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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꼴이 엉망이다. 이 나라는 개선이 아니라 밑둥부터 다시 쌓아야 할지 모른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세대가 앞장서야 한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오마이뉴스>는 헬조선의 현실에서도 꿈을 찾아 도전하는 청년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펀딩을 시작한다. [편집자말]
아직도 청년들에게 꿈이라는 달달한 것이 남아 있을까? 대다수의 청년들이 꿈을 묻는 질문에 '공무원'이라고 답하는 시대. 여기 주어진 삶의 틀을 거부하고 '평생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나선 청년이 있다. 홍승오. 올해 30살. 대학로 극단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사라지는 시대에 청년 연극인들을 모아 겁 없이 창단한 초짜 극단 '구십구도'의 대표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고3 수험생 홍승오는 '큰 물에서 놀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암묵적 순리에 따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응시했다 떨어졌다. 정해진 수순대로 재수를 준비하다 의구심에 휩싸였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뭘까?' 막연함만 있었다. 부모님을 설득했다. "내가 정말 행복하게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전엔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최소한 군대 다녀올 때까지라도.

물론 부모님은 걱정이 앞섰지만 승낙했다. "그래. 아빠, 엄마가 죽었을 때 우리 때문에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못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그렇게 그의 인생은 크게 전환했다.

홍승오씨는 청년 연극인들이 주도해 만든 극단 구십구도의 대표다.
▲ 홍승오(30)씨 홍승오씨는 청년 연극인들이 주도해 만든 극단 구십구도의 대표다.
ⓒ 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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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되기로 한 꿈, 그리고 만난 인생의 멘토

막연하게 배우가 되고 싶었던 청년은 촬영차 제주도에 내려온 제작사를 찾아다니며 단역배우로 나섰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서울물은 어떤가' 궁금해 가끔 비행기도 탔다. 그러다 20살 이른 나이에 간 군대에서 '배우가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 제주도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한 그가 '엄청 길었던' 대기 시간마다 읽었던 각종 희곡과 연극이론서가 그를 이끌었다. '아, 이걸 평생 하고 살면 행복하겠구나...'

"제대하고 나서 연기를 해야겠다고 결심은 굳혔는데, 어떻게 할지는 몰랐어요. 무조건 서울로 가야한다는 것 정도? 두 가지 방법이 떠오르더라고요. 연기학원에서 배우는 방법과 극단에 들어가서 걸레질 하면서 배우는 방법. 제대하고 1년 반을 미친 듯이 일했어요. 쉬어본 날이 하루인가 이틀? 그렇게 모은 돈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어요."

1년 반 동안 하루인가 이틀을 쉬면서 모은 2천만 원 중 절반은 월세방의 보증금으로 들어갔다. 남은 돈으로 등록한 연기학원에서 그는 인생의 멘토를 만난다. 배우 명계남. 연기학원에 출강을 온 그를 만난 것은 또 한번의 전환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공중파를 떠났던 명계남은 인천에 연기학원을 내면서 홍승오를 데려 갔다. "마치 서편제처럼" 그곳에서 연기를 배우고 공연도 했지만, 명계남과 이곳 저곳을 동행하면서 사회문제에도 눈을 떴다. 총선과 대선이 있던 2012년이었다.

"2012년이 총선과 대선이 있었잖아요? 명계남 선생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선거 캠프 일도 했고. 그래서 단지 명계남 선생님과는 '선배 배우'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유대감이랄까... 그런 게 생겼던 것 같아요. 물론 배우로서도 지금까지 자양분이 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죠. '배우로서의 자질은 누구한테서 배우는 게 아니야. 살다보면, 착하게 살다보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배우야.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해' 같은 말들은 아직도 저를 이끌어 주고 있어요."

쓴 맛 단 맛 다 본 대학로... 청년의 자리는 좁았다

2012년 대선 결과는 그에게도,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명계남에게도 견디기 힘든 좌절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지만 기분대로 살 수는 없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발길은 대학로로 향했다. 

지방을 전전하던 홍승오가 대학로에 처음 발을 딛은 2013년은 이른바 '대학로 젠트리피케이션'이 한창일 때였다. 멀쩡한 극장을 가지고 있던 극단들도 극장을 허물고 커피숍을 짓던 시기였다. 궁핍했던 연극인들은 한성대입구로, 성신여대로 하염없이 밀려났다.

명계남은 오랜만에 재회한 대학동기 연출가 김태수와 의기투합해 공연을 올렸다. 홍승오에게는 꿈에 그리던 '대학로 입봉작'이었다. 천안함랩소디. 운이 좋았다. 배역을 맡기로 한 배우가 10일 전에 펑크를 내면서 무대에 올랐다. 그는 꼴통보수 청년인 덕구를 연기했다. 꿈이 반쯤은 성큼 이뤄진 것 같았다.

"운이 좋았어요. '국가의 설명을 의심하는 건 반역'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다방 사장역할이었는데, 관객들에게 따귀도 맞아봤고...(웃음) 관객과 대화하는 신이 많았기 때문에 배우로서 순발력을 요하는 것이었어요. 경험치를 많이 쌓았죠. 당시 대학로 연극이 본전이면 성공한 것이었는데, 후불제 연극이었는데도 적자가 안 났으니 성공한 거죠."

홍승오의 대학로 입봉작이었던 천안함랩소디. 사진 오른쪽이 그의 멘토 명계남씨고 왼쪽이 홍승오씨다.
▲ 천안함랩소디 홍승오의 대학로 입봉작이었던 천안함랩소디. 사진 오른쪽이 그의 멘토 명계남씨고 왼쪽이 홍승오씨다.
ⓒ 홍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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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았다. 그는 처음으로 연극을 해서 돈을 벌었다. 비록 '연봉 70만원' 정도의 소액이었지만 연극으로 돈을 벌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러나 기쁨은 찰나.

"그 다음 했던 게 명계남 선생님이 오랫동안 꼭 하고 싶었던 극이었어요. 50년대 출간된 내용인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트라우마에 대한 것이었어요. 전쟁을 통해 얻은 상처, 돌아간 고향에서의 상실감을 정신병동에서 의사와 환자들로 표현한 연극이에요. 그런데 유료 관객이 너무 안 들어왔고 재정적인 타격도 컸어요. 이후로 한참동안 연극제작은 못했고, 저도 먹고 사는 문제가 현실로 다가왔어요."

무대에 오르면 마냥 행복했다던 그도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찾은 타협책으로 한 시민단체에 들어갔다. 주위 사람들의 배려로 조금 일찍 출근해 일찍 퇴근하는 '탄력근무'를 했다. 그러나 연극이라는 것이 하루 3~4시간 정도 시간을 낸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최소한 공연 한달 반 전에는 아침부터 연습에 매달려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전혀 특수한 경우가 아니었다.

"대부분 젊은 연극인들은 비슷해요. 다 따로 돈 벌러 다니면서 연습하러 와요. 정부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예술강사 같은 걸 하는 친구들은 그나마 낫지만 이것도 기한이 정해져 있어서 3개월, 반년하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해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배우를 하고 싶은데 돈을 벌어야 하니까 아동극을 하거나 조명이나 무대 스태프로 빠지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런 거라도 해야 버티니까."

뿐만 아니다. 청년 연극인들은 연극계에 뿌리 깊은 권력구조와도 부딪혀야 했다.

"극단이 돈을 못 주는 게 극단 탓은 아닌 건 알아요. 그런데 아직 연극계에는 '너희들은 연극하는 사람인데 무슨 돈을 바라냐?'는 식으로 보는 선생님들이 있어요. '우리 때는 얼마나 굶었는데...' 하면서요. 오래된 극단은 보통 선생님들이 제왕이에요. 까라면 까야하고. 물론 우리가 부족하지만 격려 받고 응원 받으면서 창의적인 활동을 하고 싶은데 '너네가 뭘 아냐'는 식으로 주눅들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요. 배역하나 받지 못하고 몇 년 동안 진행만하거나... 저하고 비슷한 나이 또래는 다들 그래요. 그래서 연극하는 동년배들끼리 술을 잘 안 마셔요. 술만 먹으면 '나 힘들어' 하는 이야기만 나오니까.(웃음)"

"99도의 물도 뜨거운 물이에요"

홍승오는 올해 5월, 2년 동안 일했던 시민단체를 그만 두었다. "이런 식으로 일하면서 연극하면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아서"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몽땅 털어 극단을 만들었다. 또 한번의 승부수였다.

"물론 우리가 아직 부족하고 많이 배워야 한다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무대에 오르지 못하면 경험치가 쌓이지 않잖아요? 그런데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에요. 주로 무대에 오르시는 선생님들은 그 나이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도 우리 나이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검증된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 게 맞긴 하지만,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어떻게 검증을 하나요? 기회가 있어야 검증도 하지요. 그래서 동료들이랑 '우리끼리라도 해보자, 휘둘리지 말고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우리 나이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선생님들 나이가 될 때까지 마냥 기다리면 우리 이야기는 평생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들어 진 것이 '극단 구십구도'다. 왜 하필 99도일까?

"사람들은 물이 100℃가 되어야만 끓는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99도의 물도 뜨거운 물이에요. 아직 다 끓지 않았다고 하지만 100℃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가려진 뜨거운 물이 99도에요. 우리 처지가 바로 이렇다고 생각해요. 99도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자. 그래서 10년, 20년이 지나면 후배들에게 물러주자. 이런 시스템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이름을 지었어요."

‘나이에 맞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극단 구십구도의 주요 멤버들. 오는 10월 30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혜화당에서 창단 공안을 진행한다.
▲ 극단 구십구도 ‘나이에 맞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극단 구십구도의 주요 멤버들. 오는 10월 30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혜화당에서 창단 공안을 진행한다.
ⓒ 극단 구십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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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이들, 경험치가 낮은 청년 연극인들이 주도하는 이 연극은 젊었을 때의 꿈과 지향을 잃어버리고 오직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리고 있는 사회 초년생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 나이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던 연극은 그래서 우리와 닮았다. 이 청년 연극인들의 무모한 도전은 어떻게 될까? 마지막으로 물었다. 연극하면서 가장 좋았던 적이 언제냐고.

"무대에 서는 순간은 그동안 힘든 것도 다 잊고 마냥 행복해요. 그렇지만 '가장 좋았던 순간'은 아직 없어요. 항상 갈증이 나고 목이 말라요. 그래서 꾸준히, 끊임없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보는 게 1차 목표에요."

우리는 이런 청년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물이 100℃가 되어 펄펄 끓기 전엔 마치 그냥 물인 줄만 알았던 것처럼, 우리는 99도의 뜨거움을 주목하지 못했다. 언젠가 끓어 넘치지 않아도 좋다. 99도의 물도 충분히 뜨겁다.

도전하는 청년에 대한 후원은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 다음 스토리 펀딩 후원 바로 가기 =>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3500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홍승오, #청년, #스토리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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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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