇼처럼 앉히고 앵글 잡아놓은 것." (@fr*********) 

"PD수첩 르포계의 철딱서니" (@th********** )

진행을 맡은 박상일 책임 프로듀서는 프로그램 말미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엘리트로 추앙받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자신들의 허물에는 침묵하는 모습을 보며 저희는 과연 성폭력에 찌든 문화예술계가 이를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당히 수위 높은 비판이다. <PD수첩>은 "문화예술계 성폭력을 줄여나가는 구조적인 해결책이 마련될 때까지 이 문제를 계속해서 취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과연 MBC는 그리고 <PD수첩>은 이 비판에 떳떳할 수 있나. <PD수첩> 제작진은 피해자를 위로하고 가해자를 고발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할 수 있나. 이 방송이,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를 해소하는 데 일조했다고 믿는가. 중립이라는 혹은 객관이라는 이름 뒤에 숨지는 않았는가.

"언론계 성폭력 외면하고 제3자인 척"이란 한 트위터 사용자의 표현을 빌려, <PD수첩>에게 이렇게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에게 엘리트로 추앙받는 언론계/방송계 인사들이 자신들의 허물에는 침묵하는 모습을 보며 저희는 과연 MBC가 이를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MBC <PD수첩> 제작진 "피해자 보복 최소화에 중점"
<오마이뉴스>는 23일, 하성태 시민기자의 논지에 대한 반론을 MBC 측에 요청했다. MBC <PD수첩> 제작진은 이날 오후 7시께 홍보팀을 통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가능성, 재연 장면의 선정성 등과 관련한 논란에 대해 아래와 같은 해명을 전해왔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고 개선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본 방송의 기획 의도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 인터뷰에 응한 당사자들이 받을 보복 내지는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것에도 중점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피해자를 향한 명예훼손 등 법적 대응에 이미 준비 중인 가해 지목자들도 있어, 증언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 불가피하게 가해자 측에 반론권을 제공했습니다. 이 경우 가해자들의 입장을 반영하되 그 이유와 범위에 대해 피해자 측에 사전 동의를 구했습니다.

사례가 많아 재연 장면의 분량도 늘어났지만, 이미지 재현 위주로 제작해 선정성 논란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했습니다." 


PD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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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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