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카메라가 사진관을 투박하게 비춘다. 이윽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쑥스러운듯 혹은 익숙하게 사진관 안으로 들어온다. 오랜만에 사진을 찍으러 온 듯한 모습이다. 카메라는 그들을 비추고 관객들은 이내 그들이 입은 푸른색 작업복 위로 뚜렷이 쓰인 '최종범 열사 정신 계승'이라는 말을 보게 된다. 최종범, 2013년 10월 삼성전자서비스 AS기사였던 그는 사측의 노조탄압에 "전태일처럼 하지는 못해도 선택했다, 부디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조합원들이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가 그때 어떤 마음으로 싸웠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울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땅에 묻었는지, 그걸 잊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김진숙)

한진중공업 노동자사(史)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들의 섬>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은 "마음을 잃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 1981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이래, 김진숙은 여러 동료를 잃었다.

일을 하다 아래로 떨어져 죽는 사람들. 현장에서는 도무지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무서워할 겨를이 없다. 이들을 김진숙 지도위원은 "깨진다"고 표현했다. 김진숙은 "저게 나의 죽음일 수도 있는데 그런데 나도 일을 해보니 저게 내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일을 못하겠더라 무서워서"라며 "그냥 '아이고 또 하나 깨졌네' 이러고 마는 거지. 이게 남의 죽음이 돼버리는 거다 조선소 노동이 참 서럽다"고 했다.

2003년 김주익 한진중공업 민주노조 지회장은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하던 129일이 되던 날, 땅을 밟지 못하고 목을 맸다. 곽재규 조합원은 이에 비관해 도크 위로 몸을 던졌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 위에 올라간 건 그로부터 8년 후인 2011년이었다. 크레인 위에서 생명을 걸고 309일을 고공농성을 하고 내려와도 변한 게 없는 상황, 옆에서 일하던 동료들이 죽어 나가도 더 이상 유의미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나라에서 마음이라니.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출연자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출연자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 이정민


지난 12일 <그림자들의 섬> 언론시사가 끝나고 이어진 기자회견 자리에서 김진숙은 "사실 이 자리에 안 오고 싶었다"고 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민주노조를 노동자들은 '죽음으로 지켜낸다, 사수한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은 모두 그냥 옆에 있던 사람들 삶을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이 그냥 '세상에서 없어진 것"이라며 "그런 기록들을 재생해서 본다는 게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김진숙을 비롯한 한진중공업 민주노조 노동자들은 이를 모두 자신들의 탓이라 했다. "우리들은 왜 이렇게 무능하고 무기력했을까." 김진숙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이후 어떤 이는 우울증을 얻었고, 그는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현장에 남은 사람들은 "전부 자기 탓이라 생각했다."(김진숙)

"내가 크레인 밑에 남아 있었으면 혹은 내가 지켰으면 대오를 이탈하지 않았으면... 그 후에 재규형이 도크 바닥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는데, 그 죽음이 더 끔찍했던 건 모두 다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잃지 않는 법이요?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김정근 감독과 출연자인 윤국성씨,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박성호씨, 박희찬씨 등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김정근 감독과 출연자인 윤국성씨,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박성호씨, 박희찬씨 등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언론시사가 끝나고 김정근 감독과 <그림자들의 섬> 출연자이자 한진중공업 노동자 박성호·윤국성·박희찬씨와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동료들의 죽음을 겪고나서도 마음을 잃지 않는 법이란 게 있느냐'는 질문에 자신들이 생각한 바를 털어놓았다.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출연자인 박성호 한진중공업 노동자.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출연자인 박성호 한진중공업 노동자. "투쟁을 하고 복직했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목숨 값으로 복직했다고." ⓒ 이정민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건 어려운 이야기다. 자기 뜻대로 생각한대로 가는 것이 좋은데 환경에 휘말리다보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 일단 무엇이 됐든지 잘못했든 잘했든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중심을 잃지 않으면 된다."

82년 한진중공업 기관실파트로 입사한 박성호씨의 관록이 느껴지는 대답에 이어 윤국성씨는 "정치 투쟁을 해내고, 싸워서 이겨내겠다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을 털어놓았다.

그건 어쩌면 그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그는 "노동조합활동을 하다가 다시 안 하고 있다"면서 "그정도로 마음이 지쳤다"고 했다. 이어 "몸이 안 따라주고 환경이 안 따라주고 그렇지만 오늘 영화를 보면서 새롭게 마음을 다졌고 더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출연자인 윤국성 한진중공업 노동자.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출연자인 윤국성 한진중공업 노동자. 그는 자신이 조선소 노동자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드러냈다. "원래 우리는 영화 속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배를 만들거든." ⓒ 이정민


출연진 중 가장 막내라 할 수 있는 박희찬씨(2001년 전장파트 입사)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나도 똑같이 정리해고의 순간이 오면 흔들릴 거고 선배님들이야 수많은 경험을 통해 왔으니 말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나는 단계를 밟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그런 방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박희찬씨는 "나중에 시간이 흘러 살아남아 있을 때 또 만나뵙게 되면 그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고 답했다.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출연자인 박희찬 한진중공업 노동자.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출연자인 박희찬 한진중공업 노동자. ⓒ 이정민


<그림자들의 섬> 인터뷰여야 했다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김정근 감독.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의 김정근 감독. ⓒ 이정민


영화 <그림자들의 섬>을 만든 김정근 감독은 지난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다룬 영화 <버스를 타라>의 감독이기도 하다. 재미있게도 김정근 감독은 스스로를 "공고를 그만둔 '사짜 공돌이'"라 부른다. 그는 "둔탁한 공돌이 생활이 싫어 학교를 때려치운 전형적인 철없는 케이스"라고 고백한다.

그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2010년부터 감정적인 유대를 끊임없이 쌓아왔다. "열심히 기록하고 공유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2010년 한진중공업에서 다시 정리해고 발표가 있었고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정리해고 반대 집회에 나섰다.

그것이 물론 '영화를 위해서'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지난 6년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담을 수 있는 기회가 돼주었다. 또 그 시간동안 노동자들과 쌓은 특별한 유대관계는 결과적으로 그에게 좋은 인터뷰를 담을 수 있게 해주었다. 영화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역사를 꼼꼼하게 다룬 다큐멘터리이기도 하지만 '인터뷰'라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얼굴'과 '말'을 담아낸 영화이기도 하다.

김정근 감독은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며 "이들이 굉장한 '투사'가 아니라 보통의 사람이고 평범한 노동자들임을 보여주는 게 (영화의) 중요한 가치였다"고 답한다.

김 감독은 "투쟁 현장의 노동자들이 아니라 마음이나 표정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러려면 인터뷰여야 했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고 싶었다, 이들의 사건이 그저 단발적인 뉴스로만 기억되는데 이들이 사건 이후 어떤 것을 느꼈고 그것이 얼굴로 보이고 그런 부분들을 알아봐주셨으면 한다."

<그림자들의 섬>은 여러 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얼굴을 자세히 담는다. 실제 동료들의 죽음을 지나쳐 온 어딘가 지쳐보이고 슬퍼보이는 한편,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오로지 다큐멘터리에서만 건질 수 있는 장면이다. 어떤 배우보다 더 관록이 깊게 배인 얼굴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새벽이 밝아오는 조선소의 전경'으로 서서히 이어진다. 김정근 감독은 말한다. "일하는 현장에 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간이 더 경이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부산 영도(映島) 영도를 직역하면 '그림자들의 섬'이다. <그림자들의 섬>은 오는 25일 개봉한다.
그림자들의 섬 김진숙 다큐멘터리 조선소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