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수라>에 출연한 배우 정우성.

정우성이 영화 <아수라>를 통해 치열한 악인의 모습을 그렸다. ⓒ 사나이픽쳐스


영화 <아수라>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정우성은 당황했다. 영화 <비트>(1997)와 <태양은 없다>(1998)의 김성수 감독이 모처럼 꼭 하고 싶었던 액션 영화라는 말을 먼저 듣고 "그 분 옆에서 꼭 도움이 돼야지"라고 혼자 상상하던 차였다. "전형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며 그는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감독님은 여전히 젊음을 갖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라 말했다. 이렇게 두 사내의 만남이 다시 한 번 성사됐다.

9월 2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영화 속 한도경에 빠져있었다. 재개발 이권을 두고 각종 비리를 저지르는 지자체 시장 박성배(황정민 분)의 편에 서서 잔혹한 임무를 마다치 않는 '비리 형사'다. 박성배를 노리는 검찰 쪽에도 잠시 줄을 댄다. "이기는 편이 내 편"이라고 읊조리는 영화 초반 대사가 바로 한도경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악인을 바라보는 관점

 <아수라>의 한장면

영화 속 한도경(정우성 분)은 자신을 이용하는 조폭출신 박성배 안남시장(황정민 분)과 검찰 사이에서 방황하며 고통스러워 한다. ⓒ CJ엔터테인먼트


악인들 틈에서 여기저기 이용당하기만 한 악인, 그도 사람이니 지치고 권태롭다. 정우성이 표현한 한도경의 눈빛에 늘 피곤함과 그늘이 담겨 있었다. 안남시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시민들을 농락하는 정치인, 거기에 빌붙는 폭력배와 기업인들의 모습은 우리 현실에서 매우 익숙하다. <아수라>가 곧 현실의 반영 아니냐는 질문에 정우성의 눈이 반짝였다.

"상업영화니까 다수의 보편적 취향을 신경 쓴 건 틀림없다. 안남시라는 지옥 같은 세상을 그리고 왜 그리 잔혹하게 표현했는지가 중요하다. 현실 사회에서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있고, 시스템 속에 숨겨진 폭력이 있다. 그 숨은 폭력을 같이 느끼자는 것이다. 분명 폭력이 있다. 계층 간 폭력, 자본의 폭력, 또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 하지만 일반 사람들 관계에서도 만연한 폭력이 있잖나. 가상의 세계에서 그걸 비틀어 보자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아수라>엔 온갖 뒤틀린 폭력이 담겨 있다. 누군가는 그래서 영화가 매우 강하다, 보기 힘들다 호소하기도 한다. 더욱이 박성배 시장과 한도경은 물론이고 이들을 잡고 쫓는 검경 관계자들마저 사익 혹은 조직의 논리를 좇는 자들이다. 제목대로 악인들이 설치는 아수라판인 셈이다. 그 안에서 이용당하는 악인 한도경을 쫓다 보니 악인에 대해 너무 낭만적으로 접근한 건 아닌지 비판도 가능하다. 이에 정우성은 할 말이 있었다.

"악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악에 물들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다수 사람은 악인이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다 보니 그런 쪽으로 흘러가지 않나. 이건 결국 구조적 문제 같다. 이 사회가 어떻게 악으로 물들 수 있는지에 대한 관점이 영화에 담겨있다. 그래서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수많은 파렴치한이 매일 뉴스에 나오잖나. 연기하면서 정신과 마음이 힘들었고, 결국 그게 몸까지 힘들게 하더라. 한도경의 스트레스 안에 내가 있었고, 현장에서도 계속 한도경에 빠져있었다. 그 당시 만나던 지인들에게 뭔 일 있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웃음)."

분기점

 배우 정우성.

ⓒ 사나이픽쳐스


<아수라>를 본 한 영화감독이 SNS에 올린 평을 정우성에게 전했다. "<비트> 속 민이가 계속 나이를 먹었다면 한도경이 됐을 것 같다"는 취지였다. 정우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일견 합당한 연상 작용이다. 바이크에서 손을 뗀 채 흔들리며 달리는 민의 모습이 곧 청춘의 끝에서 방황하는 자의 상징이었으니. 희망도 꿈도 없이 성인이 된 한도경의 모습까지 이어졌다.

"솔직히 전혀 연관성을 느끼진 않았다. 한도경 자체가 워낙 어려운 인물이었기에. 물론 <비트>의 민이 나이를 먹었다면 한도경 정도의 나이가 됐을 거다. 아무래도 정우성이 나이를 좀 먹어 김성수 감독과 <아수라>를 했으니 그 연결고리 안에서 바라보신 거 같다. 오로지 난 한도경에 빠져 있었다.

한도경은 40대 중반이며 사회의 중간 지위를 차지하는 중년이기도 하다. 그가 방황하는 거다. 중년의 방황은 20대의 그것과 다르다. 그 모습을 영화화하면서 현실에 대한 비유를 담은 거다. <아수라> 속 도시의 세계관이 딱 그거다. 먹이사슬이 있고 그 정점에 있는 자가 도시를 꽉 쥐고 있다. 도경은 거기에 순응하면서 신분 상승을 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목이 조인다. 그렇다고 너무 절망적으로 보진 않으셨으면 한다. '이기는 편이 내 편'이라고 초반에 내레이션이 나오지만 동시에 후반에 '악은 어떤 악도 이길 수 없다'고 하니까."

그간의 연기를 복기하는 게 배우의 습성이라지만 정우성은 "이번만큼은 내가 현장에서 어떻게 연기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캐릭터를 규정하지 않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겼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분명 분기점이 될 작품"이라 덧붙였다. 스타 정우성이자 청춘의 아이콘이었던 그에게 어느새 배우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붙고 있다. 주변에선 치열하게 거기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결과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비트> <무사> 등의 대규모 상업영화는 물론이고 <모텔 선인장> 최근의 <나를 잊지 말아요> 등의 중·저예산 기획 영화 또한 참여하고 있다.

"청춘의 아이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다. 오히려 그걸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연기를 자유롭게 했는데, 외부에서 보시는 분들은 강박감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 거 같다. 자연스럽게 일을 했으니 내가 버텼지, 강박감이 있었다면 이 일을 하면서 몇 번을 상처 입고 다쳤을 거다. 흥행을 하지 못하거나 연기가 부족하다는 지적에 일희일비했겠지.

배우를 하고 싶었고 현장이 행복하다. 본의 아니게 일상에서 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기에 내가 놀 곳은 현장이잖나. 자기 행보에 대한 의미 부여를 명확히 해야 할 거 같다. 작품 흥행이 전부가 아니다. 뭔가 새로운 캐릭터, 도전의 의미가 있으면 하는 것 같다. 외부의 성패와 상관없는 내면의 성공이 중요하다. 어쩌면 나만의 작은 성취일 수 있는데 그게 모여서 새로운 걸 시도하는 동력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양심에 대해

 배우 정우성.

"이기는 편이 내 편"이라고 영화 속 한도경이 읊조리지만 동시에 "악은 어떤 악도 이길 수 없다"고 고백한다. <아수라>에서 느낄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다. ⓒ 사나이픽쳐스


당분간 정우성은 휴식을 가질 예정이다. 촬영이 끝나고 부랴부랴 여행도 다녀왔다지만 여전히 한도경의 잔상이 남아 있기도 하고, 그 느낌을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캐릭터적인 매력도 있었고, 제작 유경험자로서 영화와 그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아수라>의 의의와 영화의 현실 반영에 대한 그의 생각을 마지막으로 물었다.

"현실 반영이 무엇인지 관점에 따라 그 정의는 다르겠지만 중요한 건 얼마나 영화적 화법으로 표현했는지가 중요한 거 같다. <아수라> 속 안남시가 실은 수원의 누구, 진짜 한국 어느 도시의 검찰을 그리려 했다면 다른 묘사를 했겠지. 언제부턴가 영화의 현실 비판을 원하는 움직임도 있고, 그걸 꼭 영화에 담아야 한다는 강박도 영화인 사이에서 생긴 거 같다. 개인적으론 현실을 담더라도 보이지 않는 고리처럼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명작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아수라>가 현실을 비틀어서 반영했다고 묻는 거라면 난 100% 반영했다고 본다. 한도경만 봐도 알 수 있다. 악에 타협할 땐 약한 척하고 일은 과감하게 처리한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가 한도경에겐 양심을 돌아보게 하는 존재다. 악과 손잡기 직전 어떤 여백이 느껴지잖나. 중요한 건 선택의 찜찜함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느냐 없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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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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